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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2) 스테파니 S. 리: 깊은 산속 백림사, 민화 전시회
흔들리며 피는 꽃 (47) 산사 방문
깊은 산속 백림사, 민화 전시회
코로나 팬데믹과 그간 안팎으로 일어나는 여러가지 일들을 겪으며 어디로 향해야 할 지 모를 막연한 분노로 머리와 마음이 엉켜 답답했다. 화가 나는 이유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법륜스님의 말씀으로 마음을 다스리며 몇달간 칩거하고 있던 차에 멀리 캐츠킬에 위치한 백림사로 떠날 일이 생겼다. 지난 3월 민화교실 수강생들분들과의 그룹전시를 하려다 코로나로 인해 미뤘는데, 뉴욕의 락다운 해제와 함께 다시 초대해주셔 용기를 내 나서기로 했다.
백림사는 우리 민화교실 수강생 분이 오래 다니신 사찰인데다, 그곳 주지 스님께서 서화와 다도에 조예가 아주 깊다고 들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목조한옥으로 지은 사찰이라기에 언젠가 꼭 한번 가보고 싶던 참이었다. 마침 그곳에 머물며 사찰 갤러리 전시를 맡고 계시는 천세련 관장님이 초대해주신 덕분에 민화와 전통 사찰이 아주 잘 어울릴 것 같아 기쁜 마음으로 응했다.
수년 전 한국에서 접한 민화가 좋아서 뉴욕에서도 계속 그리고 싶었는데 재료 구하기도 막막하고 배울 곳이 없어 고민했기에 민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쉽게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하자는 생각으로 민화교실을 열었다. 그렇게 모여 각자 원하는 민화 작품을 그리고 있는 우리 민화교실에서는 일년에 한번 그룹 전시를 한다. 뭐든 마감일이 있으면 동기부여가 되기도 하고, 서로 완성작을 보며 응원하고 배우는 기회가 되기에 조촐히 파티처럼 해온 것이 벌써 4번째가 되었다. 전시는 순전히 수강생분들의 자축 자리이지만 올해는 거리가 먼 사찰에서 하는 전시인데다 팬데믹까지 겹쳐 참여 못하시는 분들이 많아 전시장의 남은 벽을 채우려 내 그림도 함께 전시하게 되었다.
집 밖을 떠나 멀리 가는 것도 오랜만이고, 전부터 가보고 싶던 곳이기에 전시 설치라기보다 마치 장거리 여행을 떠나는 듯 들떴다. 다행히 뉴욕이 아직 순차적으로 오픈을 재개하는 덕에 일을 나가지 않는 남편에게 아이도 맡겨두고 혼자 드라이브하는 기회까지 획득! 혼자서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실컷 틀며 달릴 수 있겠구나 싶어 신이났다.
못오시는 분들 그림은 댁으로 들러 미리 픽업해뒀고, 다른 분들은 집으로 작품을 가져다 주셔서 그림들은 잘 준비가 되었다. 설치 도구들과 내 그림들도 전날 밤에 차 트렁크로 다 옮겨놔서 설치 당일 아침엔 일찌감치 가벼운 마음으로 출발했다.
장거리 운전이 힘들지 않냐고들 하지만 나는 운전하는 것은 얼마든지 환영이다. 가스렌지에 눌러붙은 찌든 음식때를 문지르는 일, 딱 붙어 떨어지지 않는 스티커를 불려 떼어내는 일, 바닥에 떨어진 부스러기들을 개미나오지 않게 매번 엎드려 닦아내는 일,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 하며 나오는 족족 씻어보아도 인해전술처럼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설거지와의 싸움에 비할 바가 아니다.
노동대비 효과가 미비한데다 누구도 알아주지않아 서럽고 고된 집안 일에 비하면 운전은 얼마나 쾌적하고 가성비가 높은 일인지. 가만히 앉아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고 풍경을 감상하며, 네비게이션이 불러주는대로 간간히 패달을 바꿔밟고 핸들만 요리조리 돌리다보면 땀한방울 안흘리고 그 먼 거리에 도착하게 되는데. 말하지 않아도 생각이 전달되는 텔레파시 만큼이나 효과적이지 않은가!
