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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4) 강미현: 코로나와 이산가족 위기 2
쏙닥쏙닥 (2) 뉴욕 드라마 2
코로나와 이산가족 위기 2
Mihyun Kang, Fingers Trip #1, 2016
초보자로서 뉴욕에서 산다는 건 생각보다 냉혹하기도 했고 그 냉혹함이 지나가면 소소한 달콤함이 오기도 했다. 친구의 말을 빌리자면, 늘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느낌이다. 그렇다. 우리는 늘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었다.
생계유지를 위해 시작한 프리랜서 사진일이 줄어들면 마음이 덜컹하고, 그러다가도 내 작업에 대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구를 만나면 다시 위로받고, 갑자기 올라가는 렌트비에 이사를 가야하면 마음이 싸늘해지다가도, 때 마침 작품을 보겠다고 갤러리스트에게서 연락이 오면 먹구름 낀 날도 화창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1-2년 뉴욕에서 롤러코스터를 타게 되면, 타성이 붙어서일까? 일어나는 일들에 태연해지게 된다.
우리 가족이 JFK 공항에서 한국 행 비행기를 날려 보내고, 코로나 팬데믹 상황 속에서 막상 갈 곳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한 3시간 정도는 머리에서 쥐가 났다. 공항에서 상황 수습을 위해 온갖 곳에 전화를 하고, 일단은 살던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아침에 집을 빼고 나왔는데, 오후에 돌아가는 처지가 되다니....집에 돌아가자 윗층에 사는 피아니스트 친구가 점심으로 파스타를 만들어다 주었다.
게다가 매트리스와 침구를 버려주기로 한 관리인이 아직 처리하지 않은 덕에 우리는 늘 쓰던 매트리스에서 일단 차분히 가족 낮잠을 자기로 했다. 집을 빼기위해 서둘러했던 짐 정리의 피로와 코로나 감염을 걱정하며 공항으로 갔던 긴장감과 남편 입국 불허가의 쇼크가 겹친 탓에 낮잠이 오지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매트리스에 누워보니 마음이 편안했다.
Mihyun Kang, Fingers Trip #2, 2016
얼마나 잤을까... 밖이 어둑어둑해서 일어나보니 남편이 슈퍼마켓에 가서 스테이크를 사가지고 왔다. 우리 집은 백야드와 그릴이 있었다. 우리는 스테이크를 구워먹으며 원기를 보충하기로 했다.
그렇게 빈집에서 이틀을 보낸 뒤 남편의 동료이자 친구인 론의 도움으로 그가 비워 준 집을 임시 거처로 옮길 수 있었다. 맨해튼 어퍼웨스트사이드에 있는 론의 집은 화가이자 인테리어 디자이너인 부인이 모던 내츄럴 취향으로 꾸며놓은 집이었다. 집에 들어오자 딸 미수의 첫 한 마디 "엄마, 론 집 예뻐!". 그랬다. 그렇게 우리는 예쁜 집에서 앞으로 우리의 어떻게 이 사태를 수습해야 할지 찾아야했다.
일어난 일에 미련을 두기보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 지에 집중하기로 했다. 사방팔방 전화해도 남편의 한국 입국이 가능할 것같지 않았다. 게다가 아르헨티나의 국경봉쇄는 연이어 연장되었다. 아르헨티나가 국경을 봉쇄하면, 한국도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입국을 막게 되어 남편의 한국행은 불가능하다. 남편이 한국에 갈 수 있는 방법은 비자를 만드는 일인데 뉴욕영사관은 코로나 때문에 비자업무가 중지 된 상태여서 비자 접수자체가 안 된다는 말 뿐이었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하나? 한국행에 집착하지 말자. 만약 뉴욕에서 다시 집을 얻는다면 가능한 산 속으로 가야겠다 등등 남편과 긍정적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긍정적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스트레스로 얽힌 화를 푸는 효과가 있는 듯 하다. 우리는 한국이 입국을 금지한 나라가 90여개국이나 되니 우리와 같은 사고가 다른 가족에게 일어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신문사에 제보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그리고 그날 밤 아이와 남편이 잠든 후 나는 컴퓨터를 켜고 몇몇 미주 신문사에 우리 사연을 제보했다. 그러자 그 다음 날 진짜로 한국일보 기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Mihyun Kang, Fingers Trip #3, 2016
내가 말했던가? 뉴욕에서의 삶은 늘 드라마틱하다고.
한국일보 기자는 기사작성을 위해 나에게 몇몇가지 질문을 하고 사실 확인을 위해 몇몇 곳에 전화를 했다. 그리고, 기자가 발견한 사실은 워싱턴 D.C. 영사와 전화 통화를 했는데 남편은 당연히 비자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에? 뭐라구요?" 나는 침을 콜깍 삼키며 되물었다. "어떻게요? 어떻게요?" 내가 두번씩 말하는 것은 두살 딸아이와 말하며 생긴 습관이다.
영사관 업무가 중단 된 곳은 뉴욕 뿐이라는 것이다. 워싱턴 D.C.나 LA와 같은 다른 도시에서는 정상업무를 하고 있으며, 뉴욕 영사관의 경우도 긴급비자를 발행한다는 것이다. 갑자기 먹구름이 확 거치며 오랜만에 그놈의 롤로코스트를 다시 타는 듯한 느낌이었다. 기자는 역시 기자다. 내가 뉴욕 영사관에 매일 같이 전화했을 때는 일반 업무로 처리되어 길이 없었다. 그런데, 기자가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신문에 기사가 나온 뒤, 우리 케이스가 긴급비자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영사관 직원분들로부터 안타까운 상황을 위로받으며 진심으로 마음을 터놓고 전화하는 관계가 되었다. 영사관 분들은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주지 못한 점에 대해 사과하셨다. 전화 건너 목소리가 너무나 따뜻하고 차분해서 그간의 서러움이 술술 풀리는 듯 했다. 그날 밤 나는 딸 미수에게 때 아닌 '아리랑'을 틀어주었고 그동안 이해할 수 없었던 나만의 '아리랑 미스테리'도 풀었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라는 우리의 '아리랑'을 들으며 왜 미련을 못버리고 저러나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마음에 담아두면 병이 되는 법. 말이라도 좋으니 그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고 노래하며 서러움을 살살 달래는 것이었다.
예쁜 론네 집에 머문지 일주일만에 우리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 들었다. 남편의 결혼비자 서류를 신속 그리고 정확히 준비했다. 뉴욕과 한국가족들의 도움으로 20개가 넘는 서류와 증명서를 일사불란하게 3일만에 준비하여 영사관에 제출했고, 비자 신청 후 3일만에 우리는 비자를 집에서 프린트 할 수 있었다. 한국은 비자도 집에서 프린트한다. 영사관에 여권을 맡기고 비자를 첨부한 여권을 우편으로 받는 아날로그 시대는 끝났다.
아... 너무 편한 세상이다. 너무 맘도 편하다.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겠다. 남편이 다시 스테이크를 사왔다. 필레미뇽으로 사왔다. 유난히 봄비가 많이 오는 뉴욕의 밤. 창문 다 열어놓고 구워먹어야겠다. 우리 가족은 내일 한국 행 비행기를 탄다. 이번에는 탈 수 있을 것이다. <2020년 5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