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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8) 강미현(사진작가): 드디어 한국, 그리고 자가격리
쏙닥쏙닥 (3) 코로나 위기
드디어 한국, 그리고 자가격리
조카에게서 카톡이 왔다. “이모! 할머가 또 김치 담근데”
엄마는 우리 가족이 한국 도착 후 자가격리 동안 먹을 김치를 또 담고 계시나 보다. 한달 전 쓰러지면서 테이블에 머리를 부딪혀쳐 어마어마하게 피를 흘리셨으면서. 김치를 또 담그신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는 것은 세살 딸과 80세 노인의 공통점인가 보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좋기만하다. 엄마가 계셔서.
Mihyun Kang, NY, 2016
두번째 한국 행 도전. 영사관의 도움으로 남편의 긴급 비자가 나오자 마자 항공기 편을 예약하고 짐을 싸기 시작했다. 뮤지션인 남편과 여행을 많이 한 덕에 짐 싸고 풀기에는 요령이 붙었다. 우리 가족이 머물수 있도록 집을 내어준 론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매일같이 집을 쓸고 닦아 놓은 덕에 집 정리와 청소는 간단했다.
결혼 비자 발급 3일 뒤, 일요일 아침. 우리는 친구 미알틴(Mialtin Zhezha)의 차로 JFK로 향했다. 이 코로나 시국에 차로 공항까지 데려다 준다니 그저 고마울 뿐이다. 미알틴은 알바니아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우리가 살던 동네 도서관에서 만난 딸 친구 엘리나의 아빠다. 맨하튼 북쪽의 워싱턴하이츠라는 우리 동네는 은근히 뮤지션들이 많았다. 맨하튼의 다른 구역보다는 렌트비가 저렴한 편이고 연습과 리허설이 많은 뮤지션들에게는 살기 적당한 장소였다. 서로 소리를 내기 때문에 그저 소리도 삶의 일부분으로 생각하며 살 수 있기 때문이다.
타운하우스 우리 건물에는 여덟 가구가 살고 있었는데 그 중 세 가구가 뮤지션이었다. 우리 윗층에 에스토니아 출신의 료니가 이사 들어오던 때를 기억한다. 내 남편(JP Jofre)의 악기 반도네온은 정말 소리가 크다. 뮤지션과 함께 살아 본 사람만이 이해하겠지만 집에서 연습하는 악기 소리는 공연장에서 연주하는 아름다운 풍경과는 거리가 멀다. 똑깥은 음을 한없이 반복하며 내는 그 소음은 동거인으로서 한계를 보게된다. 그래서 내가 불평을 하면 남편은 그랬다. 그래도 자기 악기가 드럼이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그런데 윗층 료니가 이사온 며칠 후, 우리는 드럼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여름이면 지역주민들이 밖에 나와서 커다란 스피커로 음악을 들었다. 우리 동네는 서로가 소리에 대해 불평할 수 없는 이 구조 때문에 뮤지션에게는 살기 적당했다.
우리의 임시 거처였던 어퍼웨스트사이드의 콘도미디엄 건물로 들어 온 둘째날, 집 주인 론(Ron Wasseman)에게 전화가 왔다. 윗층에 사는 사람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저녁 9시 30분 이후 딸 미수가 노래를 안 불렀으면 한다고. 코로나 이후 집콕이 길어져 아이의 잠자는 시간이 늦어진 탓도 있고, 론 집에 오게 된 기쁨도 있고, 늘 노래를 부르는게 버릇이 된 여러 이유를 막론하고 그저 민망했다. 우리가 살던 동네가 우리에게는 적당했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Mihyun Kang, go to Geneva, 2016
JFK에 도착하고 미알틴의 배웅을 받으며 우리 가족은 그와 자연스럽게 포옹을 했다. 오랜만에 하는 친구와의 포옹이었다. 처음에는 2살 딸들의 부모로서 만나게 되었지만, 두 가족은 아티스트 커플이라는 비슷한 환경과 미알틴의 따뜻한 인성 덕분에 생일과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내는 꽤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미수와 엘리나는 거의 매일 같이 도서관이나 놀이터에서 만나는 사이였다. 그런데 3월 중순 갑작스러운 코로나 확산으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작 된 후 하루 아침에 같이 놀 수가 없게 되었다. 아침이 되면 매일같이 미수는 오늘은 어디가냐고, 누구 만나냐고 왜 엘리나 안 놀러오냐고 물어봤다. 우리의 일상을 송두리째 뺴앗아 버린 코로나 팬데믹은 특히나 아이들에게 너무 잔인했다.
공항은 마치 유령도시를 방불케했다. 탑승수속을 마치고 터미널 안에 들어가기까지 만난 인원은 겨우 10명 남짓이었다. 우리가 다니던 슈퍼마켓보다 훨씬 안전했다. 대한항공 기내도 탑승객들을 두세줄에 한명씩 앉히고 충분한 거리와 공간을 확보시켜주었다. 탑승객은 모두 마스크를 하고 거의 움직이지 않으며, 제공되는 식사를 최대한 간단히 끝내는 분위기였다. 장시간 미동도 하지 않는 이 분위기는 우리가 학창시절 다니던 도서관에서 몸에 배인 것일까? 보이지 않는 긴장감은 있었지만, 기내는 정말 차분하고 조용했다. 넉넉한 자리를 침대 삼아 두 다리 쭉 펴고 자다보니 어느새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엄마의 화분
드디어 인천공항이다. 한국의 공항에 도착한 것만으로도 코로나 팬데믹이 해제된 느낌이었다. 공항에서 일하시는 분들의 차분하고 담담함에 마음이 놓였다. 공항에서 집중적으로 체크하는 것은 자가격리 동안 입국자들의 신분확보였다. 모든 입국자는 핸드폰에 안전체크 앱을 설치하고 하루에 두번씩 자가 건강체크를 보내야하며 수시로 위치도 추적당한다. 공항에 밤에 도착해서인지 입국 당일 우리는 일단 집으로 갈 수 있었고 코로나 검사는 다음 날 보건소에서 해야했다.
