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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ys of Seeing: Black and White Tea Room-Counselor

2인극 '흑백다방'에서 주목할만한 상징, 은유, 노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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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TS, '기생충', '오징어 게임', 그리고 브로드웨이 뮤지컬 'K팝'까지 한류(K-Wave)가 세계 문화계를 뒤흔들고 있는 요즈음 1980년대 대한민국 암흑기의 상흔을 반추하게 만드는 한국산 연극이 오프 브로드웨이에 상륙했다. 극단 후암(Hooam Theater)의 차현석(Cha Hyun Suk) 대표가 대본을 쓰고, 연출을 맡은 2인극 '흑백다방(Black and White Tea Room-Counselor)'이 4월 6일부터 10일까지 맨해튼 이스트빌리지의 오프브로드웨이 극장 뉴시티시어터(TNC, Theater for the New City)에서 공연됐다.

 

6일과 7일 공연엔 김명곤(Kim Myung Gon), 윤상호(Yoon Sang Ho)씨가 출연했으며 영어 자막이 제공됐다. 8-10일 공연엔 트리스탄 셰이퍼-골드만(Tristan Schaffer-Goldman)과 엠버 미첼(Amber Mitchell) 남녀 배우 캐스팅의 영어 버전으로 공연됐다. 필자는 8일 영어 버전의 공연을 보았다. 유튜브에 오리지널 캐스트(정성호, 윤상호)의 한국어 공연이 올라 있다.  

 

*문학시어터 ON LIVE-연극 <흑백다방> 

 

 

검은 커피, 흰 설탕의 조화

'흑백다방'의 난폭한 테라피 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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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istan Schaffer-Goldman in Black and white Tea Room, Theater for the New City, NYC, April 8, 2022

 

심리상담사인 중년남성(원작 정성호/ 뉴욕 영어버전 니콜라스 블랙, Nicolas Black)은 1980년대 LP 레코드가 장식된 '흑백다방'에서 책을 읽고 있다. 뒤의 탁자엔 턴테이블과 찻잔 두개, 롤링스톤스와 최성수의 레코드 등 추억 속에 박제된 80년대 앨범들이 줄지어 있고(*영어버전 공연에서 손님 수잔 화이트는 록그룹 토킹헤즈, 심플마인드, 듀란듀란, 그리고 필 콜린스를 언급한다), 유화물감과 이젤 위엔 추상화 캔버스가 보인다. 무대 왼쪽 테이블엔 커피 포트와 찻잔이 놓여 있고, 전신거울이 세워져 있다.     

 

그날은 병으로 사망한 상담사 부인의 기일인데, 손님(원작 윤상호/ 뉴욕 영어버전 수잔 화이트, Susan White)과의 첫 상담 약속이 잡혔다. 상담사는 벨 소리가 들리지 않은 고객의 전화를 받고, 위치를 알려주려 하지만 전화가 끊긴다. 얼마 후 고객이 방문한다.(도어벨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폭우를 맞고 들어선 손님은 어딘가 불안감에 휩싸여있다. 손님은 자신의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흑백다방에 왔다. 그는 상담-진단-처방이 필요한 환자다. 

 

손님에게 커피를 대접하며 상담사는 "쓴 커피와 단 설탕의 조화"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리고, 방문 전 테스트 결과가 이제까지 손님 중 최하이며, 특히 신뢰항목 점수가 낮았다고 말해준다. 이에 놀란 손님은 상담 전 신뢰가 중요하다고 열변을 토한다. 상담사는 손님에게 '마음의 상자'라는 빨간색 상자를 열어 보이며 담배, 양초, 향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말하고, 이들은 두개의 향을 피운다. 향이 타면서 신뢰가 쌓일 것인가? 상담사는 마음의 벽을 허물고 '신뢰 쌓기'를 위해 서로의 치부, 과거를 고백하자고 제안한다. 

