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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병렬/은총의 교실
2021.03.25 01:20

(563) 허병렬: 심청이와 외할머니

조회 수 181 댓글 2

은총의 교실 (68) 

 

심청이와 외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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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청전, 정승희 그림, 한겨레아이들, 2007/  노인이 스승이다 왜 지금 격대교육인가, 윤용섭, 김미영, 장윤수, 정재걸, 최효찬, 장정호, 이창기 공저, 2015

 

‘심청을 미국에 초대한다. 신데렐라, 피노키오가 이 지역 어린이들의 친구인 것 처럼, 심청이도 이들의 좋은 친구가 되길 바란다. 심청의 마음은 부모를 향한 사랑이다. 이 마음은 이웃사랑, 인간사랑으로 이어지는 바탕이 된다.’ 이것은 1998년 심청 뉴욕에 오다’를 라과디아 커뮤니티 극장에서 공연할 때의 초대장에 필자가 쓴 말이다. 그 이후에도 심청을 두 차례 더 공연한 일이 있다.

 

왜인가? 지은이와 지은 시대가 미상인 이 작품의 내용은, 유교가 표방하는 효도와 불교가 표방하는 인과응보 사상이 어우러져 재미있게 전개된다. 그러나 어린이들에게 소개할 때는 하나의 재미있는 이야기면 충분하다. 교훈을 주기 위해 심청을 소개한다면 이야기는 재미를 잃게 된다. 어린이들이 제각기 느낌을 발표할 때‘나는 결코 심청이 될 수 없다’는 말도 있었다. 그 이유로 ‘우리 아버지는 장님이 아니니까…’라는 말을 듣고 모두 한바탕 웃었다.

 

혹시 심청이 외국으로 이민갔나? 얼마 전 한국내 신문 기사를 읽고, 이렇게 엉뚱한 생각을 하였다. ‘부모 10년 모시면 집값 5억까지는 상속세 100% 면제’ 바로 이 기사가 눈에 띄었던 것이다. ‘상속개시일(부모 사망일)로 부터 소급해 10년 동안 부모와 동거한 경우만 적용된다’는 설명도 뒤따른다.

 

이 기사의 인상이 옛날과 달리 요즈음은 부모와 동거하는 일이 드물다는 사실이다. 시대가 변하면서 생활 현황이 달라지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래서 부모와 동거하는 일이 드문 사정을 이해하면서도 좀 쓸쓸하였다.

 

그런데 얼마 후, 이번에는 미국 신문에서 이와 비슷한 기사를 만났다. 민주당 대선 후보의 공약이 이렇다. ‘노부모 부양자 최대 1,200달러 세금 혜택’이 타이틀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심청이 외국으로 이민간 것이 아니고, 그 정신을 세계로 발산하는 것이 아닌가. 부모를 아끼고 사랑하는 양상은, 세태의 변화에 따르지만, 그 본질은 변함이 없다.

 

국학교에서 어린이들을 만나면‘오늘은 누가 학교에 데리고 오셨어요?’하고 묻는다. 대부분의 어린이들은 부모와 함께 등교한다. 그런데 몇몇 어린이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등교한다. 특이한 것은 그 분들의 손자 손녀가 다른 학생보다 안정감이 있는 것이다. 한국말이 분명하고, 한국적인 예의를 알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큰 가족의 뜻을 알게 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빌 게이츠, 버락 오바마를 키운 건 외할머니의 무릎교육이었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 ‘조부모는 이미 한차례 부모노릇을 해본 데다 부모와 달리 한결 너그럽게 타이르는 여유를 발휘할 수 있다. 격대교육, 즉 한 세대를 건너 조부모의 교육적 역할이 새로운 주목을 받는 배경이다. ’우리는 저자 윤용섭의 이 말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자녀교육은 가족 모두의 정성을 모아야 한다. 그것도 미래를 바라보고 자녀들 자신이 그 방법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하기 때문에 쉽지 않다. 심청이 뱃사람들을 만났고, 험난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파도 속으로 몸을 던졌고, 편안하고, 호화로운 용궁생활에서도 오직 아버지를 만나려고 장님 잔치를 생각한 심청의 효심은, 새로운 지혜를 창출하였다. 우리들이 본받아야 할 일은, 목적에 따르는 놀라운 아이디어를 낼 수 있는 바탕을 기르는 일이다. 이것이 심청의 보물이다.

