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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독감과 화가들 (2)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스승의 최후 그린 제자 에곤 쉴레와 운명의 쌍곡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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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stav Klimt, Death and Life, 1908–1911. Leopold Museum, Vienna

 

2020년 코로나 바이러스19(COVID-19)가 세계적인 유행병이 되면서 경제와 사회는 휘청거리고, 문화 활동도 정지됐다. 집콕(Stay at Home) 생활에 익숙한 직업인 아티스트들은 또한 가장 세상의 변화에 민감한 이들이다. 그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작업을 하고 있을까?

 

지금으로부터 거의 100년 전엔 스페인 독감(Spanish Flu Pandemic)이 3년여간 전 세계를 휩쓸고 지나갔다. 1918년 1월 시작되어 1920년 12월까지 세계 5억여명을 감염시켰다. 전 세계 인구의 4분의 1이다. 그리고, 5천만여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그에 앞선 1347-1351년의 흑사병으로는 2천500여만명이 사망했다. 스페인은 억울하게 '스페인 독감'이라는 오명을 안게 됐다.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중립국이었던 스페인에서는 국왕 알폰소 13세까지 독감에 걸렸고, 참전국들과는 달리 검열 없이 신문에 보도되면서 '스페인 독감'으로 굳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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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stav Klimt, Reclining Girl (Juliet) and Two Studies of Hands, 1886-87  

 

스페인 독감에 걸렸다가 살아남은 유명인으로는 프랭클린 D. 루즈벨트, 우드로우 윌슨 대통령, 마하트마 간디, 월트 디즈니를 비롯, 영화배우 릴리언 기쉬, 메리 픽포드, 화가 조지아 오키프, 에드바르트 뭉크,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 D. H. 로렌스, 시인 TS 엘리엇, 작곡가 벨라 바톡, 비행사 아멜리아 에어하트 등이 있다. 한편, 프랑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 스트리아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쉴레는 스페인 독감으로 1918년 목숨을 잃었다.

 

 

스페인 독감과 화가들 (2)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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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클림트(1887), 에곤 쉴레가 그린 푸른 옷의 클림트(1913), 사후에 그린 클림트(1918)

 

스페인 독감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던 1918년 2월 7일 화가 에곤 쉴레(Egon Schiele, 1890 -1918)는 비엔나 종합병원으로 갔다. 시체실에 싸늘하게 누워있는 스승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를 그리기 위해서였다. 클림트는 전날 스페인 독감으로 인한 뇌경색으로 세상을 떠났다. 쉴레는 뇌경색으로 비틀어진 클림트의 초상을 그렸다. 

 

그후 에곤 쉴레는 자신과 임신 중인 부인 유디트을 모델로 '가족(The Family)'을 그리기 시작했다. 곧 태어날 아기의 모습까지 담은 가족 초상화가 완성되기 전 아내가 스페인 독감에 걸려 사망했다. 쉴레 자신은 3일 후인 10월 31일 눈을 감았다. 자신의 모습을 그릴 수 없으니 사진으로 남겼다고 한다. 당대 오스트리아의 두 화가, 스승과 제자가 1918년 스페인 독감으로 목숨을 잃은 것이다.   

 

관능적인 에로티시즘의 대가 구스타프 클림트는 1911년 로마에서 열린 국제미술전에서 '죽음과 삶(Morte e Vita, *Top Image)'으로 금메달을 수상했다. 아르누보 스타일로 삶과 죽음의 알레고리를 표현한 역작이다. 7년 후 클림트는 스페인 독감 유행 초기에 세상과 이별을 고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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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stav Klimt, Portrait of Amalie Zuckerk(unfinished) 1917-1918. Galerie Belvedere, Vienna

 

클림트 최후의 작품으로 추측되는 '아말리 주커칸들의 초상'은 미완성으로 남았다. 오스트리아 벨베데르 미술관이 소장한 이 그림의 주인공은 오스트리아 의사 오토 주커칸들(Otto Zuckerkandl)의 부인이다. 이 부부는 제 1차 세계대전 후 이혼했다. 아말리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딸 노라와 나치에 의해 추방된 후 수용소에서 살해당했다. 

