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를 이해하는 33가지 코드 #24 세탁의 장인들 Masters of Laundry
33 Keys to Decoding the Korean Wave #24 "한양은 거대한 세탁소"
한류를 이해하는 33가지 코드
#24 한인 이민자들이 미 세탁업을 정복한 까닭은?
*33 Keys to Decoding the Korean Wave, Hallyu! #7 Masters of Laundry <English version>
http://www.nyculturebeat.com/index.php?document_srl=4074468&mid=Zoom
박수근(1914- 1965), 빨래터(A Wash Place), 캔버스에 유채, 37cm x 72cm, 1954
왜 미국 세탁소(Dry Cleaners) 주인의 대다수는 한인들일까? 근면하고 손재주가 많은 한인 이민자들은 1970년대 후반 뉴욕, LA, 시카고 등 대도시로 이주한 후 언어장벽, 제한된 자원, 그리고 취직에 필요한 자격증과 교육이 부족해 청과물상에서 일하거나 재봉기술을 배웠다. 당시 대부분의 세탁소는 유태인과 이탈리아계 이민자들이 운영하고 있었다.
민병갑(Pyong Gap Min) 뉴욕시립대석좌교수는 1996년 출간한 '중간에 끼어서: 뉴욕과 한국의 한인사회(Caught in the Middle: Korean Communities in New York and Los Angeles)'에서 한인 식료품상들은 백인 공급업체로부터 인종차별을 피하기 위해 유태인 도매업자들에게 의존했으며, 돈을 모은 뒤엔 깨끗한(clean) 사업체인 세탁업에 종사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많은 한인들이 유태인들로부터 드라이클리너를 인수했다. 세탁소는 심플하고, 수익성이 높다. 세탁소는 청과물상회나 생선가게보다 더 큰 자본이 필요했지만, 재고 부담이 덜하고, 노동강도가 덜하며, 일요일에 휴업이 가능해 근무시간이 짧으며, 가족이 함께 운영할 수 있는 사업이라는 장점도 한인들에게 어필했다. 한인들은 봉제기술을 배운 덕에 세탁소에서 수선 서비스까지 제공할 수 있었다. 이로써 1980-90년대 한인이 운영하는 세탁업체는 2천400여개에 이르렀다. 2008년 금융위기 이전 뉴욕의 한인세탁업체의 연간 순이익은 20-30만 달러였다.
2002년 미 환경청(EPA. United States Environmental Protection Agency)의 조사에 따르면, 전국에 세탁업소가 약 3만4천여개였다. 이 시기 한인세탁인총연합회(The Federation Of Korean Cleaners Association)에서 집계한 한인 소유 세탁업소는 1만7천개에 달했다. 대뉴욕지구(뉴욕, 뉴저지, 코네티컷주)의 세탁업소 약 6천개 중 85%에 해당하는 5천개가 한인소유로 조사됐다. 뉴욕한인세탁협회(Korean-American Dry Cleaners’ Association of New York)에 따르면, 2016년 뉴욕주에 세탁업체는 3천여개이며, 그중 80%를 한국 소유로 추정했다.
미국에서 세탁업은 식료품 사업(청과/델리), 네일살롱, 뷰티 서플라이(미용재료업)과 함께 한인 이민자들의 주력 업종이다. 이 세탁업은 디지털 시대 픽업 & 딜리버리 서비스 앱에 기반한 업체들의 등장으로 경쟁이 심화된데다가 2020년 코로나 팬데믹으로 위기를 맞았다. 한인 이민자의 자녀들(1.5, 2, 3세대)들은 미국 교육을 받은 후 경제, 의료, 법률, IT, 언론계 등 다양한 분야로 진출하고 있다.
#빨래는 백의민족의 장기
김홍도, 빨래터, 보물 527호, '단원풍속도첩' 중에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Joseph de La Nézière, L'Extrême-Orient en images: Sibérie, Chine, Corée, Japon Paris, 1904/1951년 1월 8일, 전복된 러시아제 T-34 탱크 옆에서 빨래하고 있는 아낙네들. 사진: 미문서보관소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NARA
"아담과 이브는 발가벗고 살았다고 했다. 단 두 사람뿐인데 입거나 벗거나 상관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면서 아랫도리를 나뭇잎으로 가렸다고도 했다. 아마 아담과 이브가 빨래를 했다면 빨래줄에 큰 잎사귀만 걸려 있었을 것이다."