 

상담사는 카멜리온적으로 변신하는 인물인 것처럼 보인다. 상대를 꿰뚫어보는 재능이 있던 경찰은 1980년대 대학생 고문전담이 되었다가 정권이 바뀌면서 범죄자(불법취조)로 옥살이를 한다. 감옥 안에서 매일 참회와 기도를 하다가 하나님을 믿게 됐고, 신학대를 다녔다. 종교인으로 변신해 신도 상담을 해주다가 결국 심리상담사가 됐다. 옥바라지하던 부인이 운영하던 흑백다방을 상담소로 쓰고 있다. 천직이었던 경찰직에서도 밀려났고, 올바라지했던 아내가 지병으로 사망했다. 모든 것을 잃게된 것은 자신이 예전에 지은 죄의 댓가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장기였던 사람의 마음을 꿰뚜러어보는 능력이 이제 좋은데 쓰이고 있다고 자부한다. 상담사는 적응의 달인이자, 시대와 화해한 인물이다.  

 

그러나, 정중한 상담사에게는 고문 경찰의 잔인한 피가 여전히 흐르고 있다. 손님이 과거에 자신이 취조고문했던 대학생이며, 복수하러 왔다고 생각한 상담사는 부인의 유골에 대해 격노해 살의충동에 휘말린다. 그는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처럼 이중성을 갖고 있는 캐릭터인듯 하다.   

 

 

외침과 속삭임

The Sound of Sil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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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 Myung Gon and Yoon Sang Ho in Black and White Tea Room

 

자신의 이야기를 할 시점에서 머뭇거리던 손님은 갑자기 수족관으로 갔다가 그림과 음악으로 대화를 바꾼다. 상담사는 "음악감상을 좋아하냐"고 묻고, 손님은 롤링스톤스의 '페인트 잇 블랙'(Through the Past, Darkly, 1969)과 최성수 2집 '동행'에 대해 깨알같은 정보를 쏟아낸다. 데이빗 린치 감독의 '엘리펀트 맨(Elephant Man, 1980)'에서 기형 얼굴로 서커스단을 유랑하는 존 메릭-'엘리펀트 맨'은 셰익스피어와 성경을 달달 외는 박식한 인물이다. '흑백다방'의 손님은 청각장애자이며 불안증장애자이지만, 80년대 대중음악에서는 백과사전적인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   

 

손님도 자신의 과거를 밝힌다. 그는 음악을 들을 수 없다. 20여년 전 대학생 시절 방화 혐의로 체포됐을 때 경찰이었던 상담사가 무자비한 취조와 폭행으로 결국 귀머거리가 됐다. 게다가 그 트라우마로 불안장애까지 겪고 있다. 상담사는 바로 손님의 인생을 망친 인물인 것이다. 상담사가 잊고 싶었던 과거, 손님이 결코 잊을 수 없는 과거가 폭로되며, 상담사와 손님은 가해자와 피해자임을 자각하게 된다. 

 

"왜 찾아왔느냐"고 묻는 상담사에게 손님은 백팩에서 신문 뭉치를 꺼내 준다. 신문지로 싼 칼(혹은 칼을 싼 신문지)다. 상담사는 '칼'의 위협성에 움찔하지만, 손님은 상담사의 구속에 대한 오류 투성이의 기사("기사가 아니라 소설이네")가 실린 신문에 주목하라고 한다. 우리의 고정관념은 포장지가 아니라 포장된 물건이지만, 손님은 포장지(신문)으로 상담사의 과거를 인증하면서 한국 언론의 오류를 지목한다. 또한, 칼은 1980년대의 무력정치와 경찰 폭력에 대한 은유이자 손님의 분노와 복수심, 그리고 두 캐릭터의 잔혹한 테라피 세션의 도구가 된다.

 

손님은 상담사에게 당시 자신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인생이 나락에 떨어졌다고 질책한다. 손님이 가해자인 상담사를 찾아온 것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다. 손님은 치유해달라고 애걸하고, 상담사는 자신을 죽이라고 강요한다. 상담사는 자신이 비겁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땐 세상이 그렇게 시켰어. 우리에게 명령을 내렸던 그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어."라고 소리지른다. 

