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를 이해하는 33가지 코드 #33 세종대왕과 레오나르도 다 빈치
33 Keys to Decoding the Korea Wave, Hallyu #33 King Sejong The Great Vs. Leonardo da Vinci
한류를 이해하는 33가지 코드
#33 조선 르네상스와 이탈리아 르네상스
광화문 광장의 북한산을 배경으로 앉은 세종대왕(1397-1450)동상/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 작품으로 추정되는 자화상
"삼가 생각하옵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하늘이 내리신 성인으로서 제도와 시설이 백대(百代)의 제왕보다 뛰어나시어, 정음의 제작은 전대의 것을 본받은 바도 없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졌으니, 그 지극한 이치가 있지 않은 곳이 없으므로 인간 행위의 사심(私心)으로 된 것이 아니다."
-정인지, '훈민정음' 서문, 1446-
"임금은 슬기롭고 도리에 밝으매, 마음이 밝고 뛰어나게 지혜롭고, 인자하고 효성이 지극하며, 지혜롭고 용감하게 결단하며, 합(閤)에 있을 때부터 배우기를 좋아하되 게으르지 않아, 손에서 책이 떠나지 않았다.... 인륜에 밝았고 모든 사물에 자상하니, 남쪽과 북녘이 복종하여 나라 안이 편안하여, 백성이 살아가기를 즐겨한 지 무릇 30여 년이다."
-세종실록, 1450-
"우리나라 만년의 운이 세종에게서 처음 그 기틀이 잡혔다. 백성들의 살림이 겨우 넉넉해지고, 인구 또한 많아졌다."
"세종시대 예제를 제정하고, 음악을 창작하여 문화경영이 이루어진 시대였다."
-이이(李珥, 1537-1584), 율곡전서(栗谷全書, 1814)-
세종의 친필 열성어필(列聖御筆)/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친필 Photo: Royal Collection, UK. (왼손잡이였던 레오나르도는 글을 쓸 때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알파벳의 좌우가 뒤집힌 형태로 썼다. 조르지오 바사리는 이에 대해 "거울에 비춰봐야 읽을 수 있는 글"이라고 전했다.)
"때때로 자연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아름다움, 은혜로움과 재능이 단 한사람에게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결합되어 어떤 것에 주의를 기울이든 그의 모든 행동은 너무도 신성해서 다른 모든 이들을 능가한다. 인간의 예술로 얻어진 것이 아닌 신(God)이 있는 그대로 부여한 것으로 명백하게 만든다. 이것은 모든 인류중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 나타났다. 그는 충분히 찬양받지 못했던 신체의 아름다움 외에도 모든 행동에 무한한 은혜가 있었으며, 천재성과 그 성장은 너무도 위대해서 어떤 어려움에 봉착해서도 쉽게 해결했다. 그의 내면에는 엄청난 육체적인 힘에 손재주가 항상 훌륭하며 너그러운 정신과 용기가 있었다. 그리고, 그의 명성은 너무도 높아져서 평생동안 존경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평판은 사망 후 후손들 사이에 더욱 커졌다."
"그의 두뇌에는 신의 은총이 주입되었으며, 너무도 숭고한 조화와 지성과 기억을 갖춘 표현력이 주어졌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컨셉을 제도(製圖)로 표현하는 방법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자신의 담론으로 이겼으며, 이성과 모든 용감한 재치로 논쟁을 벌였다."
킹 세종 더 그레이트 King Sejong The Great
"...5년 전 처음 서울을 방문해서 한국어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한글(Hangeul, the Korean alphabet)을 처음 알았을 때, 충격을 받았다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정말 놀라웠습니다. 한글 자체가 가진 기록체계의 우아함과 기능적인 우월함도 대단했지만, 이 모든 것이 천재적인 왕(genius king)에 의해 창제되었다는 스토리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충격적이었습니다. 게다가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이런 이야기가 전 세계에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유럽의 어떤 지도자가 백성들을 위해서 글자를 만들었다면, 전 세계는 이미 그 사실을 알았을 겁니다. 그랬다면 전 세계의 소설과 영화, TV 시리즈 등에서 유럽의 지도자 이야기가 소재가 되고 재해석되었을 겁니다. 저는 한국 외 다른 국가들에서 세종(King Sejong)과 필적할만한 상대가 있었다면 과연 누가 될 수 있을까 상상해 봤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피렌체의 통치자인 경우일까?(Leonardo de Vinci as ruler of Florence?) 아이작 뉴턴이 영국의 왕인 경우일까?(Isaac Newton as the King of England?) 비교할만한 대상 자체를 찾기가 힘듭니다..."
