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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 Muse <16> Picasso and Seven Muses <하> 

프랑소아즈, 자클린, 그리고 실베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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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rt Capa, Picasso and Françoise Gilot in Golfe Juan, France, 1948/ Sylvette David at Picasso's Studio in Vallauris, 1954/ Picasso and Jaqueline Roque, 1955

 

-피카소와 일곱 뮤즈들 <상> 페르낭드, 에바, 올가

-피카소와 일곱 뮤즈들 <중> 마리-테레즈와 도라  

-피카소와 일곱 뮤즈들 <하> 프랑소아즈, 자클린, 실베트

 

"내가 와이프를 바꿀 때마다 전 와이프는 태워야 한다. 그렇게 제거해야 한다. 

그들은 내 주변에서 존재를 복잡하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그건 나의 젊음을 되찾게해줄 것이다. 

당신은 그녀를 죽이고, 그녀가 대표하는 과거를 지워버려야 한다."

-파블로 피카소-

 

 

파블로 피카소와 일곱 뮤즈들 <하>

 

#5 '꽃의 여인'과 도예 제작: 프랑소아즈 질로(1943-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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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asso and Françoise Gilot in Antibes,1946/ Picasso, Françoise, Claude and Paloma,1953

 

파블로 피카소는 수많은 소녀와 여인들을 유혹하고, 사랑하고, 차버렸다. 프랑소아즈 질로(Françoise Gilot, 1921- )는 유일하게 피카소를 차버린 여인이었다. 

 

프랑스 북서부의 뉴이쉬르세느에서 태어난 프랑소아즈의 아버지는 농경학자이자 사업가였고, 어머니는 수채화가였다. 다섯살 때 엄마처럼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지만, 아버지는 딸을 국제변호사로 키우고 싶었다. 소르본느대 철학과와 영국 캠브릿지대 영문과를 졸업한 프랑소아즈는 파리의 브리티쉬인스티튜트(현 런던대)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어릴 적부터 엄마와 화가, 도예가들로부터 미술공부를 틈틈히 해왔던 프랑소아즈는 결국 변호사를 포기하고, 화가를 지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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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blo Picasso, Françoise, Claude and Paloma,1951/ 1954

 

프랑소아즈는 제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파리의 한 식당에서 피카소를 처음 만났다. 프랑소아즈는 21세의 미술학도, 피카소는 62세 전설을 만들고 있는 거장이었다. 이들은 서로 지성적으로 끌리며, 줄다리기를 하다가 사랑에 빠졌다. 피카소는 당시 부인 올가와 법적으로 별거 중이고, 도라 마르가 곁에 있었기 때문에 몰래 프랑소아즈를 만났다. 3년 후 프랑소아즈는 피카소의 집으로 들어가 살면서 뮤즈가 되었고, 아들 클로드(1947- )와 딸 팔로마(1949- )를 낳았다. 

 

피카소는 1946년 봄 프랑소아즈를 모델로 한 회화와 석판화 시리즈 '꽃의 여인(La femme-fleur)'을 시작했다. 당시 피카소의 라이벌이었던 앙리 마티스도 프랑소아즈에게 눈독을 들이며 초상화를 그릴 계획이 있었다. 마티스는 몸은 창백한 청색, 머리칼은 녹색이라고 컬러 의도까지 밝혔다. 피카소는 자신의 뮤즈를 쓰려는 마티스의 계획에 분개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 피카소의 초상화 시리즈에서 프랑소아즈의 녹색 머리카락은 마티스의 아이디어에서 훔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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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blo Picasso, Woman Flower, 1946/ Woman in an Armchair, 1946/ Françoise, 1946

 

도라 마르는 자신보다 14살 어린 신출내기 화가 프랑소아즈를 질투했고, 부인 올가 코클로바는 파리 한복판에서 프랑소아즈를 모욕했다. 시간이 가면서 피카소는 프랑소아즈를 때리고, 바람까지 피웠다. 프랑소아즈는 참고 참다가 1953년 피카소를 떠나게 된다. 이에 분개한 피카소는 아트딜러들에게 프랑소아즈의 그림을 사지 말라며 그녀의 미래를 방해했다.  

