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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익중/詩 아닌 詩
2024.06.12 15:03

(716) 강익중: 거기서 거기

조회 수 243 댓글 1

詩 아닌 詩 (82) 거기서 거기

 

jUntitled 3-2, 2024, 8 x 12in, Mixed Media on Paper.jpg

Ik-Joong Kang, Untitled 3-2, 2024, 8 x 12in, Mixed Media on Paper

 

 

거기서 거기

 

평생이나 순간이나 지나고 나면 거기서 거기

일등이나 꼴등이나 지나고 나면 거기서 거기

사랑이나 미움이나 지나고 나면 거기서 거기

기쁨이나 슬픔이나 지나고 나면 거기서 거기

만남이나 이별이나 지나고 나면 거기서 거기

찍먹이나 부먹이나 입에 넣으면 거기서 거기

 

 

JUntitled 3-1, 2024, 8 x 12in, Mixed Media on Paper.jpg

Ik-Joong Kang, Untitled 3-1, 2024, 8 x 12in, Mixed Media on Paper

 

힘든 날

 

욕심이 많은 날

남 흉본 날

화를 참지 못한 날

하루 종일 누워 뒹군 날

라면에 밥 말아먹고 잔 날

단골식당 쉬는 날

김치 깍두기 떨어진 날

머리 잘 못 깎은 날

그림 안 되는 날

 

 

JUntitled 3-3, 2024, 8 x 12in, Mixed Media on Paper.jpg

Ik-Joong Kang, Untitled 3-3, 2024, 8 x 12in, Mixed Media on Paper

 

내가 아는 것

 

“자네는 도대체 아는 게 뭔가? ” 장모님은 이제 막 결혼한 둘째 사위의 앞날이 걱정스러우셨을 거다. 직장도 변변치 않고, 게다가 그림 그리는 환쟁이라고 하니…

 

장모님의 뜬금없는 질문에 마음이 살짝 상했지만, 자신을 돌아보며 그날부터 내가 아는 것들을 하나씩 마음과 공책에 적기 시작했다. “그래 이건 알아, 어릴 적 이태원 언덕에서 본 폭풍 직전의 하늘은“

 

폭풍 직전의 하늘은 연한 청록색이다.

지하철에서 나와 방향을 모를 때 맞는다고 생각하는 쪽의 반대로 가면 된다.

가장 좋은 냄새는 학교 앞 문방구에서 방금 산 책받침 냄새다.

어릴 적 들은 칭찬은 오래 기억된다.

만두 속의 부추와 돼지고기 비율은 2대1이다.

급한 일이 있더라도 몸이 불편한 사람 앞에서 뛰면 안 된다.

밤하늘의 별들은 크리스마스 장식이 아니다.

무대 공포증은 나보다 더 큰 나를 보여주려고 할 때 생긴다.

비행기에선 방귀 소리가 안 들린다.

부자들은 돈을 잘 펴가지고 다닌다.

괜찮은 아이디어는 아침 샤워 중에 나온다.

성격 급한 사람들이 항상 밥값을 먼저 낸다.

하늘 아래 모든 것은 심리학이다.

기회는 다시 온다.

정말 필요한 것은 별로 없다.

 

이렇게 ‘내가 아는 것’의 화두는 40년 가까이 나를 따라다니고 있다. 인생이 기차여행이라면 오래전 청주에서 출발한 기차는 이태원 언덕을 지나 이곳 맨해튼에 왔고, 며칠 후 다시 떠난 곳으로 돌아간다. 고향 청주에서의 첫 개인전 때문이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여행에서 정말 필요한 것은 별로 없었다. 옆에 앉아 차창 밖을 함께 바라보는 사람 말고는.

“자네는 도대체 아는 게 뭔가?” 기차에서 먼저 내리신 장모님이 플랫폼 너머에서 다시 물으신다. “내가 아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느낄 때 내가 살아있음을 안다는 것과, 나를 기다리는 우암산의 품에 얼른 달려가 안기고 싶은 마음 말고는”.

 

 

*첫 시집 '달항아리' 출간한 화가 강익중씨

*강익중씨 런던 템즈강에 '꿈의 섬(Floating Dreams)' 설치

*An Interview with Ik-Joong Kang, Inside Korea(The New York Times) 

*강익중 순천국제정원박람회 설치작 '꿈의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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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ukie 2024.06.15 14:53
    '거기서 거기'를 할머니께서는 '오십보나 백보나 거기서 거기'라고 하셨습니다. 큰 차이가 없을 때 많이 쓰셨습니다. '거기서 거기'를 읽으면서 동감하고 또 했습니다.

    '힘든 날'을 읽으면서 내가 힘든 날이 뭤 때문이었지? 반문해 봤습니다. 팔십을 훌쩍 넘기고 나니까 힘든 날과 안 힘든 날의 구분이 없어지고, 흐리멍텅한 앞날이 힘든 날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내가 아는 것'-이 시를 읽고 절묘한 답을 한 강익중씨께 박수를 보냈습니다.
    강 작가의 장모가 "자네는 도대체 아는 게 뭔가?"라는 질문에 "내가 아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라는 답이야 말로 우문에 현답이 아닐까요?

    시 세편을 읽을수록 마음에 평화를 줍니다.
    -Ela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