-조 메노스키(Joe Menosky), '킹 세종 더 그레이트(KING SEJONG THE GREAT)' Prologue-
미 공상과학 TV 시리즈 '스타 트렉: 다음 세대(Star Trek: The Next Generation)'의 작가 조 메노스키(Joe Menosky)는 2020년 10월 한국어판와 영문판으로 출간한 추리소설 '킹 세종 더 그레이트(KING SEJONG THE GREAT)'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한국인들에게는 매일 사용하는 한글로, 안방극장의 드라마로, 영화로, 광화문 네거리의 동상으로 그리고 1만원권의 지폐로 일상에서 너무도 친숙한 조선의 임금, 세종대왕. 조 메노스키는 세종대왕을 '에이브라함 링컨과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조합으로, 역사 속에서 비교할 대상조차 없는 천재 중의 천재로 보았다. 세종대왕은 그에게 창작의 영감을 주었고, 그는 데뷔 소설에 자신의 영웅을 등장시켰다. 훈민정음 해례의 사본이 실크로드를 통해 서구로 운반되어 교회나 도서관 어딘가에 보관되어 있는 '잃어버린 보물'이라는 설정으로 조선, 일본, 명나라, 몽골의 다툼이 벌어지는 역사 추리소설이다.
세종대왕과 레오나르도 다 빈치: 발명의 천재들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간략한 글쓰기 체계다. 자음 모음을 조합하면 어떤 언어와 음성이라도 표기할 수 있다. 세종대왕은 그 깊이와 다양한 재능에서 한국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다."
-펄 벅(Pearl S. Buck, 1892-1973), 1938 노벨문학상 수상 소설가-
허진호 감독의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Forbidden Dream, 2019)에서 세종대왕(한석규 분)이 장영실(최민식 분)에게 물시계 원리를 묻고 있다.
C4 J0 K21 O19
1983년 일본의 이토 준타로(伊東俊太郞) 등이 세계의 과학적 성과물을 연대별로 조사한 '과학사기술사사전(科學史技術史事典)'을 출간했다. 이 사전에선 세종대왕 재위 기간인 1418년부터 1450년 사이 전세계의 획기적인 과학기술업적을 조사한 결과를 'C4 J0 K21 O19'로 표시했다. 중국(China, 명나라) 4개, 일본(Japan, 무로마치 막부) 0개, 조선(Korea) 21개, 유럽과 중동 등 다른 나라(Others) 19개다. 세종시대의 과학기술 성과는 아시아 최고일뿐만 아니라 세계 최고였던 것이다.
이 책에 수록된 세종대왕 시대 과학적 성과는 석빙고, 금속활자(경자자), 세종실록지리지, 경상도지리지, 농사직설, 신찬팔도지리지, 향약채취월령, 향약집성방, 경복궁 천문대 대간의대 준공, 자격루, 금속활자 갑인자 주조, 오목 해시계 양부일구 제작, 측우기 발명, 수표(수위계측기) 발명, 칠정산 내외편 편찬, 훈민정음 창제, 철제 화포 주조 성공, 의방유휘(의학백과사전) 365권 편집, 제가역상집(천문관계 문헌연구서), 총통등록(화양병기 연구서) 등 21개다.
세종대왕 시대 장영실의 발명품. 이미지: 세종기념관
세종대왕(Sejong the Great, 1397-1450, 52세), 본명 이도(李祹)는 고구려 때 대륙으로 영토를 넓힌 고구려 광개토대왕(Gwanggaeto the Great, 347-412)과 함께 '대왕(The Great)'으로 불리운다. 이도는 1397년 4월 10일 태종 이방원과 왕비 원경왕후 민씨와 사이에 세째 아들로 궁궐이 아닌 한성부 준수방 장의동 본궁(현 종로구 창성동)에서 태어났다. 1965년 그의 탄생일 (음력)을 양력(5월 15일)으로 환산해 '스승의 날'이 되었다.