다행히 날씨도 좋아서 두시간 쯤 되는 길을 스테이시 켄트의 낭랑하게 속삭이는 목소리를 벗삼아 흥얼거리며 갔다. 가는동안 혼자서 와! 뭉게구름 봐, 와! 하늘 정말 이쁘다, 이런 산들이 가까이 있었네! 감탄까지해가며. 나중에 알았지만 허드슨 강 서쪽으로 뻗어있는 이 Palisade Intersate Parkway는 미 전역에서도 손꼽히는 아름다운 도로중 하나라고 한다. 과연 그러했다. 가을에는 단풍구경하러 많이들 온다고 하는데 여름에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너무나 청명한 하늘아래 흐르는 아름다운 풍광과 상반되게 간간히 동물들의 사체들이 등장해 가슴이 철렁내려앉기도 했다. 큰 사슴도 한마리 죽어있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오소리 같은 동물들도 꽤 죽어 있어서 스쳐 지나가는 동안 미안하다, 미안하다 읇조리며 지나갔다. 운전을 하면 목적지야 어디든 가는 동안에는 이렇게 죽음과 같은 큰 일도 모른척 스치며 계속 앞으로 전진할 수 있다는 점이 좋기도 한 것 같다. 무정하고 무책임 하긴해도 어쨌든 지나치지 않고 멈춰섰다한들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일들을 빨리 잊고 앞으로 나갈수 있게 도와주니까… 산 자들은 멈추지 않고 계속 삶을 살아 나가야 하는거니까…
산길 중간중간 시그널이 잡히지 않아 음악과 네비게이션이 먹통이 될 때도 있었고, 초행길이라 고속도로 엑시트를 한번 잘못 나가 조금 돌아오긴 했지만 무사히 사찰로 도착했다. 조용한 산사에 오니 가슴이 트이는 기분이다. 한국에선 흔히 보던 산을 여기선 좀처럼 보기 힘들었는데 산속에서 오랜만에 기와 지붕과 단청, 돌탑들을 보니 마치 한국에 있는 어느 사찰에 와 있는듯 정겨웠다.
오랜만에 뵈는 관장님께 빈손으로 갈수없어 한과와 꽃을 조금 사들고 갔는데 산사의 들꽃들이 참으로 아름다워 속세의 꽃이 되려 초라해 보였다. 필요한것을 여쭤보니 사과를 말씀하시기에 시장에 나가기가 멀어 사과를 못사셨나 보다 생각하고 올가닉 사과 한봉지를 덜렁 가져갔는데 나중에 들으니 한국의 사찰에서는 '육법공양(六法供養)'이라고 해서 향, 등, 차, 과일 꽃, 쌀 등을 부처님께 올린다고 한다. 과일은 그중에서 깨달음의 열매를 뜻한다고 하는데 불자가 아닌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이렇듯 속세의 꽃은 들꽃의 아름다움을 이기지 못하고, 무식하면 용감한 법이다.
구석구석 둘러보고 싶었지만 산사 감상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바로 설치부터 시작했다. 30여점 가까이 되는 그림들을 걸다보니 그림 내리고 포장 푸는걸 다 도와주셨는데도 예상보다 설치 시간이 길어져 덕원스님의 사찰음식은 구경도 못하고 못질을 계속했다. 점심도 못먹고 수고한다며 덕원스님께서 과일 스무디와 수박을 가져다 주셔서 당분충족을 하며 가까스로 차 시연시간 전까지 설치를 마쳤다. 더운 날에 마스크와 쉴드까지 쓰고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니 땀을 너무 흘려 어지러웠는데 박영묵 기타리스트의 차분하고 아름다운 연주선율과 어우러진 천세련 관장님의 차 시연으로 땀을 식히며 한 숨 돌리니 정신이 좀 돌아오는 듯 했다. 다도시간은 언제든 심신을 정화시켜주는듯해 좋지만 이번에는 풍경소리를 연상케 하는 타악기 소리와 마치 가야금같은 한국적인 기타음색이 곁들여지니 더욱 인상적이었다.
