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곤 쉴레 풍경화전 'Egon Schiele: Living Landscapes'@노이에 갤러리(10/17-1/13, 2025)
EGON SCHIELE: LIVING LANDSCAPES
@Neue Galerie NY (10/17, 2024-1/13, 2025)
Egon Schiele, Town among the Greenery (The Old City III), 1917, Oil on canvas
맨해튼 독일/오스트리아 전문 미술관 노이에 갤러리(Neue Galerie)에서 2024년 10월 17일부터 2025년 1월 13일까지 에곤 쉴레: 살아있는 풍경(Egon Schiele: Living Landscapes)'전을 연다.
에곤 쉴레(1890-1918)는 슬픈 육체와 염세적인 분위기의 인물화로 널리 알려졌지만, 주변 식물, 정원, 도시 풍경 등도 상당수 그렸다. 그에게 꽃과 나무는 생명 주기와 인간의 상태를 상징했다. 에곤 쉴레는 어릴 적부터 자연을 예리하게 기록했다. 표현주의 화가가 된 후에는 비엔나에서의 압박적인 삶에서 벗어나 시골에서 위안을 찾았다.
Egon Schiele, Four Trees, 1917, Oberes Belvedere, Vienna
1910년 여름부터는 보헤미아의 어머니 고향 몰다우강(현 블라트바 강)의 중세 도시 크루마우(현 체코 공화국의 체스키크룸로프)로 여러 차례 여행을 떠났다. 쉴레는 높은 곳에 올라가 도시와 주민을 내려다 보며 영감을 얻었다. '녹색 속의 도시/구시가지 III (Town among the Greenery/ The Old City III, 1917)'는 조감도의 시점에서 그린 풍경화다. 도시는 울창하고 푸른 나무풋 사이에 끼어 있다. 크루마우의 풍경에 반한 쉴레는 이곳이 담긴 엽서를 수집한 것으로 알려졌다.
에곤 쉴레는 종종 거시적 관점에서 미시적 관점으로 전환해 화초와 나무도 클로즈업으로 그렸다. 빈센트 반 고흐처럼 해바라기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모티프 중 하나였다. 활짝 핀 해바라기에서 갈색으로 시들러가기까지 인간의 생로병사를 담았다. 벌거벗은 나무도 그의 영감이었다. 늦은 가을의 황량한 풍경 속에서 가늘고 생명이 없는 나무 시리즈를 그렸다. "가을이 오면 나는 종종 반쯤 눈을 뜬 채로 울었습니다." 쉴레의 말이다.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 표지
2016 맨부커상을 수상한 한강(Han Kang)의 소설 '채식주의자(The Vegetarian)'의 표지는 쉴레 그림 '4 그루의 나무(Four Trees, 1917)'이다. 쉴레가 사망하기 1년 전 그린 이 그림은 밝은 태양과 산의 나무 4 그루가 묘사됐다. 왼쪽에서 두번째 나무는 병든 것처럼 앙상하다.
쉴레는 임신한 아내 에디트가 세상을 떠난 지 사흘 후인 1918년 10월 31일 그녀처럼 스패니시 독감으로 눈을 감았다. 그의 나이 28세였다.
쉴레의 풍경화에는 인간의 실존에 관한 메시지가 담겨있다. 봄과 여름의 희망과 약속은 쇠퇴와 죽음으로 이어지고 삶의 사이클은 지속된다. 이 전시는 크리스찬 바우어(Christian Bauer) 큐레이터가 기획했다.
https://www.neuegalerie.org/schielelandscapes
*아티스트와 뮤즈 (12) 에곤 쉴레와 '비엔나의 모나리자' 발리(Wally)
https://www.nyculturebeat.com/index.php?mid=Art2&document_srl=3935001
*한강의 '채식주의자(The Vegetarian)': 누가 영혜의 영혼을 구원할 것인가?
https://www.nyculturebeat.com/index.php?mid=CulBooks&document_srl=4098711
스페인 독감과 화가들 (3) 에곤 쉴레(Egon Schiele)
Egon Schiele, The Family,1918. Belvedere, Vienna, Austria
2020년 코로나 바이러스19(COVID-19)가 세계적인 유행병이 되면서 경제와 사회는 휘청거리고, 문화 활동도 정지됐다. 집콕(Stay at Home) 생활에 익숙한 직업인 아티스트들은 또한 가장 세상의 변화에 민감한 이들이다. 그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작업을 하고 있을까?