1418년 22세에 왕위에 오른 세종은 독서광이자 발명가였다. 그는 신분과 무관하게 인재를 등용했다. 관노 출신 장영실을 발탁, 명나라로 유학보내 선진기술을 배워오게 했고, 조선의 싱크탱크(think tank)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해 신숙주, 성삼문, 정인지, 정창손, 박팽년, 강희안, 이개, 하위지, 최항, 양성지, 서거정, 노사신 등 학자를 지원했다.
일월오봉도와 '용비어천가'를 배경으로 세종대왕의 어진(앞면)과 천문시계 혼천의(渾天儀)와 천상열차분야지도(별자리)가 담긴 1만원권 지폐
백성을 긍휼히 여기며, 사람들 사이의 소통과 교육, 및 기록을 위해 창제한 한글은 세종대왕의 통치철학이 발현된 결정체다. 세종은 언어학을 비롯, 문학, 역사, 지리, 정치, 경제, 천문, 예의, 종교, 군사, 농사, 의약, 음악 등까지 다방면에서 혁신을 이룬 당대의 천재였다.
측우기(강우량 측정기), 혼천의(천문관측기구), 자격루(물시계), 풍기대(풍량, 풍속 측정), 혼상(천문기기), 수표(하천수위 측정기), 병진자(납활자), 간의/규표(천문관측기), 천평일구/현주일구/정남일구/앙부일구(해시계), 일성정시의(해시계+별시계), 관천대(천문관측대) 등 과학기기와 신기전(화약통 달린 화살) 등 군사병기 등이 세종대왕 시대에 발명됐다. 세종대왕 재위(1418-1450) 31년 7개월의 역사를 실은 '세종실록(世宗實錄)'에 그의 치적이 기록되어 있다.
스위스에서 발행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 테스트 지폐 Banknote Switzerland 2000 Le Mont, Test Note-De la Rue Giori-Leonard da Vinci , 2000
한편,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 67세)는 세종대왕이 서거한 지 2년 후인 1452년 4월 15일 피렌체 공화국의 빈치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외톨이였던 레오나르도는 자연을 벗삼고, 관찰하며, 지적인 호기심으로 지식을 섭렵했다. 레오나르도는 14살 때 피렌체의 조각가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Andrea del Verrocchio)의 견습생으로 들어가 목수일, 금속기술, 가죽공예 및 회화와 조각을 두루 배웠다. 왼손잡이, 동성애자이자 채식주의자였던 다빈치는 자신을 예술가라기보다 과학자로 간주했다.
Leonardo da Vinci, Drawings of Water Lifting Devices from The Codex Leicester
그는 화가이자 조각가이며, 발명가, 건축가, 과학자, 음악가, 공학자, 문학가, 해부학자, 천문학자, 식물학자, 역사가, 지리학자, 수학자, 도시계획가, 지도제작자, 기술자, 집필가, 요리사이자 와인메이커로 살았다. 세기의 걸작 '모나리자'와 '최후의 만찬' 외에도 다빈치는 발명가로 수백년을 앞서갔다. 비행기, 헬리콥터, 낙하산, 자동차, 탱크, 잠수함, 도르레, 크레인, 선풍기, 악기, 시계, 향수와 콘택트 렌즈 등이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이탈리아 화가 겸 비평가인 조르지오 바사리의 '미술가 열전(Le vite de' più eccellenti pittori, scultori e architettori, 1550)'에 따르면, 레오나르도는 청년 시절 피사(Pisa)에서 피렌체(Florence)까지 아르노강을 운하로 만드는 계획을 제안했으며, 수력(水力)으로 움직이는 제분소, 축융기(縮絨機, 모직물 가공기), 엔진을 설계했다. 또한, 지렛대, 윈치, 나사, 펌프를 사용해 로 무거운 것을 들어 올리며, 항구를 비우고, 물을 제거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레오나르도는 너무도 변덕이 심해서 자연물을 철학화하는가 하면, 허브의 성질을 탐구하고, 하늘의 움직임, 달과 태양의 움직임을 관찰했다고 적었다.