 

손님은 이미 경찰에 오후 3시 예고살인 신고를 했다. 상담사는 과거로 돌아가 손님에 수갑을 채우고, 폭행하며 그의 분노를 자극한다. 릴리아나 카바니니 감독의 '비엔나 호텔의 야간 배달부(The Night Porter, 1974)'에서 비엔나 호텔의 야간직원 막스(더크 보가드 분)은 나치장교 시절 성적으로 학대했던 루치아(샬롯 램플링 분)과 재회하고, 새도마조키스틱한(sadomasochistic) 옛 열정을 다시 불태우게 된다. '흑백다방'에서 수갑을 든 상담사와 칼을 든 손님은 20년 전 심문실로 돌아가 과거를 재현한다. 새디스트와 매조키스트가 충돌하는 심리적 플래시백이다. 

 

 

죽음과 치유 사이

Kill Me! Heal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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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곤-윤상호 출연 '흑백다방' 

 

결국 손님은 백팩에서 비장의 무기였던 유골함을 내놓으며, 상담사 부인의 것이라고 폭로한다. 분노한 상담사/경찰은 손님/대학생에게 살의를 느끼고, 손님은 죽여달라고 애원한다.(Kill Me! Heal Me!) 광분했던 상담사는 살해 직전에 정신을 차린다. 에드워드 하이드가 헨리 지킬로 돌아온 것처럼. 칼은 바닥으로 버려지고, 상담사는 말한다. "다방은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는 곳이다. 다방에선 아무도 죽지 않아." 

 

경찰의 전화가 걸려오고, 상담사는 살인 신고를 수습한다. 손님은 경찰에도 "믿어주세요"고 경찰에 호소하고, 전화는 끊긴다. 다시 손님은 전화를 걸어 바디 랭기지로 경찰과 대화한다. 불통의 시대, 불신의 시대는 계속되고 있다. 

 

아내의 기일이다. 상담사는 손님의 잠바를 입고, 그의 백팩 메고 나간다. 홀로 남은 손님은 상담사의 안경을 쓰고, 재킷을 입는다. 이들은 자리도 바꾸어 앉는다. 얼마 후 상담사가 다방에 돌아와 손님과 마주 앉는다. 그는 손님에게 "유골이 진짜 아내의 것이냐, 믿어도 되냐"고 물으며, '신뢰'에 질문을 던진다. 손님은 대답 대신 마시던 커피를 상담사의 얼굴에 품어대고, 상담사는 손님의 얼굴에 커피를 끼얹는다. 향 피우는 냄새가 극장을 가득 채웠고, 설탕 탄 커피(블랙&화이트의 균형 액체)를 서로 끼얹는 것은 주술적이다. 그것은 용서와 화해의 제스추어일까?   

 

영어 버전 공연의 결말에서 수잔은 니콜라스에게 지금 나오는 노래를 크게 입 모양으로 불러달라고 요청한다. 니콜라스는 절규하듯 "그 차가운 구름이 내려오네, 내가 천국의 문을 두드리는 기분이야(That cold black cloud is comin' down/ Feels like I'm knockin' on heaven's door..."하며  밥 딜런의 "천국의 문을 두드려라(Knockin' On Heaven's Door)"를 부른다. 수잔은 그의 입 모양을 보며, "들려요, 들려요"하며 미소 짓는다. '흑백다방'에서 1시간 내내 침묵하던 음악소리가 상담사의 무반주 아카펠라(a cappella로) 이 분출하는 카타르시스다. 결국 '흑백다방'의 무자비한 테라피 세션은 둘 중 하나가 죽어야 끝나는 게임, 승자와 패자가 있는 스포츠가 아니라 지속되는 삶으로 '동행'하는 것으로 마무리짓는다.   

