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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dney Poitier (1927-2022) 

아카데미 최초 남우주연상 수상, 할리우드 최초 흑인 흥행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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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Sir, with love (1967) - the ending <YouTube>

 

아카데미상 최초의 흑인 남우주연상 수상자(1963)이자 주일 바하마 대사(1997-2007)를 지낸 시드니 포이티어(Sidney Poitier, 94)가 1월 6일 LA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시드니 포이티어는 1963년 '들판의 백합(Lilies of the Field)'로 연기력을 인정받아 오스카상을 수상했지만, 그는 또한 흥행 배우였다. 1967년 한국에서 스승의 날 TV로 방영되던 '언제나 마음은 태양(To Sir, With Love)' '밤의 열기 속으로(In the Heat of the Night)', 그리고 '초대받지 않은 손님(Guess Who's Coming to Dinner)'까지 무려 3편의 영화가 흥행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시드니 포이티어는 리처드 버튼, 폴 뉴만, 리 마빈, 존 웨인의 뒤를 이어 흥행 남자 배우 5위에 선정된 포이티어는 이후 흑인 배우들에게 문을 열어주게 된다. 

 

2002년 할리 베리(Halle Berry)는 '몬스터 볼(Monster's Ball)'로 흑인 여배우 사상 최초의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으며, 같은 해 덴젤 워싱턴(Denzel Washington)은 '트레이닝 데이(Training Day)'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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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들판의 백합(Lilies of the Field, 1963)

 

그는 1960년대 미국의 인권운동 시기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 말콤 X와 함께 할리우드를 대표한 흑인 배우였다. 포이티어는 1940년대 말 데뷔했지만, 오랫동안 인종차별로 인해 로맨스 영화의 주인공역을 맡지 못했다. 그는 인종차별 환자에게 시달리는 의사 역(No Way Out, 1950),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젊은 사제(Cry, the Beloved Country, 1952), 뉴욕의 교사(Blackborad Jungle, 1955), 애리조나의 핸디맨(들판의 백합)' 필라델피아 형사(밤의 열기 속으로), 런던의 교사(언제나 마음은 태양) 등에서 '초대받지 않은 손님'은 백인 약혼녀의 집에 초대받은 의사로 출연했다. 

 

"나는 내 움직임 하나하나로 1천5백18만명을 대표하는 것처럼 느꼈다."

-시드니 포이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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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 포이티어, 스펜서 트레이시, 캐서린 헵번 출연, 스탠리 크레이머 감독의 '초대받지 않은 손님(Guess Who's Coming to Dinner, 1967)'

 

시드니 포이티어의 1927년 마이애미에서 9남매중 막내로 태어났다. 바하마인 부모가 토마토를 팔기 위해 배타고 마이애미로 갔다가 출산한 것이다. 시드니는 바하마에서 자라면서 12살 때 학교를 중퇴하고 잡역부들의 물을 대령하는 일을 했다. 부모는 그가 비행소년이 될까봐 14살이 되자 결혼한 큰형이 사는 마이애미로 보냈다. 

 

1년 후엔 3달러를 갖고 뉴욕에 왔다. 도랑 인부, 부두 노동자, 가먼티스트릭트의 배달부 등으로 일하면서 유료화장실에서 잠을 잤으며, 할렘 인종폭동 때는 다리에 총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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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 스타이거와 공연한 노만 주이슨 감독작 '밤의 열기 속으로(In the Heat of the Night, 1967)'

 

1943년 나이를  속이고 군에 입대해 롱아일랜드의 의무병 부대에서 주둔했다. 2년 후 군대에서 탈출하기 위해 정신장애로 위장, 맨해튼으로 돌아왔다. 그때 신문에서 'American Negro Theatre'가 배우를 공모한다는 기사를 보고 오디션을 봤지만 떨어졌다. 대신 설겆이 담당 일자리를 얻은 후 책을 읽고, 영어로 말하는 연습을 하며 독학으로 연기를 배웠다. 마침내 극단의 연기학교에 입학했지만, 무급 수위로 일하는 조건으로 입학이 허용됐다. 

