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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칼럼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어리굴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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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은 1987년 국립현대미술관에 '다다익선'을 설치했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소년 백남준 (사진: 백남준아트센터)

 

어려웠던 시절 서린동에서 태어난 내가 현해탄을 건너고 태평양 대서양 너머 한평생 나그네로 사는 동안 세월은 어김없이 흘러흘러 갔다. 떠돌며 이루며 살아온 나에게 어머니는 언제나 따뜻한 기억 속에 계신 고향이며 조국(祖國)이시다.

 

나에게는 두 분의 형님과 두 분의 누님이 계셨다. 다섯번째로 태어난 나는 부모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고, 어머님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창신동으로 이사해서 나는, 햇볕 쏟아지는 골목에서 유년의 꿈을 키우며 수송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어머니 손을 잡고 학교엘 가고 있었다.

"어머니는 왜 저런 옷 안 입어요?"

 

나는 색깔 고운 옷을 입고 가는 다른 어머니를 가리키며 여쭈어 보았다.

"나는 나이가 많아서...."

어머니는 이렇게 얼버무리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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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금강산 여행에서 백낙승 태창방직 대표 가족. 막내 백남준은 앞줄 왼쪽 끝이다. (사진: 백남준아트센터)

 

어머니는 늘 고동색이나 흰색, 아니면 옥색 옷만 입으셨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다섯 번째로 나를 나으실 때 꽤 연세가 드셨던 것 같다. 현대에는 80대 노인들도 빨강 노랑 옷을 입고 있지만, 그 시절은 조선시대 유교 정신이 이어져서 30대 말 정도에도 유색 옷을 피했던 것 같다. 

 

그때 우리집은 아버지의 공장이 그냥 잘 운영되어 약 달이는 할머니도 따로 있고 침모도 있었다. 그러나 내 옷은 어머니께서 손수 지어 주셔서 명절 때면 입었다. 지금 생각해도 한복은 활동성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명주 옷은 질감이 좋고 아름답다. 어릴 때 조선 옷을 입는 것은 여간 귀찮지 않았다. 왜냐하면 허리띠를 조여 매야 하고 대님도 발목에 매야 했다. 또 조끼도 입고 고름도 잘 매야 했다. 

 

지금도 어머님이 해주시던 음식이 먹고 싶을 때가 있다. 그래서 서울 가면 누님에게서 어머니 음식을 먹곤 했다. 겨울이면 찡하게 맛이 있는 통김치, 게장, 연어머리 찌개, 또 고기를 다져서 맛있게 양념한 장산적, 어머니가 담가 주시던 어리굴젓의 맛은 잊을 길 없다. 

 

어리굴젓에는 납작하게 썬 무와, 특히 굵게 채 썬 배가 들어가서 매콤하고 굴 향기에 어우러져 시원한 맛이 난다. 어머니는 언제나 굴젓을 담아 상에 놓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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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영, 백남준 굿 퍼포먼스 기록, 1990, 뉴욕한국문화원 '백남준: 시간의 마에스트로'전 (2019)

 

어머니는 한양 조(趙)씨로 '종'자 '희'자를 쓰셔서 조종희씨다. 구한말에 교육도 받으신 것 없이 한글을 아셨고, 아버지가 15세에 한살 위인 16세 때 백씨 가문으로 시집 오셨다. 옛날에는 신방도 따로 후에 차렸다고 한다. 

 

어머니는 해방과 6.25의 격동을 겪으며 우리를 길러주셨다. 나는 저자 거리나 시장에 가는 어머니 치마폭을 붙들고 다니면서 '저 자동차 사주세요,' '사탕 먹고 싶어요.'하면 한번도 거절하지 않으시고 모두 사주셨다. 공부도 잘 한다고 꾸중 한번 않으시고 사랑해 주셨다. 

 

한국 전란 후에 일본에 가서 공부할 때도 어머니는 함께 계셨다. 그 후, 나는 독일로 떠나고 어머니는 서울에 사시는 긴 이별이 시작되었다. 어머니는 중풍이 와서 손과 발을 움직이지 못하게 되어서 고생하고 계셨지만 독일에서 학업에 열중하고 있는 나는 찾아뵐 도리가 없었다. 

 

아버지가 세상 떠나시고 1년 후, 59세로 어머니는 독일에 있는 이 아들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직전에 독일로 편지를 보내주셨다. 불편하신 몸, 떨리는 손으로 '너무 돈 아끼지 말고 쓰는대로 쓰라'고 써서 유언처럼 보내주셨다. 그런 어머니를 떠나 살아온 수많은 세월의 불효를 어이하랴. 

 

지금 서울엔 누님 한 분, 또 형님 한 분이 생존해 계셔서 가끔 통화하고 혈육의 그리움을 달랜다. 객지로 다니면서도 문득문득 어머니가 만들어주시던 어리굴젓이 생각난다. 짠 것은 혈압에 나쁘다고 해서 이제는 있어도 먹을 수 없지만 슴슴하고 짜릿한 어머니의 맛, 고향의, 조국의 향기, 그 맛이 그립고 그립다.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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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유작 '엄마' Nam June Paik, Ommah, 2005, one-channel video installation on 19-inch LCD monitor, silk robe.  National Museum of Art, Washington D.C. 

 

 

*이 칼럼은 1999년 시인 김정기 선생님께서 뉴욕 라디오서울과 함께 편집하신 책 (백남준 외 지음, 꼭 모시러 올게요: 미국을 움직이는 이민1세들이 쓰는 아버지 생각 어머니 추억, 뉴욕 라디오서울 엮음, 서울 하늘출판, 1999)에서 옮긴 것입니다. 사용을 허락해주신 김정기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뉴욕 스토리 <455> 김정기: 우리 이웃집 아저씨 백남준

*In Memory of NAM JUNE PAIK (1932-2006) 뉴욕 미술관의 백남준을 찾아서

*한류를 이해하는 33가지 코드 #24 백남준의 후예 8인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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