 

피카소는 1946년부터 프랑스 남부 도자기 마을 발로리스에서 프랑소아즈와 살면서 도예공방 마두라(Madoura)를 드나들었다. 공방 주인 수잔 라미에(Suzanne Ramié)로부터 도자기 제작법을 배워 도자기를 대거 만들게 된다. 피카소는 도자기를 캔버스처럼 다루면서 인물, 황소, 부엉이, 비둘기, 개 등을 그렸다. 자신의 애완견 럼프(Lump)를 위해 접시도 만들었다. 이후 무려 3천500여점의 도예 작품을 제작했다.

 

피카소는 훗날 마두라 공방에서 두번째 부인이 될 자클린 로크를 만나게 된다. 올 1월 런던 소더비에서는 피카소의 도예 작품을 모은 경매 'Picasso Ceramics: Colours of the Côte d’Azur'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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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man's Face(Françoise), 1953/ Pablo Picasso, White Fish, 1952/ Head Pitcher, 1953

 

1964년 프랑소아즈는 피카소와의 10년 관계를 폭로하는 회고록 '피카소와의 삶(Life with Picasso)'을 출간했다. 책은 100여만부가 팔리며 베스트셀러가 됐다. 피카소는 격분해서 소송을 제기했지만, 실패하고 만다. 그후 피카소는 자식 클로드와 팔로마를 다시는 만나지 않았으며, 유산 상속에서도 제외시켰다. 하지만, 훗날 책 수익금으로 변호사를 고용해 클로드와 팔로마가 법적인 유산 상속권을 찾을 수 있었다.   

 

'피카소와의 삶' 첫장은 1943년 5월 나치 점령하 파리, 노트르담 성당 인근의 자그마한 스페인 식당 '라 카탈랑(La Catalan)'에서 만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당시 프랑소아즈는 21세의 신인 화가로 친구 쥬느비예브와 갤러리에서 전시 중이었고, 그날 배우 알랭 퀴니와 셋이 식당에 갔다. 한편, 피카소는 옆 테이블에서 애인 도라 마르를 비롯 몇명의 일행과 식사 중이었다. 갑자기 피카소가 벌떡 일어나 그녀의 테이블로 와서 알랭에게 친구들을 소개해달라고 했다. 알랭은 "프랑소아즈는 지성적이며, 쥬느비예브는 아름답다"고 소개했다. 쥬느비예브가 "우린 화가"라고 말했고, 피카소는 파안대소하며 "오늘 하루종일 들은 말 중 제일 웃기는 소리다. 너네처럼 생긴 소녀들은 화가일 수 없어"라며, "음...나도 화가라구. 너네들 내 작업실로 와서 내 그림을 좀 봐야겠어"라며 초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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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çoise Gilot, ÉTUDE BLEUE, 1953/ INDIAN MOON, 1963

 

프랑소아즈는 화가로 활동하면서 지속적으로 글을 썼다. 1990년 '마티스와 피카소: 미술에서의 우정(Matisse and Picasso: A Friendship in Art)'을 출간했다. 피카소와 헤어진 후 1955년 화가 뤽 시몽과 결혼 후 이혼했으며, 1970년 미 소아마비 백신 선구자 조나스 솔크와 결혼했다. 1990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종도뇌르를 받았다. 

 

아들 클로드 피카소는 브루클린 출신 여성과 결혼해 뉴욕에 살면서 사진작가 리처드 아베돈의 조수로 일했다. 액터즈 스튜디오(Actors Studio)에서 영화를 전공한 후 영화감독으로도 활동했다. 딸 팔로마 피카소는 패션 & 쥬얼리 디자이너가 되었고, 티파니에서 팔리기도 했다.  

