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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5) 김정기: 우리 이웃집 아저씨 백남준
NAM JUNE PAIK (July 20, 1932 – January 29, 2006)
우리 이웃집 아저씨 백남준
김정기(시인)
1985년 뉴욕한국문화원에서 열린 그룹전, 그의 작품 앞에서 고 백남준과 김정기 시인.
백남준 선생님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쇼에서 였다. 그때 브롱스의 리버데일 아파트에서 텔레비전을 시청하던 남편은 “백남준씨가 한국인”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했지만, 나는 별로 흥미없이 들어 넘겼다.
그 다음해 초 뉴욕한국문화원장이 어느 모임에서 그분이 우리 아파트 옆 건물에 산다고 귀뜸해 주었다. 얼마 후 남편과 작업실인 그의 좁은 아파트를 방문해보니 있는 것이라고는 고장난 듯이 허술한 텔레비전 수상기 몇대와 먼지 뿐이었다.
그후 몇 번 우리 아파트를 찾아온 그분은 우리 아들들에게 "아버지도 시를 쓰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외교관으로 오셨고, 시를 안쓴다"고 대답하니까 "아이구, 다행이다! 아버지까지 시를 쓰면 큰일 날 뻔했지!"하면서 "집안에서 엄마가 아파 누워 있는 것보다는 아버지가 아픈 게 낫다"는 그런 얘기도 해주는 옆집 아저씨 같은 따뜻한 분이었다.
우리가 처음 맨하탄 한인타운 근처에서 쥬얼리 가게를 했을 때는 가게에도 몇 번 들르셨다. "이 거리를 잘 걸어 다니며, 지하철을 타고 다니면서 한국 사람들하고 말을 잘하는데 'ABC'라는 쥬얼리 가게에서 물건을 사다가 팔라고 선전하며 다녔다"고 하셔서 우리가 박장대소를 하며 '우리 가게 홍보부장'이라고 놀려 드렸다.
1997년 독일문화원(Goethe Institut) 괴테메달(Goethe Medal) 시상식에서. 이미 휠체어를 타신 백남준 선생님은 소탈하게 마이애미의 뉴스 카페(News Cafe) 티셔츠를 즐겨 입으셨다.
서울올림픽 비디오아트를 제작해야 하는데 정부에선 돈을 안 준다는 그런 이야기도 하셨다. 우리가 처음 사카린 사업했던 것도 기억하여 되묻던 순하고 어진 친구같아서 남편과도 잘 어울렸었다. 생각보다 친구도 별로 없어서 총영사 자택 초대나 세계적인 상을 타거나 본인이 연사를 할 땐 우리 부부에게 함께 가자고 했다. 어떤 때는 우리와 문화원에서 한두분 온 적도 있었다.
어느 날 우리도 바쁘게 지내는데 전화를 하셔서 "리버데일 아파트를 세놓고 싶으니, 김정기 시인이 세를 놓고 얼마를 받아달라"고 하여 그럴 겨를이 없다고 거절했던 것이 지금도 마음에 걸린다. 결국은 한국의 어느 분에게 소개하여 팔아 드리는데 일조를 하였지만.
한국미술 역사상 가장 자신만만하고, 전위적이며, 위트 넘쳤던 아티스트 백남준 선생님은 언제나 소탈하셨다. 음식도 누룽지 끓인 것이 구수하다고 좋아하셨다. 어느날은 피아노로 아리랑을 치며 구성지게 독창을 즐겼다. "예술은 새로운 창조이며, 나는 비디오 아트에서 레이저 아트로 더 더욱 계속 나아갈 것"이라면서 "시도 새로움을 향해가야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2001년 소호 머서스트릿 자택에서 고 백남준과 김정기 시인.