-김홍신 소설 '인간시장'(1981)-
인간이 옷을 입기 시작하면서 빨래의 역사도 시작되었다. 원시시대엔 빨래/세탁(洗濯)에 종교적인 의미가 컸지만,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기 위해서, 건강을 위해서 옷을 빨았다. 그러면서 빨래는 의식주와 결부되어 생활의 일부가 됐다. 특히 체면을 중시하는 유교문화에서 한민족, 백의민족(白衣民族)에게 깨끗한 흰옷을 입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한민족이 옷을 깨끗이 입는 풍습은 북송의 사신 서긍(徐兢)이 1123년 고려를 방문한 후 기록한 책 '고려도경(高麗圖經)' 중 제 23권 한탁(澣濯, 목욕과 세탁) 편에 나온다.
"고려의 풍속은 깨끗한 것인데, 지금도 여전하다... 중국인들의 더러운 위생상태를 비웃으며... 아침 일찍 일어나서는 반드시 목욕을 한 뒤에야 문을 나서며 여름철에는 낮에 개울물에서 거듭 목욕을 하며 남녀가 시내에서 혼욕을 했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옷을 깨끗하게 빤다"고 기록되어 있다.
개항기 외국인들은 한양을 '거대한 세탁소'로 보았다. 개화기 조선을 방문한 프랑스 화가 조셉 드 라네지에르 (Joseph de La Nézière, 1873–1944)도 빨래터 풍경에 매료되어 저서 "극동의 이미지: 시베리아, 중국, 한국, 일본(L'Extrême-Orient en images: Sibérie, Chine, Corée, Japon, 1904)"에 석판화로 남겼다.
1884년 의료 선교사로 조선에 온 호레이스 뉴턴 알렌(Horace Newton Allen, 1858-1932)은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자 연세대 의대의 전신인 제중원(현 연세 세브란스 병원)을 설립했으며, 참찬관에 임명되어 외교활동도 했던 인물이다. 알렌은 1889년 출간한 저서 'Korean Tales'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시냇물이 있는 곳 어디서나 빨래를 한다. 심지어는 우물 옆에서도, 때로는 물이 파여진 우물 안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작은 시냇물이나 샘물이 있는도시 어디서도 돌 위에서 방망이로 옷을 두드리는 여성들이 있을 것이다. 겨울엔 이 춥고 불편한 작업을 하기 위해 얼음을 깬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입는 흰옷을 위해 빨래는 가장 필요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1980년대 이후 미국으로 이민온 많은 한인들은 세탁업에 뛰어들었다. 한인 이민자들은 타고난 근면함과 성실함에 빨리빨리 정신, 그리고 뛰어난 손재주와 기술로 미국 세탁업계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뉴욕타임스와 영국의 선은 2020년 최고의 세탁기로 각각 LG와 삼성의 세탁기를 선정했다.
어떻게 우리 민족은 어떻게 세탁에 탁월한 기술을 발휘하게 됐을까?
#2020 세계 최고의 세탁기: LG & 삼성
미국에선 1851년 제임스 킹(James King)이 드럼 세탁기를 발명했다. 한국은 그로부터 100여년이 지난 1969년 금성사에서 수동식 세탁기 '백조'(WP-181)가 탄생했다. "빨래 끝, 행복 시작!" 세탁기는 여성을 가사노동에서 해방시킨 일등공신이었다. 그리고, LG전자는 가전제품의 명당이 됐다.
세탁기 또한 자동차와 스마트폰처럼 세계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고 있다.
올 3월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는 '최우수 세탁기/건조기'(The Best Washing Machines and Their Matching Dryers) 기사에서 LG의 두 모델(LG WM3900H & LG DLEX3900)을 선정했다. 뉴욕타임스는 세탁기 LG WM3900H의 장점으로 '빠른 속도, 부드러움, 효율성, 신뢰성과 얼룩 제거' 등을 꼽았다. 이와 함께 전기와 가스 옵션이 있는 건조기 LG DLEX3900를 최고로 꼽았다.
한편, 영국의 선지(The Sun)는 올 6월 '당신이 2020년 살 수 있는 세탁기 베스트 8'(The 8 best washing machines you can buy in 2020)에서 적재, 기능, 가격, 가치, 경제성, 소음 등 각 항목별로 리뷰한 후 삼성 퀵드라이브(Samsung QuickDrive Washing Machine)를 모든 부문의 최고 세탁기로 선정했다.
그 이유로 빠른 세탁시간, 낮은 비용, 세탁 중 추가할 수 있는 애드워시 도어(AddWash door), 낮은 소음 등을 꼽았다. 퀵드라이브는 2018년 영국의 전자제품 평가 전문지 '트러스티드 리뷰(Trusted Reviews)'에서도 '올해의 대형가전(Large Home Appliance of the Year)'으로 선정된 바 있다.