공항에서 소개시켜준 소독된 안심 택시를 타고 엄마가 비워 준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 후 마지막 여행가방을 현관에 들여놓고 문을 잠그자 나도 모르게 "아~하~"라는 탄성이 절도 나왔다. 긴 여정이었다. 긴장감이 확 풀리는 순간이었다. 서로 마주보는 남편과 나의 눈빛에서 광채가 나왔다. 우리는 드디어 해냈다. 우리 가족은 현관에서 욕실로 직행해 샤워를 한 후 엄마 옷을 대충 찾아 입고 일단은 가스렌지에 물을 올렸다. 짐을 풀 힘이 없었다. 배고프고 힘도 풀려 일단은 먹어야했다. 엄마가 2주간 먹을 음식을 준비해 두었다는데 찾아 볼 여유도 없이 라면 물부터 올렸다. 7년만에 라면을 먹었다. 엄마가 담가 놓은 김치를 뜨겁고 매운 라면에 올려 후후불며 흡입했다. 꿀맛이었다. 처음 듣는 이름의 그 라면은 정말 매웠다. 남편과 나의 뇌에 도파민과 엔돌핀이 급 생성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 매운 라면과 엄마 김치를 먹자 머리 속이 하얗게 되어 우리의 뉴욕 삶이 먼 과거의 한 순간처럼 느껴졌다.
코로나 검사는 다음날 보건소에서 할 수 있었다. "자가 차가 없는 경우 도보로 오라"는 담당 공무원의 지시에 따라 우리 세 명은 25분 남짓되는 거리를 걸어갔다. 화창한 날씨와 봄 햇살이 등 뒤를 따뜻하게 해주었다. 상점들은 다 열려있었고 마스크를 쓴 사람들은 그들의 일상을 담담하게 보내고 있었다. 뉴욕이 코로나에 점령당한 것에 비해 너무나 대조적인 삶의 모습이었다. 코로나 검사장은 보건소 주차장에 설치되어 있었고, 봄 햇살 내리는 아름다운 날에 콧구멍을 쑤시는 듯한 검사를 마치고 마스크와 소독제가 든 위생키트를 받았다. 결과는 하루 뒤에 나온다고 한다. 우리 가족은 건강했지만 무증상 감염자도 있다고 하니 검사 후 살짝 긴장이 됐다.
오랜만에 산책을 하는 기분으로 집에 돌아오는데 아파트 관리소에서 전화가 왔다. 자가격리 중인 우리 가족이 나가는 것을 보고 신고가 들어 왔다고. 신고는 계속 들어왔다. 우리 가족이 밖에 나갔다고. 도대체 우리가 자가격리 가족인지 주민들은 어떻게 안 것일까? 우리 등에 자가격리자라고 써있었나? 남편이 외국인이어서 코로나 바이러스로 보였나? 따뜻한 봄 햇살을 받으며 행복해했던 우리 등에 누가 비수를 꼽은거야? 라고 생각하다가 아하! 그랬구나! 그래서 우리나라 감염율이 이렇게 낮은가 보다라고 사고를 전환했다. 신고와 감시 문화에 자부심을 느끼긴 처음이다.
더욱 더 코로나 검사 결과가 기다려 졌다. 코로나 검사는 이태원 클럽 확진자 증가로 하루가 더 걸렸다. 이게 마지막 관문인데 왜 하필 이때 이태원 클럽 관련 검사자들이 늘어나서 우리를 애태우게 하는건지. 검사받은 다음 날 오후 늦게 전화벨이 울렸다. 잽싸게 낚아 챈 전화기에서 "음성"이라는 보건소 직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쳐? 저희 음성이죠?" 관리소에 가서 주민들에게 확성기로 들려주고 싶었다. 우리 가족 세명 다 음성이라구요!!
자가격리 4일째. 오늘은 아침부터 봄비가 온다. 이제는 열흘만 지나면 밖에 나갈 수 있다. 커다란 베란다 창 밖으로는 고봉산으로 이어지는 숲이 보인다. 집이 초록색으로 둘러 싸여져 있고 아침 저녁으로 새가 노래 부른다. 굳이 나가지 않아도 엄마 집에 우리 세 식구가 편안히 숨쉬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남편과 내가 행복해 해서인지 딸 미수도 더 밝아졌다. 까불까불 재잘재잘. 쉴 새 없이 얘기한다. 남편이 잠자는 미수의 볼에 "떼아모(Te amo)"라며 연거푸 뽀뽀를 해준다. 훗날 우리의 자가격리는 평화롭고 행복했다고 기억할 것이다.
2020년 5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