 

한편, 원작에선 상담사 정성호가 노고지리의 '찻잔'을 소리쳐 부른다. "너무 진하지 않은 향기를 담고/ 진한 갈색 탁자에 다소곳이/ 말을 건내기도 어색하게/ 너는 너무도 조용히 지키고 있구나/ 너를 만지면 손끝이 따뜻해/ 온몸이 너의 열기가 퍼져/ 소리없는 정이 내게로 흐른다..." 

 

차현석 원작, 연출의 '흑백다방'은 제 5공화국, 독재, 광주항쟁의 언급 없이 두 인물이 1980년대 상흔을 드러내고, 몸싸움을 하고, 치유한다. '찻잔'은 '흑백다방'의 용서와 화해 주제에 절묘한 엔딩곡이다. 하지만, 영어 공연의 피날레 '천국의 문을 두드려라'는 화해보다는 아직도 장벽과 불통과 시련이 있음을 암시하는 엔딩으로 느껴진다.  

 

 

서부영화의 공식과 '흑백다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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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6일 오프브로드웨이 뉴시티시어터에서 열린 '흑백다방' 공연 후 윤상호씨와 김명곤씨.  사진: 홍영혜 제공

 

상담사와 손님의 2인극 '흑백다방'은 할리우드 서부영화 장르의 공식을 연상시킨다. 서부극의 스토리는 황량한 서부 마을에 방랑자가 찾아와 정의에 눈뜨고 악당을 퇴치하거나, 외로운 백인 카우보이가 사악한 인디언 악당(혹은 무법자 총잡이)이 살룬에서 만나 복수의 결투를 벌인다. 서부극에선 물론 백인 주인공의 승리로 끝난다. 한편, '흑백다방'에선 부산 남포동에 자리한 80년대 인테리어의 다방에 손님이 찾아온다. 그 손님은 청각, 불안 장애자로 복수로 살인을 상상하고 있다. 

 

서부극에선 무법자가 말을 타고 모랫바람 속에서 등장하지만, 손님은 기차를 타고 부산에 와 소나기를 맞으며 다방에 찾아왔다. 상담사는 보안관 모자가 아니라 아내의 기일이므로 흰 와이셔츠에 블랙 수트를 입고 있다. 손님은 도시의 방랑자처럼 백팩에 캐주얼 룩이다. 이들은 서부극의 총 대신 칼과 수갑으로 몸싸움을 벌인다. 서부극에선 늘 악당이 죽고, 백인 보안관의 '정의'가 승리하지만, '흑백다방'에선 아무도 죽지 않는다.     

 

 

흑백다방의 상징, 은유와 노래 

 

흑백다방은 60여분간 지속되는 심리 스릴러다. 오후 2시 책을 읽던 상담사가 물고기 밥을 주면서 극은 시작한다. 윌리 데커(Willy Decker) 프로덕션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처럼 무대에 시계가 있었다면, 더 스릴감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단막극 '흑백다방'에선 따라서 물리적 시간과 심리적 시간이 일치한다. 상담사와 손님, 가해자와 피해자는 흑백다방에서 찻잔을 마주하며 서로의 난폭한 테라피 세션을 통과한다. 각자의 과거를 고백하고, 악몽을 환기시키면서 살의로 서로 죽음의 모서리까지 도달한다. 순간순간 "의지로 비롯된다'는 신뢰와 '끊임없는 확인이 필요한' 불신의 에코우가 시이소 게임을 벌인다. 상담사와 고객의 대화는 테니스 매치처럼 정중하다가 후반에는 누군가는 KO 혹은 TKO패 당해야 하는 복싱처럼 급진전한다. 