#백의민족의 세탁 기술
신윤복, 계변가화(溪邊街話), '혜원전신첩'(국보 135호) 중에서, 간송미술관 소장
우리 민족은 물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빨래를 한듯 싶다. 개울가에서, 우물가에서 바닷가에서, 개천에서, 계곡에서... 아낙네들이 줄지어 옷을 빨았다. 방망이로 두들겨서 때를 빼내 빤 옷은 자갈밭, 바윗돌 위에 널려 말렸다. 엄동설한에는 냇가에서 두꺼운 얼음을 깨고 빨래를 했다. 6.25 때 탱크 옆에서도 빨래를 하는 여인들이 포착됐다.
흰옷을 입고, 흰색을 숭상하고, 흰옷을 즐겨입은 한국인들은 '백의 민족'으로 불리워왔다. 한국민족문화백대과사전에 따르면, 역사학자 최남선(1890-1957)은 "조선상식문답"에서 “조선 민족이 백의를 숭상함은 아득한 옛날로부터 그러한 것으로서 수천년 전의 부여 사람과 그뒤 신라와 고려, 그리고 조선의 역대 왕조에서도 한결같이 흰옷을 입었다”고 썼다.
독일 사업가 에른스트 오페르트(Ernst Oppert, 1832-1903)는 그의 "조선기행 (A Forbidden Land: Voyages to the Corea/ Ein Verschlossenes Land: Reisen nach Korea"에서 “옷감 빛깔은 남자나 여자나 다 희다”고 저술했으며, 프랑스 기자 라울-샤를르 빌레타르 드 라게리(Raoul-Charles Villetard de Laguérie, 1858-1913)도 저서 "한국, 독립국, 러시아, 일본 (La Corée, Indépendante, Russe ou Japonaise, 1904)"에서 "천천히 그리고 육중하게 걸어가는 모든 사람들이 하얀 옷을 입고 있다”고 기록했다. 백의민족은 하늘과 땅을 숭배하는 한민족 고유의 신앙에 뿌리를 둔 것으로 해석된다. 흰색은 하늘과 땅을 의미하는 불멸의 색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백의민족인 우리의 옛 여인네들은 더러움이 쉬타는 옷을 늘 빨아야했다. 처음에는 물에 담구었다가 돌이나 방망이로 두드려 빨다가 나무나 짚을 태운 잿물을 사용해 때를 제거했다. 뽕나무, 볏짚, 기장짚, 조짚, 잡초, 들깨, 메밀, 콩가루, 녹두가루, 조두(녹두와 팥)가루, 쌀겨, 콩깍지, 쌀뜨물 등을 천연재료를 활용한 세제를 사용했다. 개화기에 '양잿물' 가성소다(NaOH, 수산화나트륨)가 들어온 후엔 보리등겨와 섞어 고체 비누를 만들어 빨래를 하기도 했다.
평북 창성 빨래터, 1912-1913.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시대 유일의 여성 실학자이자 빙허각 이씨(憑虛閣李氏, 1759-1824)가 쓴 생활백과서 '규합총서'(閨閤叢書, 1869, 순종 9년)에는 빨래 세제와 얼룩 지우는 요령이 상세히 언급됐다. 이 책에선 천연 재료 오미자, 매화열매물, 치잣물, 식초, 살구씨, 옻가루, 오매달인 물, 소금물, 소뼈를 태운 재, 복숭아잎, 은행즙, 마늘즙, 동아즙, 도라지 담근 물, 무즙, 조개껍질 가루, 생강즙, 창포뿌리가루, 토란 삶은 물, 오징어뼈가루, 백반가루, 대추 등을 세탁제로 소개했다.
빨래에 관한 속담도 많다. "빨래 이웃은 안한다." "십리 강변에 빨래질 갔는냐" "상전의 빨래에 종의 발뒤축이 희다." "눈 온 뒤에는 거지가 빨래를 한다." "밤에 빨래를 널어두면 남편이 바람난다." "덜 마른 옷을 입으면 남의 말밥에 오른다" 등 빨래가 생활의 중요한 부분이었음을 시사한다.
백의민족이라서일까? 한국인의 살균과 소독에 대한 집착은 빨래 삶기에서 나타난다. 애벌빨래도 부족해 많은 한국 여성들은 지금도 수건, 속옷, 천기저귀, 행주는 끓는 물에 삶아 세균을 박멸한다. 그 개운하고, 뽀송뽀송한 느낌을 사랑한다.