 

이 미완성 초상화는 아말리의 친구였던 설탕 사업가 페르디난드 블로흐-바우어가 소장하고 있었다. 블로흐-바우어는 1938년 오스트리아에서 피신해 쥐리히에서 살다가 1945년 사망한다. 그는 유서에 비엔나에서 소유하고 있던 자신의 모든 재산은 압수되어 매각됐다고 설명했으며, 유족은 초상화를 찾지 못했다. 

 

클림트가 그린 페르디난드의 부인 '아델 블로흐-바우어의 초상'(1907)도 소송 끝에 나치 약탈품으로 판명되어 2006년 조카인 마리아 알트만에게 돌아갔다. 그해 1억3천500만 달러에 팔려 뉴욕 노이에 갈러리(Neue Galerie)의 소장품이 됐다.  

 

*영화 '황금 옷을 입은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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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stav Klimt, Beethoven Frieze, 1902 (detail), Secession Building, Vienna, Austria

 

구스타프 클림트는 비엔나 인근의 바움가르텐에서 3남4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금속 공예사, 엄마는 가수 지망생이었다. 비엔나의 응용미술대학에 다면서 벽화 작업을 시작했다. 클림트는 오스트리아 미술계의 보수성에 반발해 1897년 비엔나 분리파(Secession)을 결성해 에로틱한 이미지의 아르누보(유겐스틸, Jugendstil) 스타일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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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Kiss (Lovers), oil and gold leaf on canvas, 1907–1908. Galerie Belvedere, Vienna

 

클림트는 수많은 여자 모델들과 연인이 되었다. 그중 1890년대 초 만난 패션 디자이너 에밀리 플뢰게(Emilie Flöge)가 뮤즈가 되었다. 자신들을 모델로 걸작 '키스'(1907-08)를 그리게 된다. 1918년 2월 6일 클림트가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하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에밀리를 데려와"였다고 한다. 

 

에밀리는 클림트 사후 그의 가족과 유산을 절반씩 분할했다. 그러나, 제 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에밀리의 집에 불이 나서 의상은 물론 클림트가 남겼던 귀중한 유산도 타버렸다. 

 

 

*영화 '황금 옷을 입은 여인'

*독일 모젤 트라벤 트라바흐의 구스타프 클림트와 유겐스틸(아르누보)

*스페인 독감과 화가들 <1> 에드바르트 뭉크

*스페인 독감과 화가들 <3> 에곤 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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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ukie 2020.08.11 13:22
    주말 잘지내셨지요? 컬빗이 내곁에 있어서 즐거운 주말을 보냈습니다. 아직도 로렌스빌은 우한폐렴에서 한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방콕을 언제까지 해야되는지 앞이 안보입니다. 백신이 나올때까지라면 기다리겠습니다. 그 기다림 속에서 뉴욕컬빗은 더 가까운 친구가 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심전심을 써야겠습니다. 컬빗을 여기저기 들쳐가면서 읽었습니다. 많은 화가들이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문득 구스타브 클림트가 떠 오랐습니다. 그리고 그가 스페인 독감으로 죽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코로나도 독감의 일종이라고 생각하면서 클림트와 연결해서 어느 화가가 코로나로 죽었나 생각했습니다. 클림트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자세하게 강의를 해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색상이 화려하면서도 아름답네요. 작은 구석까지도 소홀히 하지않고 색상을 가다듬었네요. smile을 비롯한 그의 모조품은 봤는데 진품은 못 봐서 유명 뮤지움에서 전시를 하면 꼭 볼 참입니다.
    나의 내면의 품격을 올려주시는 컬빗에 감사를 드립니다.
    -Ela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