세종의 치적이 기록된 '세종실록(世宗實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친필 노트북 '코덱스 레스터(The Codex Leicester)'
1994년 빌 게이츠가 3천80만 달러에 구입한 레오나르도의 친필 노트북 '코덱스 레스터(The Codex Leicester, 1510)'에서 레오나르도는 물에 관해서만 730가지 결론을 내렸다. 그는 물의 순환, 유속이 압력에 미치는 영향을 통해 홍수 관리 및 관개용 수로와 저수지 설계 등 현대 수공학 및 과학에 공헌했다. 화석에 관한 설명은 초기고생물학에 영향을 주었다. 이 노트북엔 악기, 유압펌프, 모르타르 셸, 증기 기관포 등 수많은 발명품이 포함되어 있다. 다빈치의 발명품은 100여개 이상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음악가로서 세종과 레오나르도
"종묘, 조회, 공연에 쓰이는 음악은 전조(前朝)의 여러가지 음악을 주워 모은 까닭으로 대단히 미비하니 이제 새로 여러 음악을 정하고 옛 음악 중 에서 쓸 만한 것을 가감하여 정한다."
-세종실록-
'세종실록악보' 권140의 치화평보(致和平譜)
세종대왕은 작사가이자 작곡가이며, 악기 발명가이기도 했다. 역사상 작곡가였던 군주로는 독일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Frederick the Great, 1712-1786)과 오스만 제국의 셀림 3세(Selim III, 1761-1808)가 꼽힌다. 세종은 조선의 기강을 확립하고, 이상적인 국가를 건설하는데 음악을 도구로 사용하고자 했다. 그는 고유의 악보를 만들고, 조선 실정에 맞게 악기를 재정비하고, 작사/작곡가로서 음악을 만들었다. 세종대왕 재임기에 이루어진 음악적 업적이 넘쳐났기 때문에 '세종실록'(총 163권)에 담을 수 없어서 별도로 첨부 '세조실록악보(世宗實錄樂譜, 136-147권)' 12권을 첨부했다.
세종은 궁중의식음악이 중국 송나라 음악인 아악(雅樂)에 편중된 반면, 백성들은 우리음악 향악(鄕樂)을 즐기고 있는 것에 고민했다. 살아서는 향악을 듣고, 죽은 뒤엔 아악을 연주하는 것의 모순을 간파한 것이다. 이에 고구려의 왕산악(王山岳, 거문고), 신라의 우륵(于勒, 가야금)과 함께 3대 악성(樂聖)으로 불리우는 난계 박연(朴堧)을 악학별좌(樂學別坐)로 임명, 궁중음악을 전폭적으로 개혁했다.
뛰어난 절대음감을 가졌던 세종은 박연과 쇠나 흙 대신 남양의 경석(소리나는 돌)으로 맑은 음을 내는 편경(編磬)을 제작했다. 이외에도 석경, 영고, 편종 등 다양한 악기를 조선에 맞게 개조했다. 세종은 편경을 처음 시연할 때 음이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는데, 악공들이 조사한 결과 경석의 먹줄로 표시한 부분이 덜 깎았기 때문이었다. 이에 바로 잡을 수 있었다는 일화가 세종실록에 전해진다.
"임금은 음률(音律)에 밝으시어 신악(新樂)의 장단과 음의 높고 낮음은 모두 임금이 몸소 만드셨는데, 막대로 박자를 짚어 땅을 치는 것으로 장단을 삼고 하루저녁에 제정하였다."
-세종실록-
편경, 난계국악박물관 소장품, 충북 영동-
세종은 12율관(국악에서 사용하는 음을 내는 대나무 원통, pitch pipe)의 기본이 되는 황종율관(黃鍾律管)을 제정하고 우물 정(井)자 모양의 한 칸을 한 박으로 음의 길이를 표시한 '정간보(井間譜, 세종악보)'를 직접 창안했다. 정간보는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칸을 나누어 음의 길이(리듬)을 기록한 것이다. 이는 동양 최초의 유량악보로 오늘날까지 국악의 기보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1443년 훈민정음을 창제한 후 세종은 이를 시험하기위해 권제, 정인지, 안지 등에게 선조(목조·익조·도조·환조·태조·태종)의 행적을 찬양한 악장(樂章, 조선시대 궁중의 공식 행사인 종묘사직의 제사나 연회에 사용한 음악) 서사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Songs of Flying Dragons, 보물 1463호)'를 간행했다. 그리고, 용비어천가 가사에 선율을 얹은 '여민락(與民樂)'도 작곡했다. 왕비 소헌왕후 심씨가 사망하자 아들 수양대군(세조)에게 명하여 '석보상절(Episodes from the Life of Buddha)'을 한글로 편찬하도록 했다. 세종은 1447년 '석보상절'을 읽은 후, 한글로 찬불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Songs of the Moon Shining on a Thousand Rivers, 국보 제 320호)'을 지었다.