#다듬이질 문화
1910년대 여인들이 다듬이질하는 모습. Photo: Wikipedia
"다디미 다디미/ 연다디미/ 어깨너머에서 놀고/
박달 방맹은/ 팔자가 좋아서/ 큰아기 손목으로만/
뱅뱅 돌아댕기네"
-경기도 양평 민요-
"다딤잇돌에는 천불이 나고/ 우러 님 옷에는 떼물이 난데/
우러 님은 어데를 갔게/ 내 방 안에 자러올 줄 모르는고"
-아라리(일명 과부자탄가), 한국구비문학대계-
독닥독닥, 똑르락딱딱 또르락딱딱... 나 홀로 독주, 혹은 둘이서 합주. 옷감에 풀을 먹여 다듬잇돌 위에 놓고, 방망이로 박자에 맞추어 다듬는다.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다림질 방법이다.
다듬이질 방망이 소리는 이젠 사라진 '한국의 소리'다. 우리 조상에게 다듬잇 소리는 갓난아기 우는 소리, 책 읽는 소리와 함께 세 가지의 기쁜 소리(삼희성, 三喜聲)였다. 대를 이을 후손이 있고, 글을 통해 세상의 이치를 배우며 정신을 수양하며, 근면하고 안정된 살림이 주는 즐거움일 것이다.
조선후기만 해도 다듬잇돌은 생활필수품이었다. 다듬잇돌은 화강암, 대리석, 납석 혹은 박달나무나 느티나무로 만들었으며, 최상품은 강화도의 애석(쑥돌)으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종류도 소박한 민짜 다듬잇돌에서 조각 문양, 화려한 그림으로 채색된 다듬잇돌까지 다양했다. 다듬잇 방망이는 대나무, 대추나무, 박달나무 등 단단한 나무로 만들었는데, 대패와 사포질로 매끈하게 다듬어 사용했다.
다듬잇돌은 귀한 세간으로 그위에 앉는 것도 금기시됐다. 친정 아버지가 시집간 딸 집을 방문할 때 다듬잇돌을 메고가는 풍습이 있었다. 다듬이질로 시집살이의 고달픔을 해소하며 참고, 견디라는 배려였다고 한다. "다듬잇돌에 앉으면 소박맞는다" "딸이 다듬잇돌에 앉으면 시집 가서 시어머니 눈 밖에 나고, 아들이 다듬잇돌을 깔고 앉으면 장모 눈 밖에 난다" "다듬잇돌을 베고 자면 입이 비뚤어진다"는 속담은 다듬잇돌을 얼마나 소중히 했는지 시사한다.
기산 김준근, 옷감 다루기(부녀 다듬이질하고), 기산풍속도첩 중에서, 독일 함부르크민족학박물관(MARKK)
옷을 빤 후풀을 먹여 말린 후 다듬잇돌에 올려 방망이로 두드린다. 다듬이질은 빨래와 푸새(풀먹이기)로 수축된 천의 조직이 제자리를 잡으며 치밀해진다. 풀의 성분이 직물에 고르게 퍼지면서 옷감 특유의 광택이 증가하며, 촉감이 되살아나는 효과가 있다. 특히 한복은 그대로 빠는 것이 아니라 바느질한 솔기를 뜯어 빨아야 했다. 매번 새로 옷을 지어입는 셈이었다. 때문에 빨아 말려서 풀먹여 새 옷감처럼 올을 바르게하고, 손질하는 다듬이질이 발달했다. 한복의 맵시도 다듬이질로 나타난다. 빙허각 이씨의 '규합총서'에는 다듬이질법도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비단에는 대왐풀을 먹이는데, 특히 쪽빛에는 이것으로 먹여야만 빛이 난다. 진홍색은 대왐풀과 아교풀을 섞어 먹인 다음 밟아서 살이 오르고 물기가 거의 마른 뒤 홍두깨(*옷감을 감아 다듬이질하는 굵고 둥근 몽둥이)에 감아 다듬는다. 무명과 모시는 잇꽃 담갔던 진한 누런 물을 조금 넣고, 오미자물에 풀을 섞어 개어 먹여야 푸른 빛이 나지 않는데, 이때 풀을 너무 세게 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자주색은 풀을 묽게 개어 먹인 뒤 부채질을 하여 약간 마르거든 힘껏 밟아 홍두깨에 감아 밀어가며 밟아 다듬는다. 보라색은 생토란을 갈아 그 즙을 먹여 다듬고 아청색은 아교풀을 먹인다. 흰색 명주는 달걀 흰자를 녹말풀에 섞어 쓴다. 무명에는 백면가루를 섞어 먹이면 풀이 세면서도 보드랍고 윤이 나며, 모시는 활석이나 녹말을 먹여 다듬으면 윤이 난다."