 

차현석씨의 희곡 '흑백다방'은 풍부한 상징물과 메타포가 곳곳에 깔려 있으며, 디테일로 가득하다. 1시간 남짓한 이 연극이 강렬한 것은 상담사와 손님 두 인물의 캐릭터가 생생하게 그려졌기 때문이다. 빈티지 LP, 턴테이블, 구두 한짝까지 내러티브에서 대사 한마디 낭비 없이 치밀하게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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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호, 정성호 출연 '흑백다방'

 

#물: 소나기, 수족관, 커피

손님은 가을날 소나기를 맞고 흑백다방을 방문한다. 그 빗물과 물고기들이 숨어있는 수족관의 더러운 물, 그리고 상담사와 손님이 품고, 뿌리는 커피물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비는 먼지뿐만 아니라 슬픔과 트라우마를 씻겨주며, 자연계의 순환에서 새 생명을 자라게 한다. 상담소 수족관의 물고기들은 먹이를 주지 않는 한 나오지 않는다. 고여있는 물 속에서 간신히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두 인물간의 커피 뿌리기'는 기독교에서 머리에 물을 붓는 세례(洗禮 /baptism)나 굿판에서 물 뿌리기 의식처럼 '흑백다방'의 카타르시스일 것이다. 연극에선 물이 아니라 조화의 맛, 화해의 상징인  커피인 점이 다르다. 

 

 

가루: 물고기밥, 설탕, 유골

'흑백다방'에선 가루 세가지가 등장한다. 물고기밥과 설탕과 유골이다. 물고기밥이 객석 쪽으로 보이지 않는 수족관 안의 숨어있는 물고기들을 불러내고, 살리기 위한 '삶의 가루'라면, 유골(遺骨)은 죽음의 가루다. 반면 설탕은 쓰디쓴 맛을 보완하는 삶의 감미료다. 손님이 커피잔에 설탕을 넣을 때는 부들부들 떨면서도 물고기들에게 밥을 주거나 유해를 흩뿌릴 때는 자연스럽다는 점에 주목할만 하다. 손님은 일상에서 위태로운 삶을 살고 있는 장애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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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다방' 뉴시티시어터 세트

 

음악과 미술: 80년대 팝송과 추상화

"이건 수채화인가요?" "유화입니다." 음악에 조예가 깊은 손님은 흑백다방의 그림이 수채화인지 유화인지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미술엔 무지하다. 그의 두 눈은 정상이지만,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귀는 불구가 되어 있다는 것이 비극이다. 그 참사의 원인은 상담사였다. 손님은 상담사에게 지금 흐르는 노래를 불러달라고 요청한다. 첫 요청에 상담사는 "미안하다"는 말로 거부한다. 결말에서 손님은 다시 한번 상담사에게 노래를 부탁하자 상담사는 절규하듯 노래를 외친다.

 

상담사가 환자손님들과 함께 그렸다는 덧칠의 추상화는 그림이라는 공간예술이지만, 심리치료를 위해 상담사를 찾았던 손님들이 붓질할 당시 마음이 그려서 계속 진행 중인 시간성 예술이기도 하다. 차현석 연출가는 80년대 음악이라는 시간예술/ 청각예술과 상담사와 손님들의 합작인 추상표현주의 회화라는 공간예술/ 시각예술을 '흑백다방'의 테라피 도구이자 스토리를 강화의 도구로 사용한다. LP 재킷과 추상화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두 인물의 심리 게임을 목격하는 침묵의 캐릭터들처럼 보인다. 

 

 

마음의 상자 속: 담배, 양초, 향/ 신문지와 칼

상담사가 신뢰 구축을 위해 수잔에게 '마음의 상자(box of your heart)'라며  보여주는 붉은 박스엔 담배, 양초, 향이 들어 있다. 모두 타서 재가 남는 물건들이다. 상담사는 경찰시절 그의 악행을 담배/양초/향처럼 자신의 죄도 태우며 치유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손님이 '마음의 상자'라 내미는 신문 뭉치는 사시미칼에 싸인 옛날 신문이다. 팝 음악에 대해 백과사전적인 지식을 갖고 있는 강박적 완벽주의자 손님은 상담사가 구속된 기사의 오류를 지적한다. 상담사는 과거의 오류를 태우며 속죄를 했지만, 손님에게 과거의 상처는 사시미칼처럼 날카롭게 육체와 정신을 지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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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장치: 수족관, 전화, 찻잔