2008 유네스코 세계 무형문화유산에 지정된 ‘종묘제례악’
새로운 궁중 졔례음악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 The Royal Ancestral Ritual in the Jongmyo Shrine and its Music)의 완성도 세종과 박연의 합작이었다. 종묘제례악은 조선왕조 역대 임금과 왕후가 모셔진 종묘에서 올리는 제사 때 행해지는 기악, 노래, 무용 등의 토탈 퍼포먼스다. 세종은 1449년 종묘제례악을 위해 '보태평(保太平, 선왕의 문덕 칭송, 11곡)'과 '정대업(定大業, 선왕의 무공 칭송, 15곡)'과 발상(發祥), 창수곡(創守曲), 경근곡(敬勤曲), 봉래의(鳳來儀)를 작곡했다.
종묘제례악은 박, 편종, 편경, 방향, 피리, 대금, 축, 어, 해금, 진고, 마조촉, 절고, 아쟁, 태평소 등의 관악기, 현악기, 타악기를 두루 갖춘 '국악 오케스트라'다.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은 2008년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Intangible Cultural Heritage)으로 지정됐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악보(위)와 악기 스케치
한편,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재능에서 흔히 간과되는 것은 그가 음악가였다는 사실이다. 음악과 미술은 그에게 "보이지 않는 것을 형성하는 자매와 같은 예술"이었다. 그의 노트북에는 음악에 관한 스케치와 악기 발명품 등이 묘사되어 있다. 당시 동료들은 다빈치를 연주자이자 음악 선생으로 불렀다. 다빈치는 음향 과학과 악기 디자인 공예에 관심을 갖고 연구했다. 그가 발명한 악기는 플루트, 드럼, 허디-거디(hurdy-gurdies, 손잡이를 돌려 현을 타는 악기)와 비올라 오가니스타(viola organista, 하프와 첼로 사이) 등 현악기, 키보드 등을 다양하다.
1482년 레오나르도는 기존의 나무 수금'(竪琴, lyre, 리라, 미니 하프)보다 소리가 잘 울려퍼지고, 아름다운 말 머리(*레오나르도는 말 조각도 제작했다)의 모양의 은색 수금을 제작했다. 그의 이전 후원자였던 로렌쪼 데 메디치는 밀라노 공작과 논쟁에 휘말려 앙숙이었다. 레오나르도는 이들에게 화해의 표시로 말머리 수금을 선물로 보냈다고 한다.
조르지오 바사리(Giorgio Vasari)는 '미술가 열전(Le Vita De' Piu Eccellenti Architetti, Pittori, et scultori/ Lives of the Most Eminent Painters, Sculptors & Architects, 1550)' 중 다빈치 편에서 레오나르도의 음악적 재능에 다음과 같이 감탄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음악에 약간의 관심을 보인 후 마치 선천적으로 가장 고상하고, 세련된 영혼을 가친 사람처럼 잽싸게 수금을 배워 연주했다. 그는 그 악기로 즉흥적으로 연주하며, 신성하게 노래했다."
당시 대부분의 남자들은 턱수염을 면도했지만, 레오나르도의 수염은 가슴 위로 흘러내렸다. 성인 남자들은 대개 긴 가먼트를 입었지만, 레오나르도는 튜닉과 긴 바지에 늙 밝은 컬러를 입었던 패셔니스타로 록스타같은 존재감을 발휘한 것으로 전해진다.
Leonardo da Vinci, Portrait of a Musician (c.1485), Biblioteca Ambrosiana, Milan/ 지저스 가세스 램버트 감독의 '어메이징 레오나르도(Amazing Leonardo, 2019)'.