-빙허각 이씨의 '규합총서'(閨閤叢書, 1869, 순종 9년)-
다듬이질은 옛날 여성들에게 고단한 노동이었다. 명주, 모시, 무명 등 직물마다 푸새(풀먹이기), 다듬질 과정과 기술이 달랐다. 명주는 여름철 올과 올 사이 구멍이 없도록 치밀하게(살이 오르게) 다듬었다. 여름 의복인 모시는 겨울에 약한 강도로 두들겨 '살이 오르지 않게; 다듬었다고 한다. 부자집에선 빨래, 푸새, 다듬이질을 할 여성을 따로 두었다고 한다.
다듬잇돌과 다듬이방망이가 음률을 맞추어 내는 소리는 타악기(percussion)을 방불케하는 우리 풍속이었다. 합성섬유가 개발되고, 직물 가공법이 발달하면서 다듬이질 방망이 소리와 다듬이질한 옷감의 아름다움은 사라지게 된다. 다듬이질 소리로 충남 논산 강경읍 황금빛 마을에선 할머니 12명이 '할머니 다듬이 연주단'을 구성해 화제가 됐다.
이웃집 다듬잇소리/ 밤이 깊으면 깊을수록 더 잦아 가네/
무던히 졸리기도 하련만/ 닭이 울어도 그대로 그치지 않네/
의좋은 동서끼리/ 오는 날의 집안일을 재미있게 이야기하며/
남편들의 겨울 옷 정성껏 짓는다며는/ 몸이 가쁜들 오죽이나 마음이 기쁘랴마는/
혹시나 어려운 살림살이/ 저 입은 옷은 해어졌거나 헐벗거나/
하기 싫은 품팔이 남의 비단 옷을/ 밤새껏 다듬지나 아니 하는가.
-양주동(1903-1977), 다듬잇소리-
#빨래와 한국문화: 회화, 무용, 뮤지컬, 영화, 시
박수근의 유화 '빨래터(A Wash Place)' 경매 신기록
박수근(1914-1965), 빨래터, 1954, 캔버스에 유채, 31cm x 14cm, 국립현대미술관
'한국의 서민화가' 미석(美石) 박수근(朴壽根, Park Soo Keun, 1914-1965).
전쟁 후 한국의 빈궁한 풍경을 소박하고, 서정적으로 묘사한 박수근 화백은 특히 빨래터의 풍경에 매료됐다. 그는 아낙네들이 옹기종기 냇가에 모여앉아 빨래하는 모습을 즐겨 그렸다고 한다. 그가 그린 '빨래터' 풍경은 회화가 3-4점, 스케치와 드로잉은 10여점이 남아 있다.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한 박수근은 그가 존경했던 프랑스 농촌화가 밀레(Jean-François Millet, 1814-1875)처럼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탐구했다. 일하는 여인, 장터의 여인, 아이 업은 소녀, 빨래하는 여인, 골목길, 판잣집, 벌거벗은 나무 풍경 등이 그가 즐겨 그렸던 소재들이다.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기법으로 그렸다. 경주 여행 중 화강암 마애불상과 석탑에서 영감을 받아 화강암 표면 같은 우툴두툴한 질감의 마티에르 기법을 개발하게 된다. 이로써 무채색톤과 거칠은 질감으로 소박하고, 친숙하며, 따뜻한 느낌, 한국 고유의 감수성을 전달한다.
1999년 서울 호암갤러리에서 '우리의 화가 박수근전'을 기획한 안소연 큐레이터는 "내용과 형식의 완벽한 균형을 이루어 현대 미술가들이 추구하는 조형성을 성취했다.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국제적인 화가"라고 평가했다.
2007년 서울옥션 경매에서 45억2천만원에 팔리며 한국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를 기록한 유화 '빨래터'(1954)는 박수근 특유의 마티에르 기법으로 화강암같은 질감 효과를 보여준다. 개인 소장자로부터 나왔던 이 '빨래터'는 경매 후 진위논란에 휩싸였다가 법원으로부터 '위작이라고 볼 수 없다'는 판결을 받았다.
박수근, 우물가, 1953
1914년 강원도 양구군에서 태어난 박수근 화백은 양구 보통학교 졸업 후 아버지가 광산사업에서 실패하는 바람에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밀레의 '만종'을 본 후 화가의 꿈을 품고,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했다. 18세인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부에서 입선한 후 1943년까지 거의 매년 응모해 낙선도 하고, 수상도 했다.
1940년 평안남도 도청 서기로 취직되어 평양으로 이주했다. 6.25 전쟁 때 남으로 피난해 전라북도 군산에서 부두 노동자로 그림을 그렸으며, 1952년엔 서울의 미군 부대에서 초상화를 그리며 번돈으로 창신동에 자그마한 판자집을 마련했다. 1953년 39세에 제 2회 대한민국 미술전에 '우물가 집'이 특선, '노상'으로 입선했다. 1956년 반도호텔(현 롯데호텔) 내 반도화랑에서 외국인들 대상으로 그림이 잘 팔렸다.