도입부에서 상담사는 탁자 앞에서 책을 읽다가 일어나 '2시...물고기 밥 줄 시간'이라 혼잣말을 한 후 객석으로 다가가 수족관 물고기들에게 밥을 준다. 손님은 상담사의 삶 고백을 들은 후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는 대신 화제를 전환하며 수족관으로 다가가 "물고기가 없는 것이 아니냐"고 물어본다. 상담사는 "먹이를 주면 기어나오기도 한다"고 말해준다. 빈티지 전화는 상담사가 손님과 통화하고, 두 인물이 경찰과 통화하는 도구다. 경찰에 예고 살인사건을 신고한 손님은 경찰에게 "꼭 좀 믿어주세요"라고 절규한다. 수족관과 전화는 흑백다방의 공간을 확장하는 장치다. 또한, 찻잔은 단순히 커피를 담는 용기에서 결말에서 상담사가 손님 얼굴에 뿌리는 폭력이자 화해의 상징적 도구이기도 하다.     

 

 

사운드 디자인 Sound Design

소음과 이미지의 홍수 시대에 소극장 연극 '흑백다방'은 'Less is More'의 미학을 입증한다. 차현석 연출가는 턴테이블과 전화벨 소리를 제거하고, 수족관을 상상에 맡기면서 무대를 확장하며, 극적인 긴장감을 증폭시킴과 동시에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청각장애자 손님에게 음악은 더 이상 즐길 수 있는 예술이 아니라 상상해야하는 예술이다. 보청기를 끼고, 상대의 입모양으로 말을 이해하는 손님은 상담사에게 "지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시나요?"고 묻는다. 우리가 자각하진 못해도 지구는 여전히 돌고 있다. 

 

결말에서 손님은 상담사에게 지금 흘러나오는 노래를 입모양을 크게 해서 불러달라고 부탁한다. 한국어 원작에서 정성호는 윤상호를 위해 노고지리의 '찻잔'을, 영어버전에서 니콜라스는 절규하듯 밥 딜런의 "천국의 문을 두드려라(Knockin' On Heaven's Door)"를 부른다. 손님은 상담사의 입 모양을 주시하며 노래를 상상한다. 상담사의 노래는 청각과 불안 장애에 시달려온 손님에게 주는 마지막 처방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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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 심볼 color symbolizm

분단국 한국은 흑백논리가 지배하는 사회로 회색을 위한 여백이 없다. 흑과 백, 액체와 고체, 쓴맛과 단맛... 이분법의 흑(커피)과 백(설탕)이 용해되는 곳이 이 흑백다방이다. 이곳은 심리치료 상담소다. '흑백'과 '다방'이라는 과거와 노스탤지어를 풍기는 제목은 흑과 백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커피 속 설탕처럼 조화하는 삶, 화해하는 삶을 강조한다. 차현석씨는 찻잔이 놓인 다방이 분노와 폭력과 복수 대신 용서와 대화와 화해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제 '마음의 감옥',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야할 시간이다. 흑백다방은 고해성사(告解聖事)와 살풀이가 공존하는 공간이다. 영어 버전에서 상담사의 이름은 니콜라스 블랙, 고객의 이름은 수잔 화이트로 설정한 것도 우연은 아니다.  

 

 

역할연습 Role Play

'흑백다방'에서 드라마틱한 묘미는 반전(反轉, twist and turn)에 있다. 상담사와 손님은 심리게임에서 과거 폭로,  칼부림의 몸싸움을 하다가 역전, 서로의 옷을 바꾸어 입고, 탁자 앞에 앉는다. 뉴욕의 영어 버전 공연에서는 남녀 캐스팅으로 역할연습(role play)으로 상대의 입장이 되어보는 역지사지(易地思之) 행위는 성역할 바꾸기(gender bending)까지 동반하지만, 성적인 긴장은 없었다. '흑백다방'에서 성차별(sexism)의 언급은 없지만,  영어 공연에서 수잔이 음악을 들을 수 없는 것처럼 침묵이 부재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이를 통해 가해자가 피해자,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며, 상담사와 손님 둘다 환자이자 한 시대의 피해자라는 것을 환기시킨다. 손님은 대학생 시절 경찰이었던 상담사의 고문 취조으로 친구들의 이름을 불고, 몇 친구들은 사망했다. 상담사의 부인도 사망했다. "우리는 둘 다 환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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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다방' 뉴시티시어터 세트