 

심청아, 같이 놀자. 우리 곁에서 부모사랑의 마음을 지켜주며, 그 은혜에 보답할 수 있는 새로운 지혜를 같이 연구하자. 심청의 아버지 사랑은 현세와 꿈의 세계를 넘나들었고, 시공간의 벽을 허물었다. 이는 오직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는 맑은 염원의 결정체이다. 심청아, 고국을 떠나 이민 갈 생각 아예 하지 말고, 한국을 본거지로 세계 방방곡곡에 신호를 보내라. 부모사랑은 인류사랑이고, 미래사랑이라고.

 

 

허병렬 (Grace B. Huh, 許昞烈)/뉴욕한국학교 이사장

1926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성여자사범학교 본과 졸업 후 동국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1960년 조지 피바디 티처스칼리지(테네시주)에서 학사, 1969년 뱅크스트릿 에듀케이션칼리지에서 석사학위를 받음. 서울사대부속초등학교, 이화여대 부속 초등학교 교사를 거쳐 1967년부터 뉴욕한인교회 한글학교 교사, 컬럼비아대 한국어과 강사, 퀸즈칼리지(CUNY) 한국어과 강사, 1973년부터 2009년까지 뉴욕한국학교 교장직을 맡았다. '한인교육연구' (재미한인학교협의회 발행) 편집인, 어린이 뮤지컬 '흥부와 놀부'(1981) '심청 뉴욕에 오다'(1998) '나무꾼과 선녀'(2005) 제작, 극본, 연출로 공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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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ukie 2021.03.25 22:28
    허병렬: 심청이와 외할머니-두 이름은 나를 눈물을 흘리게 합니다. 몇살 땐지는 잘 생각이 안나지만 아주 어렸을 때 심청전과 콩쥐 팥쥐를 읽고 훌적훌적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는 이 얘기들이 창작동화가 아니고 사실이라고 믿었습니다. 길 가다가 지팽이를 집고 걷고있는 눈먼 봉사를 보면 저 장님의 딸이 심청이겠구나하면서 한참을 처다보곤 했습니다. 그리고 바다 속에 용궁이 있고 용왕이 있다고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이런 어린이들의 마음을 허병렬 교장 선생님께서는 어루먼져 주셨고 사랑해주셨습나다. 자금도 병상에서 어린이들을 생각하시면서 하늘나라 동화를 구상하고 계시리라 믿어요. 선생님의 쾌유룰 빕니다.

    외할머니는 나에게는 엄마보다 더 큰 안식처였고, 포근한 품이었다. 맏이였고 동생이 넷이다 보니까 엄마 품은 동생들 차지였고 나는 밀려나 있었다. 외할머니는 이런 나를 늘 보듬어 주시고 칭찬해 주셨다. 외갓집을 문지방 드나들듯 자주 갔다 그때마다 외할머니께서는 동생들한테 치여서 제대로 먹지도 못했지 하시면서 먹을 것을 챙겨주시곤 하셨다. 그리고 꼬깃꼬깃한 지폐를 염낭 주머니에서 끄내서 손에 쥐어주시곤 했다. 나와 함께 오래 사실 줄 알았는데 칠십에 돌아가셨다. 마국에 있었기때문에 외할머니의 장례식도 못 갔고, 사러워서 며칠을 울고 또 울곤 했다.
    -Elaine-
  • agnes 2021.07.08 00:40
    선생님 안녕하세요! 기억나실지 모르시겠지만 2017년 2월 뉴욕 지하철에서 우연히 마주친 여학생입니다. 저는 당시 허병렬 선생님을 모르고 한국어 소리가 들려서 말을 걸었었는데, 나중에 한국와서 검색해보니 한국어 교육의 산 증인이셨더라구요. 저도 한국어 교육에 관심이 많아 선생님하고의 인연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때 한국화 전공하신 분과 같이 가시는 길이셨고 제 기억으로는 주변 외국인도 대화에 참여해 선생님의 스카프가 멋있다고 칭찬했었는데요, 혹시 기억나십니까? 선생님 메일 주시면 그때 같이 찍었던 사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늘 다시 뵙고 싶었는데 멋진 모습으로 뵙는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