1962년 오산의 주한미공군사령부 도서관에서 박수근 개인전이 열렸다. 1963년 과음으로 신장과 간이 나빠지고, 백내장이 악화되어 왼쪽 눈을 실명했다. 1965년 5월 6일 간경화가 악화되어 별세했다. 그의 나이 51세, 마지막으로 "천당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멀어, 멀어..."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2002년 그의 고향 강원도 양구군에 박수근 미술관(Park Soo Keun Museum)이 설립됐다. http://www.parksookeun.or.kr
박수근 그림은 크리스티 경매에서 고가에 거래됐다. 2004년 크리스티 뉴욕에서 '앉아있는 아낙과 항아리'(1962)가 123만9천500달러(약 14억 6천300만 달러)에 팔리며 당시 한국 현대미술품 사상 최고 경매가를 세웠다.
남정호 안무작 '빨래(Womanhood story)' 뉴욕 공연
남정호 안무작 '빨래'(Pallae: Womanhood Story, 1994) 사진: 고흥균/국립현대무용단
2006년 새해 벽두 세계의 공연예술가들이 뉴욕에 모여 쇼케이스 공연을 선보이는 APAP(Association of Performing Arts Professionals)에 주목할만한 무용 작품이 소개됐다. 헌터칼리지의 케이플레이하우스(Kaye Playhouse)에서 남정호 한국예술종합학교(KNUA, Korean National University of the Arts)) 교수가 안무한 '빨래'(Pallae: Womanhood story, 1994)였다. 남 교수는 1993년 '우물가의 여인들'을 제목으로 초연한 후 1994년 '빨래'로 제목을 바꾸어 공연했다.
크누아 무용단이 공연한 '빨래'는 한밤중 우물가에 모인 다섯 여인이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빨래를 하고, 목욕을 하며, 빨래가 마를 때까지 놀이를 한다. '빨래'는 한국 여인네들 삶의 희로애락과 공동체 의식을 표현했다. 과거에 대한 노스탈쟈를 통해 속도전의 노예가 된 현대인들이 잃어버린 '느림'의 미학을 강조한 것처럼 보였다. 북소리 리듬과 자장가 소리를 배경으로 한 '빨래'는 노동의 신성함 여성간의 유대를 강조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때로는 신윤복의 풍속화, 때론 요하네스 베르미르 회화, 때로는 피카소의 회화 '아비뇽의 여인들'을 연상시키며 명징한 여운을 남겼다.
2022년 2월 링컨센터의 댄스 온 카메라(Dance on Camera) 영화제에서 박소현(Park Sohyun) 감독이 이 공연을 담은 다큐멘터리 "Pallae: Womanhood Story"로 상영됐다.
남정호 교수는 1952년 부산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무용과와 동 대학원 졸업 후 프랑스 렌느II 대학 예술사학과 박사과정을 마쳤다. 1980년 프랑스 시에 장-고댕(Cie Jean-Gaudin) 무용단에서 활동한 후 귀국, 경성대 무용학과 재직 시절 현대무용단 줌(Zoom)을 창단했다. 1996년부터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교수로 가르치다가 2018년 퇴임했다. 2020년 2월 국립현대무용단 예술감독으로 임명됐다.
#롱런 뮤지컬 '빨래'(Musical Pallae)
추민주 극본, 연출 뮤지컬 '빨래'
지금 한국에서 14년째 롱런되고 있는 창작 뮤지컬도 빨래에 관한 것이다. 뮤지컬 '빨래'는 2003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졸업 공연에서 연극원 연출과 추민주와 작곡과 민찬홍의 협업으로 선보였던 작품이다. 2005년 초연된 후 한국에 소극장 뮤지컬 붐을 일으킨 뮤지컬 '빨래'는 총 5천여회 공연되며 약 80여만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그리고, 일본(빠루레/パルレ, 2012)과 중국(2016)에 초청 공연됐다. (주)씨에이치 수박이 제작한 '빨래'는 코로나 팬데믹 속에서도 대학로 동양예술극장에서 공연 중이다.
'빨래'는 강원도에서 작가의 꿈을 안고 상경, 달동네 반지하방에 살며 서점에서 일하는 서나영이 빨래를 널러 옥상에 올라갔다가 몽골 출신 이주 노동자 청년 솔롱고를 만나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이 뮤지컬엔 반신불수 딸을 보살피는 집주인 할머니, 동대문 시장 상인 등 소시민들의 일상에 장애인, 비정규직, 이주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와 사회문제를 발랄하게 고발한 작품이다. 빨래는 나영과 솔롱고가 옥상에서 만나는 계기가 되며, 빨래줄에 나부끼는 기저귀는 한숨을 자아낸다. 먼지나 때를 세탁하는 빨래는 스트레스 해소의 방법이기도 하다. 빨래는 정겨운 인생살이의 모티프인듯 하다.
