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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3) 이영주: 블루와 할머니의 어드벤처
뉴욕 촌뜨기의 일기 (54)
블루와 할머니의 어드벤처
손자 블루는 방금 8살이 되었습니다. 나도 남들처럼 우리 손자가 천재라고 자랑하고 싶은데, 딱히 내세울 게 없습니다. 블루 엄마 둘째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그냥 아이는 아이답게 키우자 싶어 특별히 학원이나 과외를 시키지 않습니다. 겨우 토요 한국학교에 보내는 게 전부입니다.
언젠가는 친구 생일파티에 가서 실내암장의 암벽 오르는 모습을 둘째가 비디오로 찍어 보내줬습니다. 그걸 본 막내가 ‘새로운 알렉스 호놀드 탄생!“, 이라며 블루에게 엄지 척! 해줬습니다. 내가 봐도 블루가 한 발 한 발 계산하며 정확한 포스트를 찝어 암벽을 오르는 모습은 다른 친구들과 달랐습니다. 무서운 집중력입니다. 뛸 때도 보면 정확한 각과 보폭으로 얼마나 아름답게 뛰는지 모릅니다. 뜀박질에서도 카리스마가 느껴진달까. 범상치 않은 아우라가 있습니다.
팬데믹 덕에 맨하튼서 몬태나로 피난온 블루와 한 집에서 여름을 난 건 전혀 기대하지않았던 선물같은 일이었습니다. (다시 뉴욕으로 돌아갔다가 지난 11월말에 다시 몬태나에 와서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만.) 한 집에 살아도 학교 줌(Zoom) 클래스가 있을 때는 아침부터 저녁 5시까지 스케줄이 빡빡해서 얼굴 보기도 힘들었습니다. 그랬던 블루가 방학이 되니 하루 종일 할머니를 찾습니다.
"할머니, 나랑 책 읽을래요?", "할머니, 나랑, 일기 써요", "할머니 나랑 인덱스 페이퍼로 보트 만들어요", "할머니 우리 풍선 불어요", "불어서 그걸로 게임해요"... 뭐든 할머니와 하자고 합니다.
블루와의 첫번째 공식 스케줄은 아침산책입니다. 엄마와 이모가 뛰러 갔다 오는 시간에 블루와 할머니인 나는 한 시간 정도 걷습니다. 트레일을 따라 1.5마일을 가면 도서관이어서 처음엔 도서관까지 걸었습니다. 0.5마일은 트레일이고, 도서관까지의 1마일은 조각공원이 조성되어 있어서 매우 정서적인 산책길입니다. 그 중간에 블루가 써클띵(Circle thing)이라고 부르는 미로찾기가 있습니다. 블루와 거기서 미로를 좇으며 성공하면 그 중심 포인트에 앉아 브릿저 마운틴을 향해 명상이나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블루가 시키는대로 게임도 하면서 놀다가 옵니다.
블루는 절대 자기가 지는 걸 용납 못합니다. 해서 게임의 룰을 저한테 유리하게 수없이 바꾸면서 언제나 저만 이기도록 만듭니다. 트레일에는 3개의 다리가 있는데, 그중 첫번째 다리가 제일 크고, 그 밑을 흐르는 냇물도 폭이 넚습니다. 무엇보다 다리 밑으로 내려가면 아일랜드가 있어서 그 아일랜드를 블루와 내가 우리들의 영지로 삼았습니다. 이름은 ‘Secret Island’로 명명했습니다. 9월에 뉴욕으로 떠나면서 블루는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 그 섬 앞에 통로를 돌로 쌓으라고 명령하고 갔는데, 돌아와서는 그 사실은 까맣게 잊었는지 언급도 하지 않아 저도 입을 다물었습니다.
트레일이 끝나면 연못이 하나 있습니다. 별로 크지 않은데 오리들이 많이 살고 있습니다. 그 연못가에선 블루가 작곡하고 우리 둘이 작사한 노래를 함께 오리들에게 불러줍니다. 걷고 나서 집에 돌아오면 카우치 양쪽에 앉아 서로 발장난을 하면서 한 시간 정도 책을 읽습니다. 그 시간이 황홀하도록 달콤합니다. 나도 2주에 한번은 뉴욕중앙일보에 칼럼을 쓰므로 글 쓰는 시간도 되도록 함께 하려고 시간을 자주 조율합니다. 이렇게 매일을 블루와 정신없이 지내다보니 그동안 즐기던 TV 드라마나 영화 볼 시간도 없습니다. 여덟 살 밖에 안 된 녀석이 이렇게 어른을 변하게 만듭니다.
칼럼을 써야 한다고 하니 블루가 자기 이야기를 쓰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제목도 정해줬습니다. 블루와 할머니의 어드벤쳐. 그렇습니다. 지금 이 소중한 하루하루는 블루와 나에게는 세상과 만나는 매일의 새로운 모험입니다. 모험 속에서 우리는 매일을 창조해 갑니다. 평생 딸들에게 끊임없이 강조했던 말도 인생은 도전이며 모험이란 말이었습니다. 블루와의 매일은 제게는 신선한 세계, 신선한 모험입니다. 시인 윌리엄 워드워즈는 시 ‘무지개’에서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말했습니다. 블루를 보면서 그의 말에 새삼 공감합니다.
이영주/수필가 강원도 철원 생. 중앙대 신문학과 졸업 후 충청일보 정치부 기자와 도서출판 학창사 대표를 지냈다. 1981년 미국으로 이주 1990년 '한국수필'을 통해 등단한 후 수필집 '엄마의 요술주머니' '이제는 우리가 엄마를 키울게' '내 인생의 삼중주'를 냈다. 줄리아드 음대 출신 클래식 앙상블 '안 트리오(Ahn Trio)'를 키워낸 장한 어머니이기도 하다. 현재 '에세이스트 미국동부지회' 회장이며 뉴욕 중앙일보에 '뉴욕의 맛과 멋' 칼럼을 연재 중이다. '허드슨 문화클럽' 대표로, 뉴저지에서 '수필교실'과 '북클럽'도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