몸으로 때우는 설치도, 한숨 돌리며 차와 음악으로 힐링하는 시간도 다 좋았는데 갤러리로 다시 가 오신분들께 작품 설명을 하려고 하니 식은 땀이 났다. 요즘같이 그림을 안그리고 있는 동안에는 작가라 불리는 것 조차 부담스러운데다 사람들 앞에 나서서 설명까지 하려니 긴장이 배가 된다. 배우고 듣는것은 참 좋아하는데 말하는 것, 특히 여러 사람앞에서 말 하는 것은 왜 이렇게 싫은지 모르겠다. 말을 잘 못해 그림으로 표현한 것을 다시 말로 설명하라고 하니 당황스럽기도 하고, 어쩔 수 없이 해야해 간간히 하고는 있지만 앞에 나서서 이야기 하는 것이 나에게는 상당히 부끄럽고 괴롭다. 그래서 미래에 가장 빨리 개발 되었으면 하는 것이 텔레파시 이다. 말하지 않아도 다 이해하는 것. 조용한 가운데 서로의 진실된 마음을 그저 아는것. 참 좋을 것 같다.
민화교실도 실은 무엇을 가르친다기보다 좋아하는 그림을 함께 그리며 다같이 즐길 수 있는 공간과 재료를 제공하고, 각자가 원하는 그림을 완성할 수 있도록 보조해 준다는 개념으로 운영하고 있다. 다수 앞에 나서서 말하는 것은 싫어하지만 작은 모임에서 수다 떠는것은 좋아해 수강생분들과의 소소한 대화는 즐겁고 삶의 지혜, 육아정보등 되려 수강생분들께 내가 배우는 것이 더 많다.
여하튼 고맙게 멀리서 찾아주신 관객분들께 많은 이야기를 해드리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좋아서’,‘그냥’ 그린 그림들이라 거창한 숨은 의미라던지 굴곡진 삶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라같은 오래 설명할 이야깃거리가 내 그림에는 없다. 민화에 관한 이야기도 요즘 같은 시대에 인터넷에 정보들이 차고 넘치는데 앵무새처럼 그럴싸하게 읊는다 한들 무슨 큰 의미가 있으려나 싶고… 결정적으로 나는 앵무새보다도 말재주가 없다.
처음에는 나 역시 그림을 공부하듯했다. 하고 싶은 말이 그림보다 많아서 온갖사족을 갖다 붙여 길게 설명을 덧붙었던것 같다. 담고 싶은 것은 많은데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 요약이 덜 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던것같고, 좋아하는 민화라는 그림을 전통재료로 그리는 법을 몰랐으니 공부하고 배워야 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배접을 하고, 종이를 말리고, 아교반수를하고, 염색을 하고… 재료와 과정을 하나하나 제대로 배우려면 사실 끝이 없다. 하지만 세상에 완벽한 게 어디 있겠나 싶기도 하고 이제는 재료에 대한 두려움이 줄어 점차 나만의 방법을 찾고 있다. 어차피 내가 좋아했던것은 기술이나 기교가 아니라 민화에 담긴 긍정적이고 착한 마음이었으니까.
육아로 지치고 힘들었던 시기에 자아실현을 위해 붙잡은 그림이라 그림을 그려야 탈출구가 생기는듯 했고, 열심히 그려 무언가를 이루겠다는 생각도 초반엔 강했던 듯 하다. 점점 더 큰 그림을 그리려 했고, 전시를 많이 하려 욕심도 부렸다. 그러다보니 늘 쫒기듯 마음이 분주했고, 보관할 곳 없는 그림들이 쌓였고, 집안일도 힘에 부치고, 흰머리가 생기며 팍삭 늙어버린 기분이다. 그러다 어느 지점에서 ‘좋아서 즐겁게 시작한 그림인데 어쩌다 이렇게 된거지?’ 싶어 이제는 조급함을 내려놓고, 감당할 만큼의 그림만 그리며 지치지 않고 처음의 즐거운 마음을 찾으려 노력중이다.