극본과 연출을 담당한 추민주씨는 제 11회 한국뮤지컬대상 작사/극본상을 수상했으며, 2016년엔 젊은 예술가상을 받았다.
#이해인 시 '빨래를 하십시오'
우울한 날은/ 빨래를 하십시오/ 맑은 날이/ 소리내며 튕겨울리는/ 노래를 들으면/ 마음이 밝아진답니다
애인이 그리운 날은/ 빨래를 하십시오/ 물 속에 흔들리는/ 그의 얼굴이/ 자꾸만 웃을 거예요
기도하기 힘든 날은/ 빨래를 하십시오/ 몇 차례 빨래를 헹구어내는/ 기다림의 순간을 사랑하다 보면/ 저절로 기도가 된답니다
누구를 용서하기 힘든 날은/ 빨래를 하십시오/ 비누가 부서지며 풍기는/ 향기를 맡으며/ 마음은 문득 넓어지고/ 그래서 행복할 거예요
-이해인, 빨래를 하십시오-
수도자이자 시인인 이해인 수녀도 '빨래'에 대한 시를 썼다. '빨래'와 '빨래와 하십시오'에는 빨래가 단순한 옷의 더러움을 제거하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우울즐, 그리움, 분노를 삭이고 기도와 행복으로 가는 정신적인 행위라는 것을 보여준다.
박수근 화백과 이해인 시인은 고향이 같다. 1945년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나 김천 성의여자고등학교 졸업 후 1964년 부산의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에 입회했다. 필리핀 성 루이스 대학 영문학과와 서강대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했다. 1970년 ‘소년’에 시 ‘하늘, 아침’으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민들레의 영토’ ‘사계절의 기도’ ‘여행길에서’ ‘고운 새는 어디에 숨었을까’ ‘꽃은 흩어지고 그리움은 모이고’ 등이 있다. 새싹문학상(1981), 천상병 시문학상(2007)을 수상했으며, 2012년 양구에 이해인 시 문학관이 설립됐다.
#영화 '해피 클리너스'(Happy Cleaners)
'Happy Cleaners', directed by Julian Kim and Peter S. Lee
2019년 8월 뉴욕 아시안아메리칸국제영화제(Asian American International Film Festival)의 폐막작은 한인 세탁소 가족의 이야기를 그린 '해피 클리너스(Happy Cleaners)'였다.
뉴욕의 한인 2세 줄리안 김(Julian Kim)과 피터 S. 리(Peter S. Lee)가 공동으로 연출한 '해피 클리너스'는 퀸즈의 한인타운 플러싱에서 세탁소 'Happy Cleaners'를 운영하는 최씨 가족의 이야기다. 이민 1세대인 부모(류영철/Charles Ryu와 임향화/Hyanghwa Lim)는 2세대 아들 케빈(정윤형/Yun Jeong)과 딸 현이(Yeena Sung)를 둘러싸고 생계 문제, 세대 갈등, 문화 차이와 인종차별을 겪으면서 가족간의 갈등이 폭발하게 된다.
줄리안 김과 피터 S. 리는 뉴욕컬처비트와의 인터뷰에서 세탁소 가족 영화를 만들게된 동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해피 클리너스'의 아이디어는 멀리 201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는 그때 플러싱에서의 코리안 아메리칸의 경험을 포착할 수 있는 장편 극영화를 만들고자하는 열망을 갖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를 만들었으며, 우리를 더 강하게 해주었으며, 우리가 고군분투했고, 또한 우리가 타인들과 나누고자하는 체험들에 대해 종종 이야기했다. 영화 속 대부분의 장면들이 모두 우리나 친구들이 살아오면서 겪었던 집단적인 체험에서 바탕을 두었다. 우리들의 부모님은 소규모 사업을 운영했기 때문에 부모님의 가게에 대해 친밀했다. 줄리안의 부모님은 세탁소를 하셔서 직접적으로 세탁업 운영에 대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사실 세탁업은 미국에 온 이민자 가정에서 시작하는 첫 사업으로서 다양한 소규모 사업을 상징한다."
'해피 클리너스'는 2019년 5월 LA 아시안퍼시픽 영화제(Los Angeles Asian Pacific Film Festival)와 샌프란시스코 CAAMFest(Center for Asian American Media Festival)에도 초청 상영됐다.