레오나르도는 1485년경 한 남자의 초상화를 그렸다. 밀라노 암브로시아나 도서관(Biblioteca Ambrosiana)이 소장한 이 그림은 오랫동안 밀라노 공작(Ludovico il Moro)으로 알려졌었다. 그런데, 1905년 복원 과정에서 덧칠을 제거하자 하단에 손에 쥐고 있는 악보가 나타났다. 이에 따라 모델은 공작이 아니라 음악가로 밀라노 두오모 예배당의 마스터 프란치노 가푸리오라는 주장과 작곡가 호아킨 데스 프레즈라는 설이 나왔다. 최근에는 레오나르도의 친구였던 토스타나의 가수 겸 작사가 아탈란테 미글리오로티라는 설과 레오나르도의 자화상이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세종대왕과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심씨가 합장된 여주의 영릉(英陵)엔 해시계, 자격루, 관천대, 측우기, 혼천의세종 대의 과학기구들이 복원전시되어 있다. Photo: 여주시청
세종대왕의 조부인 태조 이성계는 74세로 장수했다. 세종대왕은 튼튼한 체격을 타고 났지만, 22세에 왕위에 오른 후 7년간 정종, 어머니 민씨, 아버지 태종의 국상을 치렀다. 독서광이었던 세종은 평생 안질을 비롯, 풍질과 풍습(관절염), 이질, 중풍, 두통, 부종, 요로결석, 소갈(당뇨병), 성병 등 각종 질환에 시달린 것으로 전해진다.
세종의 말년은 불행의 연속이었다. 1445년 두 아들을 한달 새에 잃었다. 소헌왕후와 사이에 낳은 다섯째 광평대군(20)과 일곱째 평원대군(17)이 천연두로 숨을 거두었다. 소헌왕후는 이에 따른 충격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1446년 세상을 떠났다. 1448년 세종은 불교에 귀의하는듯 궁궐 옆에 내불당을 짓겠다고 밝혔다. 유교국에서 신하들은 반대가 거셌지만, 슬픔에 찬 세종은 강행했다. 세종대왕은 재위 32년, 1450년 3월 30일(음력 2월 17일) 52세로 승하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고향 빈치, The Man of Vinci(Vitruviann sculpture) by Mario Ceroli. Photo: Slow Italy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1516년 여름 프랑스왕 프랑수아 1세의 초청으로 앙부아즈에 정착, 1519년 5월 2일 클로뤼세의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67세였다.
"마침내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노쇠해서 몇개월 동안 병상에서 지냈으며, 죽음을 인지한 후 카톨릭 신앙, 선한 일과 거룩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대해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그후 많은 신음 끝에 그 자신이 고백하고, 회개했다. 비록 스스로 일어서지는 못하고, 친구들과 하인들의 부축을 받아 일어섰지만, 성찬을 받을 수 있어서 그는 기뻤다. 레오나르도를 자주, 다정하게 방문했던 왕은 그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레오나르도는 공경심으로 자신을 일으킨 후 왕에게 자신의 병마와 그 상황을 설명하고, 자신이 미술가로서 했어야할 일을 하지 않음으로써 얼마나 하나님과 인류를 분노케했는지 고백했다. 그후 레오나르도는 '죽음의 사신'인 발작을 일으켰고, 왕은 일어서서 그의 머리를 잡고, 그의 신성한 고통과 영혼을 완화하려 했다. 레오나르도는 그보다 위대한 영예를 가질 수 없음을 알았고, 왕(프랑수아 1세)의 팔 안에서 사망했다."
-조르지오 바사리, 미술가 열전(Le vite de' più eccellenti pittori, scultori e architettori), 1550-
Jean-Auguste-Dominique Ingres, Francis I Receives the Last Breaths of Leonardo da Vinci, 1818
조선 르네상스와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 건축, 문학, 음악 등 문화 전반에서 융성했던 이탈리아 르네상스(文藝復興)는 14세기 피렌체에서 시작되어 17세기까지 지속됐다. 독일에선 1447년 구텐베르크가 금속활판 인쇄술을 개발해 유럽에 지식의 혁명이 시작된다. 그러나, 구텐베르크보다 훨씬 앞선 고려 13세기 초 금속활자가 사용된 것으로 기록에 남아있다. 세종대왕은 1434년 금속활자의 백미로 불리우는 필서체의 활자 '갑인자'를 주조했으며, 한글활자도 만들었다. 세종대왕 시대는 조선 르네상스의 시발점이었다.
