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영혼' 그린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의 세계
Caspar David Friedrich: The Soul of Nature
February 8–May 11, 2025
@The Met Fifth Avenue in Gallery 199
Caspar David Friedrich: The Soul of Nature,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2015
"예술가는 눈 앞에 보이는 것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서 보이는 것도 그려야 한다. 그러나, 자신 안에서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면, 자신 앞에서 보이는 것도 그리는 것을 삼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그림은 병자나 죽은 사람만 있는 것처럼 보이는 접이식 스크린(병풍)과 같은 것이다."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
대자연과의 심오한 만남으로 유럽의 풍경화를 새롭게 구상한 독일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1774-1840) 회고전 '자연의 영혼 (Caspar David Friedrich: The Soul of Nature)'이 메트로폴리탄뮤지엄에서 열리고 있다. 2월 8일부터 5월 11일까지 계속되는 이 전시는 프리드리히의 탄생 250주년을 기념한 것이다.
Caspar David Friedrich: The Soul of Nature,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2015
밤 하늘, 아침 안개, 황무지, 고딕 분위기의 폐허 등을 배경으로 실루엣으로 그려진 뒷 모습의 인물. 자연과의 친밀한 조응을 묘사한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의 풍경화는 신비롭고, 경이로우며, 수수께끼적이다. 웅장한 대자연 속에서 뒷 모습으로 표현된 인간의 실존이 탐구한 철학적 화가다.
이번 메트뮤지엄 전시엔 베를린국립미술관, 드레스덴국립미술관, 함부르크 쿤스트할레 등 유럽과 북미의 30곳 이상에서 대여해온 유화, 드로잉, 스케치 등 75점이 선보인다.
Caspar David Friedrich: The Soul of Nature,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2015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는 1774년 발트해 인근 시골 그라이프스발트에서 10 자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엄격한 루터교도로 양초와 비누 공장을 운영했다. 어린 시절엔 비극이 잇달았다. 엄마는 그가 일곱살 때 사망했으며, 1년 후엔 누나 엘리자베스, 이어 누나 마리아가 병으로 죽었다. 그리고, 얼어붙은 호수에서 놀던 자신을 구하려던 남동생 요한이 13살에 익사한다. 이런 사건들이 훗날 그의 풍경화에서 우울하고, 침울하며, 명상적인 분위기를 담게 된다.
코펜하겐의 덴마크왕립미술아카데미에서 공부한 후 드레스덴에 정착해 시골 풍경에 매료됐다. 1805년엔 극작가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주최한 바이마르 미술대회에 세피아 톤의 그림을 출품해 우승했다. 1810년 프로이센 왕세자가 그의 그림 두점을 사들인 후 베를린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며 낭만주의 화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Caspar David Friedrich: The Soul of Nature,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2015
1818년 캐롤라인 봄머와 경혼해 세 자녀를 두면서 그림을 밝아졌고, 경쾌해졌다. 부인은 그의 작품에 모델로도 등장한다. 그러나, 그의 말년엔 시대가 바뀌며 낭만주의가 쇠퇴했다. 시대에 맞지 않은 프리드리히는 괴짜로 여겨졌다. 1820년 즈음부터는 가난한 은둔자로 살았고, 친구들은 그를 "외로운 사람 중 가장 외로운 사람"이라 불렀다고 한다.
1835년 6월 뇌졸중을 겪은 후 사지가 마비되어 유화를 그릴 수 없었고, 때문에 수채화 세피아톤에 몰두하게 된다.
Caspar David Friedrich: The Soul of Nature,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2015
미술계에서 잊혀졌던 프리드리히가 다시 등장한 것은 1906년 그의 사망 반 세기가 지난 후 독일 100주년 기념 미술전에 전시되면서다. 프리드리히는 재발견되며 현대미술의 선구자로 칭송받았다. 그러나, 나치는 프리드리히의 작품을 이용하여 민족주의를 홍보했다. 이에 따라 전후에 프리드리히는 다시 잊혀졌다.
프리드리히의 스타일은 메트뮤지엄이 소장한 회화 '죽음의 섬(Island of the Dead)'의 아르놀트 뵈클린(Arnold Böcklin, 1827-1901)를 비롯, 에드바르트 뭉크, 막스 에른스트, 르네 마그리트, 마크 로스코, 게르하르트 리히터 등에게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