 

 

#7 피카소의 마지막 뮤즈: 자클린 로크(1953-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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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blo Picasso, Jacqueline with Crossed Hands, 1954/ Jacqueline, the Woman with Des, 1958/ Jacqueline in Turkish Costume, 1961, Woman with Yellow Hat, 1961

 

1953년 인생의 황혼기에서 피카소는 휴식같은 여인을 만나게 된다. 발로리스 마두라 도예공방의 직원 자클린 로크(Jacqueline Roque, 1927-1986)는 피카소의 두번째 부인이자, 마지막 뮤즈로 남은 20년의 삶을 피카소와 함께 보내게 된다. 자클린은 피카소를 찬미하며, 충성스러운 부인이 되었다. 피카소는 자클린을 모델로 그 어느 뮤즈보다 많은 400여점의 초상화를 제작했다.

 

자클린의 삶은 아버지에 대한 원한으로 시작됐다. 파리에서 태어난 자클린은 두살 때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다. 엄마는 5살 짜리 아들과 자클린을 먹여살리기 위해 재봉사로 일했다. 엄마는 고생만 하다가 자클린이 18살 때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 자클린은 이듬해 엔지니어와 결혼해 깔 카트린느 위탱-블레이를 낳았다. 그녀는 남편의 직장을 따라 아프리카에서 4년간 살다가 파리로 돌아온 후 이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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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blo Picasso, Visage, 1955/ Profile of Jacqueline, 1956

 

그리고, 남프랑스 리비에라의 발로리스에 정착, 사촌의 도예 공방 마두라에서 피카소를 만났다. 피카소는 6개월간 매일 자클린에게 장미를 보내고, 사랑의 시를 쓰고, 그녀의 집 담벼락에 커다란 비둘기를 그려주며 구애를 했다. 피카소는 1955년 올가가 사망하면서 자유로운 싱글이 됐다. 피카소와 자클린은 1961년 오리고기와 샴페인을 곁들여 결혼식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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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blo Picasso, Les Femmes d'Alger, 1955

 

아이디어의 고갈이었을까? 자클린이 영감이었을까? 피카소는 1950년대 중반 엘 그레코, 벨라스케즈, 고야, 들라크루아 등 올드 거장들의 걸작을 재해석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낭만주의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의 걸작 'Femmes d'Alger dans leur appartement'(1834)을 패로디한 '알제의 여인(Les Femmes d'Alger, 1955 )'의 여인은 자클린을 모델로 그린 것이다. 피카소는 "들라크루아가 이미 자클린을 만났다"고 말했다.   

 

아버지의 부재 속에서 자랐던 자클린에게 피카소는 아버지이자 연인이자 신과 같았다. 자클린은 피카소를 숭배했고, 피카소는 둘만의 사원(temple)으로 샤토를 마련하게 된다. 그가 1958년 피카소는 자신이 "우리 모두의 아버지"라 찬미했던 폴 세잔의 고향 엑상프로방스의 생 빅투아르 산이 바로 옆이었다. 근교의 중세시대 성 샤토 드 보베나르그(Château of Vauvenargues)를 사들였다. 그가 1955년 칸에 마련했던 작업실 '라 칼리포니' 근처엔 고층 아파트가 건축 중이었고, 기자들과 방문객들 때문에 작품에 집중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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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asso and Jacqueline, 1960s

 

1959년 피카소는 자신이 은행 금고에 보관했던 컬렉션(코로, 쿠르베, 르노아르, 고객, 뷜리야르, 마티스, 브라크, 미로, 모딜리아니 등)을 모두 샤토로 가져가 장식했다. 그리고, 1962년까지 작업에 몰두할 수 있었다. 피카소는 아트 딜러 샘 카츠가 성을 방문했을 때 "세잔은 이 산을 그렸고, 나는 산을 소유하고 있다"고 자랑했다. 