내가 방송국과 함께 미국을 움직이는 이민 1세들에 부모님 이야기를 편집할 때 플로리다에 가계신 선생님께 전화했다. 그는 서울 서린동이 고향이라며 한양 조씨 어머니 이야기를 팩스로 보내주어서 내가 새로 써서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어리굴젓'이라는 제목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독일로 간 아들에게 "먹는 것에는 돈 아끼지 말라"고 늘 편지해 주셨다고 했다. 그러나, "혈압에 나쁘다고 해서 짭짤하고 매콤 짜릿한 맛, 고향의 맛, 조국의 맛을 그리워 할뿐"이라고 전화 통화에서 쓸쓸히 말씀하셨다.
2000년도 들어서자 많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해 4월 구겐하임 회고전에서 휠체어를 탄 선생님을 뵈었고, 누룽지를 만들어 남편과 소호의 댁을 여러번 방문하기도 했다. 2006년 1월 마지막으로 선생님 댁을 방문하였을 때 선생님은 누워서 기동을 못하고 계셨다. 부인 시게코는 침 맞으러 차이나타운에 갔고, 시중들던 남미인 스티브는 심부름 가고 없었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자꾸 벽에 붙은 그림(*사람들이 손잡고 서있는 색깔있는 그림)을 떼어가라고 하여 '괜찮다'며 사양하고 왔다.
그 며칠 후 1월29일 선생님이 플로리다에서 소천하신 소식을 접했다. 아마 그때 나에게 집도 팔게 해드린 고마움과 따뜻한 이웃으로 사귄 미안함에서 그랬구나 되짚어 보았다. 장례식 장면이 서울 KBS-TV에서 방영되어 한국에 시인 친구들이 우리 부부를 보았다고 전화가 왔었다. 우리 남편은 다음해에 소천했다. 그때 시게코와 통화하니 "미스터 백과 미스터 박이 하늘나라에서 만났을 것"이라며 "미스터 박은 핸섬하고, 점잖은 신사였다"고 위로해 주었다. 약속했던 그림 이야기는 끝내 물어보지 않았지만 마음으로 받았다.
"김정기 여사에게 받침." A용지보다 조금 큰 두꺼운 화선지에 그려 주셨다. 색깔있는 것들은 도화지인데 못찾았다.
내가 멍청인가, 후회할때도 있지만 인간관계에 있어서 생각의 크기가 주는 만큼 받지 못할 수도 있다. 다 덜어내고 씻어내지지 않지만, 사람 사이에 맑은 강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장례식에서 만난 크리스트나 최라는 예쁜 어느 화실 주인은 김정기 선생이 한국 사람으로 마지막 백선생님을 뵌 분이라고 했다.
내 시집 <꽃들은 말한다>와 <빗소리를 듣는 나무>에는 백남준 선생님에 대한 시가 한 편씩 수록되어 있다. "어눌한 모국어나/ 당신을 만나려고 줄선 세계의 젊은 아티스트들이 눈물겹게 아름다웠다/클린턴 앞에서 바지가 내려갔건 /낮잠이 취미건/티셔쓰를 입고 파티에 나가건/당신은 꿈꾸는 자의 꿈이며/ 금세기의 별이며 /조선사람의 흰옷이다/그리고 코리아의 살결이다" 라는 구절을 읊는다
김정기 (시인/문학교실 강사)
1970년 “시문학”지로 문단 데뷔, 1975년 시집 “당신의 군복” 출간. 1979년 도미. 시집 "구름에 부치는 시" "사랑의 눈빛으로" "꽃들은 말한다" "빗소리를 듣는 나무", 수필집 등 다수. 제 13회 미주문학상, 제 5회 고원문학상 수상. 라디오코리아 양서추천 담당 [16년], 현재 뉴욕 중앙일보 문학교실 담당[20년].
*슬픈 시인의 노래: 김정기 시인의 '빗소리를 듣는 나무' 읽기
*Poetry Window 김정기: 빗소리를 듣는 나무
*Poetry Window 김정기, 강물의 사서함/Kim Jeongki, Postbox of a River
*Poetry Window 김정기, 입춘의 말/Kim Jeongki, Whispers of Early Spring
선생님을 '우리 이웃집 아저씨'로 소개하는 정겨운 이야기 참 감동적입니다.
김선생님 시도 편안하면서도 자꾸 돌아보게 만드는...웬지 마음을 울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