세상만사 쉬운일이 어디 하나라도 있던가. 그림 그리는 것 역시 쉬운일은 아니지만 그림안에서 만큼은 최대한 모든 것을 떠나 자유로워 지고 싶다. 그림이라도 내 마음가는 대로 ‘그냥’ 그릴순 없을까. 대단한 작품이 되지 못하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한에서 재미나게 그려보고싶다. 나 아니라도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들은 차고 넘친다. 대가 들도 많고 치열하게 작품에 매진하는 수많은 전업작가분들도 셀 수없이 많이 계신다. 그러니 나 하나쯤은 그냥 가볍게 재미로 그려도 괜찮지 않을까? 그래서 내 그림을 보시는 분들도 그림을 공부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재미있게 즐겨주셨으면 하는게 나의 바램이다.
뭐, 머릿속의 생각은 이러했으나 뭐라고 말한건지 모르게 횡설수설 말들을 쏟아내 놓고 얼렁뚱땅 설명의 시간이 넘어갔다. 휴, 드디어 고대하던 저녁시간! 허기진 배를 고소한 콩국수와 쫀득한 도토리 묵으로 채우니 행복했다. 오늘 하루 무사히 도착해 무사히 다 설치할 수 있어서 정말 감사합니다! 불자도 아닌데 감사한 마음에 절로 두손이 모아졌다. 산사에서 하루 자면서 못다본 주변 산책로도 걸어보면 참 좋겠다 싶었지만 되돌아갈 길이 멀기에 어두어지기전에 사찰을 떠나왔다.
아까 조리있게 전하지 못한 말들에 대한 후회와, 그림은 나에게 자유와 기쁨과 행복이 되어야 한다는 다짐과,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 운전해 오는데 아침엔 그렇게 화창하던 하늘에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더니 폭우가 쏟아져 한치 앞이 보이질 않는다. 지난번 햄튼 갈때 처럼 빗속에서 와이퍼가 망가지면 어쩌나 걱정하며 핸들을 꽉 부여잡고 느릿느릿 운전해 겨우 20여분 정도 가다보니 거짓말처럼 비가 뚝 그쳤다. 휴 살았다. 꽉 뭉친 어깨를 풀고 안도하는데 저 멀리 쌍무지개가 떠있다.
참 드라마틱한 하루다. 화창한 하늘, 동물의 죽음, 가는길의 정취, 오는길의 폭우, 쌍 무지개, 사찰과 도시… 만 하루동안 마치 한 생을 경험한 기분이다.
어쨌든 자연과 혼자 있는 시간은 사람을 깊어지게 하고 정화시킨다. 비록 불자는 아니지만 사찰에 다녀오니 깨달음의 한자락 끝을 맛보고 온 것 같다. 속세로 다시 내려왔지만 사찰에서 얻어온 구증구포로 만드셨다는 구기자 차로 길었던 하루를 고요히 마무리 해본다.
덧,
설치하러 가는길엔 죽은 동물들만 봐서 마음이 아팠는데, 철수하러 가는 길엔 살아있는 사슴을 마주했다. 말은 많이 들었어도 차도에서 직접 큰 사슴과 마주하긴 처음이었다. 다행히 뒤따라 오는 차도 없고 한적한 도로여서 사슴이 지나갈때 까지 잠시 차를 세울 수 있었다. 철수일엔 쓸쓸하지 말라고 살아있는 사슴을 보여주시나보다 생각했다.
전시를 열고 닫는 일은 똑같이 힘들지만 설치는 설레는 마음이고, 철수는 늘 헛헛한데 이번엔 마음이 따뜻했다. 늘 따스히 맞아주시는 천관장님과 함께 주지스님이 한국에서 가져오신 햇녹차도 마시고, 덕원스님이 해주신 들깨 버섯국에 두부부침으로 허무할 틈 없이 속을 채웠다. 스님이 경상도 분이시라 그런지 간이 짭짤한게 외할머니 밥상이 생각났다. 혜성스님께서 주신 귀한 차와 덕원스님이 싸주신 들깨 버섯국, 무 김치, 배추 김치, 콩… 한보따리 가득 받아 싣고 오는길이 마치 친정에 다녀오듯 속이 든든했다.
사찰 입장에선 어떨런지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이곳이 인적이 드문 조용한 사찰이라 참 좋다. 요즈음엔 산 속에서도 고요함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곳이 별로 없는 세상이 아닌가.
Stephanie S. Lee (김소연)/화가, 큐레이터
-Ela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