 

그후 행운이 찾아왔다. 흑인 배우 해리 벨라폰테(Harry Belafonte)가 리허설에 나타나지 않아 대타로 무대에 올랐고, 1946년 흑인배우들만 출연하는 'Lysistra'에 출연했다. 이후 할리우드에서 화려한 성공을 거두었으며, 말년엔 TV 영화에도 등장하게 된다.

 

1991년 미 흑인 대법원 판사 서굿 마샬(Thurgood Marshall)의 삶을 다룬 ABC-TV 드라마 '분리하되 평등(Separate but Equal)', 1997년엔 남아공 넬슨 만델라의 삶을 그린 '만델라와 드클럭(Mandela and de Klerk)'에 출연해 찬사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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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자유의 메달상을 받았다. Photo: White House

 

1980년 자서전 'The Life' 출간 후 회고록 'The Measure of a Man: A Spiritual Autobiography '(2000)와 'Life Beyond Measure: Letters to My Great-Granddaughter'(2008)을 출간했다. 

 

포이티어는 1981년 골든글로브 세실 B. 드밀상, 2002년 아카데미상 명예상을 수상했다. 1974년엔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으며, 2009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자유메달을 받았다. 그는 영연방 왕국 바하마와 미국 이중국적을 갖고 있어서 두 명예를 거머쥘 수 있었다. 2011년엔 링컨센터 필름소사이어티의 평생공로상인 찰리 채플린상을 수상했다. 

 

포이티어는 1950년 후아니타 하디(Juanita Hardy)와 결혼, 4녀를 낳고 업스테이트 뉴욕 웨스트체스터 카운터의 마운트 버논과 허드슨강변 스타이브샌트에서 살았다. 1959년 뮤지컬영화 '포기와 베스(Porgy & Bess)'에서 만난 배우 다이한 캐롤(Diahann Carroll) 불륜을 시작했다. 당시 캐롤은 24세에 음악 매니저 몬테 케이와 결혼한 상태였다. 이들은 1951년 폴 뉴만과 '파리 블루스(Paris Blues)'에서도 공연하며 사랑을 이어갔다. 포이티어는 맨해튼 리버사이드 드라이브에 둘만의 보금자리를 마련했지만, 부인과의 이혼을 포기하면서 캐롤과의 9년 열애를 끝냈다. 그리고, 포이티어는 1976년 캐나다 출신 배우 조안나 심쿠스(Joanna Shimkus)와 결혼해 2녀를 낳고 45년의 여생을 함께 했다.

 

2005년 포이티어와 캐롤은 아카데미 시상식에 나란히 등장하면서 우정으로 옛상처를 마무리했다. 캐롤은 2019년 사망했다. 2019년 허리케인 도리안이 바하마를 강타했을 때 포이티어의 친척 23명이 실종됐다. 딸 시드니 타밀리아 포이티어(Sydney Tamiia Poitier, 48)는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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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facebook.com/filmli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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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ukie 2022.01.10 23:09
    시드니 포이티어가 주연한 영화 '밤의 열기속에서'를 1969년도 켄터키주 루이빌(Louisville)에서 봤습니다. 흑인 관객들이 반이상이었는데 영화를 보면서 낄낄 웃고 해서 놀랐었습니다. 백인경찰이 젊은 흑인 여자를 유린하고도 아무렇지않게 근무하는 장면을 볼 때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는데 오히려 흑인 관람객들은 킬킬 웃더라고요. 그래서 그때 저는 이런 걸 느꼈습니다. 실제로는 그런 일이 없구나 영화니까 심각하게 꾸몄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그 영화에서 포이티어의 눈빛과 표정이 어찌나 인상이 깊었던지 지금도 생생하네요. 크게 교육을 받지도 않았는데 뛰어난 연기력을 보이는 것을 보면 천부적 재능이 있었구나고 새삼 생각되네요. 흑인 최초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배우로 94살까지 장수했으니 복된 삶을 살았음을 축하하고 싶습니다.
    -Ela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