한인 이민자들의 꿈: 자녀들의 성공을 위하여
2020년 초부터 코로나 팬데믹으로 지구촌은 동면에 들어갔고, 세탁소도 마찬가지였다. 2021년 7월 LA타임스는 '한인 이민자들의 성공을 위한 긴 여정, 팬데믹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세탁소들(Long a path to success for Korean immigrants, dry cleaners struggle in the pandemic)'을 제목으로 한인 세탁업체의 현황을 전했다. 남부 캘리포니아의 한인 소유 세탁소는 코로나19으로 수입이 팬데믹으로 최소한 1/4이 폐업, 800-900여개 남았다.
1980년대말 남캘리포니아 세탁소의 80%를 한인이 운영했지만, 2021년 현재 60%로 감소했다. 세탁소를 운영하는 한인 이민자들은 하루 13시간 일하며, 불평하는 고객의 비위를 맞추며, 잠재적으로 위험한 화학물질을 흡입하는 고독한 투쟁이었다. 아이들은 가게에서 숙제하고, 부모를 위해 번역을 하고, 옷걸이를 분류하고, 바쁜 시간에는 빨래까지 했다고 LA타임스는 전했다.
사실 세탁업은 팬데믹 이전부터 서서히 줄고 있었다. 기업들이 재택근무를 장려하고, 사무실 복장이 캐주얼화함에 따라 세탁소의 미래가 불확실하다. 한인 이민자들에게 세탁소는 대대로 물려줄 가업이 아니라 다음 세대들에게 보다 나은 삶을 위한 길이었다. 언어장벽으로 부모 세대가 성취할 수 없었던 의학, 법조계 및 교육계의 직업을 자녀들에게 일류대 교육을 받을 수 있게하는 수단이었다. 세탁소에서 공부하던 많은 한인 2세들은 이제 의사, 변호사, 교수로 주류에 진출해 있다.
박숙희/블로거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후 한양대 대학원 연극영화과 수료. 사진, 비디오, 영화 잡지 기자, 대우비디오 카피라이터, KBS-2FM '영화음악실', MBC-TV '출발! 비디오 여행' 작가로 일한 후 1996년 뉴욕으로 이주했다. Korean Press Agency와 뉴욕중앙일보 문화 & 레저 담당 기자를 거쳐 2012년 3월부터 뉴욕컬처비트(NYCultureBeat)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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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빨래는 한류의 뜻밖의 주제인데 읽어 보니 고개가 끄덕끄덕하네요. 깨끗하게 풀매겨 지근지근 밟기도 하고 다디미로 두두렸던 시절, 그 빨래의 깨끗하고 빳빳한 촉감들이 기억의 수면으로 떠올라 그리워지네요. 다각도로 빨래의 장인을 소개해주셔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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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를 할려고 침대보며 베개닛을 화~악 걷어서 세탁기 앞에 왔습니다. 날씨가 약간 흐려서 망설이다가 그냥 했습니다. 빨래가 빨아지는 동안 컬빗을 만날려고 문을 열었습니다. 이게 왠일이지요? 오늘은 빨래 얘기가 등장했네요. 내가 빨래를 하겠다는 걸 미리 아셨나요? 이심전심이란 말이 어색해집니다. 빨래하는 여인들의 모습이 모델이 돼서 그림을 만들어 냈고, 시로 읊어서 문학을 만들어낸 빨래의 힘을 우러러봅니다. 빨래라는 일상의 소재로 좋은 글을 올려준 컬빗에 감사를 드립니다.
-Elaine- -
왜 한인 이민자들이 세탁업에 뛰어들었고, 성공했는지 오래 전부터 궁금했었는데요. 빨래에 대해 리서치를 해보니 여러모로 흥미진진했습니다. 우리 민족의 손재주와 슬기가 새록새록 느껴지네요.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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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31일자에 제 댓글이 올라와 있어서 다시 읽어봤습니다. 이런 소감을 언제 썼지? 새삼스럽다를 느꼈습니다.
중학교 시절에 총각 선생님이 계셨는 데 빨래하는 게 제일 넌더리가 난다고한 게 생각납니다. 영어 시간에 영어 선생님께 빨래가 영어로 뭐냐고 물었더니 laundry라고 해서 빨래-넌더리를 쉽게 배웠습니다. 넌더리 난다는 지긋지긋하게 싫을때 쓰는데 빨래는 이 말에 적격인가 합니다.
이조 때 신윤복의 풍속도라든가 다른 화가들의 그람을 보면 유난히 빨래하는 여인들의 그림이 많은데 여자들이 빨래를하면서 고달픈 생활에서 잠시 탈피하기위해 빨래룰 핑계삼아 쉬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빨래를 심도있게, 풍부한 자료와 그림과 사진을 곁드려서 올려주셔서 재밌게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la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