 

노래: 롤링스톤스, 최성수, 노고지리, 밥 딜런

 

상담사와 손님이 대화에 등장하는 노래도 '흑백다방'의 주제에 맞게 상징적이다. 상담사가 LP 재킷을 들고 롤링스톤스(Rolling Stones)의 'Paint it Black(검은색으로 칠해버려, "I see a red door/ And I want it painted black/ No colors anymore/ I want them to turn black...")'은 TV 드라마 '머나먼 정글(Tour of Duty, 1987-90)'에 삽입된 곡이라고 설명하자, 손님은 스탠리 큐브릭(Stanley Kubrick) 감독의 영화 '풀 메탈 자켓(Full Metal Jacket, 1987)'의 엔딩 타이틀로 먼저 쓰였다"고 정정한다. 두 작품 모두 베트남 전쟁을 다룬 드라마와 영화로 컬러 블랙이 전쟁의 암흑과 죽음을 상징한다.    

 

이어 최성수의 2집 '동행'("아직도 내겐 슬픔이 우두커니 남아 있어요/ 그날을 생각하자니 어느새 흐려진 안개...")에 대해서 손님은 "조성구, 진세영 주연 '지옥의 링(1987)'에 사용된 음악이었다며 세세한 정보를 줄줄이 내뱉는다. '동행'은 손님의 깊은 슬픔을 대변하는 동시에 상담사와 화해의 노래가 된다.  

 

원작의 결말에서 커피물 세례 후 손님의 요청으로 상담사가 소리 지르며 부르는 노고지리의 '찻잔'(*산울림 김창완 작곡/"너무 진하지 않은 향기를 담고/ 진한 갈색 탁자에 다소곳이/ 말을 건내기도 어색하게/ 너는 너무도 조용히 지키고 있구나/ 너를 만지면 손끝이 따뜻해/ 온몸이 너의 열기가 퍼져/ 소리없는 정이 내게로 흐른다...")은 '흑백다방'을 용서와 화해의 공간으로 마무리한다.

 

한편, 뉴욕 공연 영어 버전에서 니콜라스는 절규하듯 "그 차가운 구름이 내려오네, 내가 천국의 문을 두드리는 기분이야(That cold black cloud is comin' down/ Feels like I'm knockin' on heaven's door..."하며  밥 딜런의 "천국의 문을 두드려라(Knockin' On Heaven's Door)"를 부른다. 이곡은 밥 딜런이 샘 페킨파(Sam Peckinpah) 감독의 서부극 '팻 가렛과 빌리 더 키드(Pat Garrett and Billy the Kid, 1973)'용으로 작곡했으며, 밥 딜런은 이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이 곡이나 영화가 1980년대의 산물이 아님이 아쉽다. 

 

사실, 밥 딜런에게도 '찻잔'풍의 노래 '커피 한잔 더 One More Cup of Coffee(1976)'가 있기는 하다. "Your breath is sweet/ Your eyes are like two jewels in the sky/ Your back is straight, your hair is smooth/ On the pillow where you lie/ I don't sense affection/ Nor no gratitude or love/ Your loyalty is not to me but to the stars above/ One more cup of coffee for the road/ One more cup of coffee before I go/ To the valley below..." 

 

'찻잔'과 '천국의 문을 드드려라'는 '흑백다방'의 피날레를 다른 느낌으로 마무리한다. '커피 한잔 더'를 쓴다면 원작의 주제에 맞는 엔딩이 되었을까? 

 

 

오리지널 공연의 엑스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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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8일 뉴시티 시어터 '흑백다방' 공연 후 차현석 희곡작가/연출가/ 극단 후암 대표.