 

피카소는 1973년 4월 8일 칸의 무쟁에서 눈을 감았다. 그의 나이 91세였다. 자클린은 피카소를 샤토에 묻었다. 피카소가 매장된 후 자클린은 눈 쌓인 무덤 옆에서 잠을 잤다. 

 

장례식에는 피카소와 멀어졌던 자식들이 모두 거부당했다. 마야(마리-테레즈의 딸), 클로드와 팔로마(프랑소아즈의 자녀), 파블리토(올가의 손자) 모두 참석할 수 없었다. 파블리토는 3개월 후 표백제를 마시고 자살했다. 자클린은 피카소 사후 매월 8일마다 무덤에 꽃을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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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blo Picasso's Château of Vauvenargues/ Paul Cézanne, Montagne Sainte-Victoire and Château Noir, 1904-1906

 

피카소 사망 후엔 유산상속을 둘러싸고 법정 싸움이 지속됐다. 프랑스 법원은 자클린과 자식들 클로드, 팔로마, 마야, 그리고 손주 버나드, 마리나 피카소에 상속권을 주었다. 자클린은 클로드, 팔로마와 파리에 피카소 뮤지엄을 설립하는 것에 동의했다. 피카소는 생전에 "나는 세상에서 피카소의 가장 방대한 콜렉터"라고 말한 바 있다. 파리 피카소 뮤지엄(Musée National Picasso-Paris)은 1985년 피카소의 작품 5천여점을 비롯 그의 컬렉션으로 오픈했다.  

 

1986년 피카소 사망 13년 후, 자클린은 총으로 자살했다. 그녀 나이 59세였다. 자클린은 피카소 곁에 묻혔다. 샤토는 자클린의 친딸이자 피카소의 양딸 카트린느 위탱의 소유가 됐다. 

 

 

#8 미스테리 뮤즈: 실베트 다비드(1954) 

 

피카소에게는 수많은 뮤즈들이 있었다. 그중 페르낭드, 에바, 올가, 마리-테레즈, 도라, 프랑소아즈, 자클린, 이 일곱명이 대표적인 뮤즈이자 연인 혹은 부인들이었다. 2014년 미스테리 뮤즈가 베일을 드러냈다. 실베트 다비드(Sylvette David), 1954년 피카소의 뮤즈였던 여인이다. 그녀의 금발 포니테일은 초상화는 배우 브리지트 바르도로 60년간 오해되어 왔다. 사실 바르도가 다비드의 헤어스타일을 모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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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blo Picasso, Portraits of Sylvette David, 1954

 

파블로 피카소는 1953년과 1954년 금발의 포니테일 소녀를 시리즈로 그렸다. 그즈음 피카소의 연인이었던 프랑소아 지로도 자클린 로크도 아니었다. 훗날 피카소의 손자와 미술사가들은 영화배우 브리지트 바르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모델은 무명의 화가 실베트 다비드였다. 그녀의 포니테일 초상화가 퍼져 나가면서 브리지드 바르도, 카트린느 드뇌브, 제인 폰다 등 여배우들이 포니테일 스타일을 즐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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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blo Picasso, Bust of Sylvette, 1954. NYU University Village, 505 Laguardia Place. Photo: Young Hae Kang

 

1953년 프랑스 남부 칸에서 10분 거리인 발로리스(Vallauris)에 작업실을 두었던 피카소는 금발 소녀 실베트 다비드(Lydia Sylvette David/ Lydia Corbett, 1934- )를 발견했다. 피카소 나이 71세, 실베트는 18세였다.

 

실베트 다비드는 1934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샹젤리제에 갤러리 '다비드와 가르니에(David & Garnier)를 운영한 아트딜러였다. 영국 서포크의 기숙사학교 서머힐스쿨에서 수학한 다비드는 약혼자와 프랑스로 돌아갔고, 1954년 남프랑스 발로리스에서 피카소를 만난 것이다. 그리고, 실베트는 3개월간 그의 뮤즈가 됐다. 당시 피카소는 프랑소아 지로와의 10년 관계를 끝내고, 1953년 도예공방에서 만난 자클린 로크와 열애 중이었다. 실베트는 뮤즈였지만, 연인은 아니었다.