"15세기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중세의 암흑기로부터 벗어나 인간의 자아를 발견한 르네상스가 일어났는데 그에 앞서 조선에서는 세종대왕이 인간 중심의 세상을 지향하며 또다른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죠. 그런데 서구의 르네상스는 잘 알면서 우리의 르네상스는 모릅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했을 뿐만 아니라 얼마나 인본주의를 폭넓게 실천했는지 알고 이를 계승해야 합니다."
홍익대 미대 출신으로 세종문화회관 사장(2008-2009)을 지낸 이청승씨는 2010년 세종 르네상스의 의미와 비전을 담은 책 '두개의 르네상스'를 출간한 후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이청승씨는 이어 "세종대왕은 백성을 하늘로 보고 인간중심의 세상을 연 분입니다. 그 분은 사대사상에 젖은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백성들을 위해 한글을 만드셨고, 만드신 다음에도 끝없이 토론하고 설득하며 3년을 보냈습니다. 자신은 고름을 한 종지나 짜내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관노비에게 130일이나 출산휴가를 주게 했고,관노비들의 남편에게도 30일간의 산간(産看)휴가를 줬습니다. '천하에 돌봐줄 사람이 없이 가여운 자가 노비인데 그 남편에게 휴가를 주지 않으니 관노비들이 아이를 낳다 죽는 일이 많은 것 아닌가'라고 하셨답니다. 이런 세종의 민본주의, 인본주의를 시대정신, 한국의 정신, 아시아의 정신으로 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강조했다.
2003년 조선의 르네상스를 연 'CEO로서의 세종대왕'을 조명한 책 '세종의 코드를 읽어라'를 출간한 전경일씨는 왕이었으며, 천재였고, 노력가였으며, 훌륭한 인품과 신력에 바탕한 강력한 리더십으로 사람들을 이끌었던 세종대왕의 리더십을 벤치마킹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세종은 실용적이고 전방위적이다. 세종은 시스템적이면서도 또 전략적이다. 세종은 포용적이면서 혁신적이다. 세종은 자신뿐 아니라 사람들의 잠재력을 끌어낼 줄 안다. 무엇보다도 세종의 실용주의 노선의 실천은 감탄스럽다. 민생안정을 위한 경제산업 정책, 국기 안정을 위한 안보외교 정책, 성장 원동력을 키우는 기술개발 정책, 백년대계를 위한 출판 정보화 교육 정책, 정부 통제를 받지 않는 언론과 국정기록 정책, 국민을 즐겁게 하는 문화예술 정책, 어느 한 가지 모자람이 없다. 한글 창제라는 위업을 빼더라도 세종은 위대한 CEO다"라고 썼다.
불휘 기픈 남 매 하니 뭘(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리고)
곶 됴코 여름 하니. (꽃 좋고 열매가 많이 열리나니)
미 기픈 므른 래 아니 그츨,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아니 그쳐서)
내히 이러 바래 가니 (내를 이루어 바다까지 가나니)
-용비어천가 2장-
*한류 이해 코드 33 #26 호머 헐버트와 세계인들의 한글예찬
*와인 메이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밀라노 포도밭 관광지로
박숙희/블로거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후 한양대 대학원 연극영화과 수료. 사진, 비디오, 영화 잡지 기자, 대우비디오 카피라이터, KBS-2FM '영화음악실', MBC-TV '출발! 비디오 여행' 작가로 일한 후 1996년 뉴욕으로 이주했다. Korean Press Agency와 뉴욕중앙일보 문화 & 레저 담당 기자를 거쳐 2012년 3월부터 뉴욕컬처비트(NYCultureBeat)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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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ki 님 한류코드 33가지!! 팬데믹 기간에 시작하셔서 2년 간 우리의 것을 알고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 글이었어요. 세종대왕을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피렌체의 통치자가 된 것" 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대적할 수 없는 업적들을 알려주시고, 우리의 자랑스러움, 아름다운 것들을 깨우쳐 주는 글들 감사합니다. 한류의 자랑스러움을 수평, 수직적으로 포괄적인 퍼스펙티브를 가지고 써주신 33개의 칼럼들, 우리의 2세들과 나누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필요한면 위의 구글 번역기를 돌려서^^). Suki님꼐 큰 박수를 보내며, 앞으로 더 많은 한류 코드가 나오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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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저도 우리 민족의 탁월한 재능, 의지와 잠재력 등 많은 것을 배웠고, 새로이 자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