 

뉴욕의 영어 버전 공연에서 상담사 니콜라스 역을 맡은 트리스탄 셰퍼-골드만은 전반부에서 침착한 캐릭터를 무난하게 소화했다. 하지만, 수잔이 정체를 밝힌 뒤 튀어나오는 죄책감, 분노, 살의, 악랄함과 야비함까지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같은 캐릭터의 이중성을 보여주기엔 아쉬움이 남았다. 정중했던 상담사는 손님이 과거를 폭로하면서 잠복해있던 경찰 시절의 폭력성과 잔인함이 폭발되며 사악한 본능을 드러낸다. 오리지널 캐스트 정성호씨는 이에 맞는 파워풀한 연기를 보여준다.

 

손님 역의 엠버 미첼은 먼저 체구에서 미스캐스팅이다. 20년 전 고문으로 청각을 상실하고, 정서불안에 시달려온 캐릭터로는 너무 건장하고, 당당하며 캐릭터 소화불량의 연기를 보여준다. 오리지널 캐스트 윤상호씨는 무대에서 마치 '페널티킥을 맞은 불안한 골키퍼'같다. 떨리는 손, 서성거리는 발걸음에 눈동자를 굴리고, 코를 훌쩍이는 것까지 불안감에 가득찬 강박적이며, 신경쇠약 직전의 손님으로 완벽하게 소화했다. 영어 공연은 오리지널의 두 남자가 아닌 남녀의 캐스팅인데 성적인 긴장감이 부재한 이유도 있을 것이다. 

 

'흑백다방'은 한국의 80년대 특수한 정치상황과 경어와 반말, 욕설, 속어가 적나라하게 등장하는 한국어 공연에서 뉘앙스와 묘미을 느낄 수 있다. 미국에서 백인과 흑인 배우 캐스팅으로 '흑백다방'을 공연한다면 #BlackLivesMatter 시대 원작과는 다른 인종차별(racism)의 레이어가 겹쳐진 더 극적인 드라마를 볼 수 있을 것 같다. 혹은 남녀/남남/여여 캐스팅으로 성차별(sexism)이나 #MeToo와 연관된 성폭력(동성애 포함)이나 홀로코스트/ 왕따(Bullying) 이야기로 각색될 수도 있겠다. 권력과 인권, 그리고 용서와 화해를 다룬 차현석씨의 '흑백다방'은 사무엘 베케트의 관념적인 부조리극 '고도를 기다리며(Waiting for Godot, 1953)'나 아돌 후가드(Athol Fugard)의 감옥 2인극 '아일랜드(The Island, 1972)'처럼 클래식으로 기록될 수 있는 작품으로 보인다.     

 

Sukie Park/NYCultureBe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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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yh77 2022.04.13 23:28
    뉴욕 off broadway에서 한국에서 창작한 연극을 또 영어버젼까지 볼 수 있다는 것이 감동적이네요. 여러분야에서 한류의 대세를 실감하네요. '흑백다방' 기사를 읽었는데 어쩌면 그렇게 자세히 또 깊숙히 설명을 잘해주셨는지요. 감사합니다.
  • sukie 2022.04.14 08:37
    올려주신 차현석 작 흑색다방을 읽었습니다. 읽는 동안 약간의 인내가 필요했습니다. 두 사람만 나오는 심리단막극이고 생사를 다투었던 원수끼리 마주앉아서 상담하는 설정이 복잡한 심리갈등을 보였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어려윘습니다. 특히 두 사람이 상담하면서 나타나는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은 심리극을 잘 나타냈습니다. 학창시절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면서를 읽으면서 인내를 가졌던 생각이 납니다. 심리극은 뭔지 지루할 수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흑색다방의 배경음악이 밥 딜런과 최성수씨로 나와 있어서 오래간만에 딜런과 최성수씨의 노래를 들어봤습니다. 천국의 문을 두드리며, blowing in the wind를 듣었고 최성수씨의 동행을 들었습니다. 넘 좋아요.
    감사합니다 나의 사랑 컬빗아.
    -Ela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