 

 

피카소는 실베트를 모델로 '포니테일의 소녀(The Girl with the Ponytail)', '열쇠를 가진 소녀(The Woman with a Key)' 'No라고 말한 소녀(The Girl Who Said No)' 등 40여점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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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lvette David and her portrait/ Picasso and Sylvette in Vallauris Studio, 1954

 

당시 머리를 뒤로 묵은 실베트의 사진은 잡지 '파리 마치(Paris Match)'에 등장했으며, 코미디 감독 자크 타티의 캐스팅콜도 받았다. 그즈음 신인 배우 브리지트 바르도의 남편이었던 로제 바딤 감독도 실베트에 주목했다. 금발의 포니테일은 1950-60년대 로제 바딤의 파트너였던 배우 카트린느 드뇌브와 부인이었던 제인 폰다도 즐기게 된다. 실베트는 당시 트렌드 세터였던 것. 

 

실베트는 1954년 칸에서 피카소와 걷던 중 브리지트 바르도, 로제 바딤 부부와 부딪혔다. 당시 갈색 머리였던 바르도는 이후 실베트의 스타일로 머리를 금발로 염색하고, 포니테일로 묶는 변신을 하게 된다. 바르도는 1956년 피카소의 작업실에도 찾아갔지만, 피카소는 바르도를 한번도 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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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asso and Brigitte Bardot in Vallauris, 1956

 

훗날 피카소의 손자 올리비에 위드마이어 피카소를 비롯 많은 사람들이 그림 속의 금발 여성이 브리지트 바르도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녀는 무명의 실베트 다비드였다. 그녀는 한번도 피카소 앞에 누드가 되지 않았지만, 피카소는 상상만으로 한점을 그렸다고 한다.

 

피카소의 작업실에서 3개월간 뮤즈가 되었던 실베트는 파리로 돌아갔고, 1963년 첫 딸을 낳았다. 아트딜러 아버지는 실베트에게 그림을 그리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실베트가 본격적으로 붓을 든 것은 45살, 세 아이를 낳고 런던 남서부의 다팅톤홀에서 살면서부터다. 실베트 다비드는 결혼 후 리디아 코르베트(Lydia Corbett)라 쓰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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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베트 다비드/ 리디아 코르베트와 그녀의 작품들.
 

 

*아티스트와 뮤즈 <8> 오귀스트 르누아르와 여인들

*아티스트와 뮤즈 <9> 구스타프 클림트와 뮤즈들

*아티스트와 뮤즈 <10> 폴 세잔과 부인 오르탕스 피케

*아티스트와 뮤즈 <11> 마크 샤갈의 등대, 뮤즈, 부인 벨라 로젠필드

*아티스트와 뮤즈 <12> 에곤 쉴레와 '비엔나의 모나리자' 발리(Wally) 

*아티스트와 뮤즈 <13> 바실리 칸딘스키와 가브리엘 뮌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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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ukie 2020.11.23 23:03
    이번 주말은 피카소의 뮤즈들(하)를 읽으면서 유익하게 보냈습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이해가 안가는데가 많아서 갸우뚱하곤 했습니다. 피카소는 뮤즈들을 사랑도 아니고, 미투도 아니고, 진실도 아니고, 어떤 마음으로 다루었는지 알수 없네요. 자기보다 훨씬 나이가 어린 여인들을 뮤즈로 택한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이 젊음이 풍기는 느낌입니다. 피카소의 그림이 보면 볼수록 이해하기가 어려워서 빠져듭니다. 컬빗에 올라온 그의 그림들을 또 볼 예정입니다.
    -Ela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