지금으로부터 거의 100년 전엔 스페인 독감(Spanish Flu Pandemic)이 3년여간 전 세계를 휩쓸고 지나갔다. 1918년 1월 시작되어 1920년 12월까지 세계 5억여명을 감염시켰다. 전 세계 인구의 4분의 1이다. 그리고, 5천만여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그에 앞선 1347-1351년의 흑사병으로는 2천500여만명이 사망했다. 스페인은 억울하게 '스페인 독감'이라는 오명을 안게 됐다.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중립국이었던 스페인에서는 국왕 알폰소 13세까지 독감에 걸렸고, 참전국들과는 달리 검열 없이 신문에 보도되면서 '스페인 독감'으로 굳어지게 된다.
Egon Schiele, Girl, 1918. Metropolitan Museum of Art
스페인 독감에 걸렸다가 살아남은 유명인으로는 프랭클린 D. 루즈벨트, 우드로우 윌슨 대통령, 마하트마 간디, 월트 디즈니를 비롯, 영화배우 릴리언 기쉬, 메리 픽포드, 화가 조지아 오키프, 에드바르트 뭉크,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 D. H. 로렌스, 시인 TS 엘리엇, 작곡가 벨라 바톡, 비행사 아멜리아 에어하트 등이 있다. 한편, 프랑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 오스트리아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쉴레는 스페인 독감으로 1918년 목숨을 잃었다.
스페인 독감과 화가들 (3) 에곤 쉴레 (1890-1918)
Egon Schiele, The Hermits, 1912. Leopold Museum, Vienna(left)/ Klimt and Schiele,
에곤 쉴레(Egon Schiele)는 오스트리아 도나우 강변의 툴른에서 철도역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아돌프는 에곤이 그린 기차 그림들을 태워버렸다. 15세 때 아버지는 매독으로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다가 사망했다. 쉴레는 어머니와의 관계도 나빠지게 되자 여동생에 대한 집착이 강해졌다. 에곤은 16세에 비엔나미술아카데미에 입학했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바꿀 거장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를 만나게 된다.
17, 그리고 45.
1907년 화가 에곤 쉴레와 구스타프 클림트가 처음 만났을 때의 나이다. 두 화가는 28세의 차이가 났고, 클림트는 곧 바로 멘토가 되었다. 클림트는 쉴레는 오스트리아 뿐만 아니라 아르누보와 에로스 취향의 화가라는 공통 분모가 있었다. 클림트는 청년 쉴레의 그림을 사주고, 모델과 후원자를 소개하고, 분리파 워크숍에도 추천했다.
쉴레는 1912년 클림트와의 우정을 기리기 위해 둘이 함께 있는 자화상 '은둔자들(The Hermits, 그림 위)'을 그렸다. 제 1차 세계대전 중 베를린에서 열린 한 전시회에서 쉴레의 그림은 클림트의 건너편에 전시될 정도로 유명해졌다.
Egon Schiele, Wally in Red Blouse with Raised Knees, 1913/ Schiele and Neuzil in Krumau, Czech Republic, 1913. Leopold Museum
1911년 청년 화가 쉴레는 무일푼이었다. 적나라한 포즈를 취할 값싼 모델을 찾기도 힘들었다. 이에 스승 클림트는 자신의 모델이자 애인이었던 발리 노이칠(Valeirie/ Walburga ‘Wally’ Neuzil)을 쉴레에게 소개해주었다. 21살의 쉴레와 17살의 발리는 4년간 불꽃튀는 연인 관계에 들어가게 된다. 쉴레는 매춘부 출신 발리와 비엔나를 떠나 체코슬로바키아 시골을 돌며 살았다.
Egon Schiele, Death and the Maiden, 1915. Belvedere Museum, Vienna
쉴레는 사춘기 때부터 여동생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여동생의 누드를 그렸던 쉴레는 1912년 노이렌바흐에서 소녀들을 누드 모델로 작업하다가 감옥으로 간다. 미성년자 납치, 강간 등으로 고발된 쉴레는 24일간 수감됐다. 발리는 옥살이 중인 쉴레에게 그림도구를 가져다주며 돌보았고, 쉴레는 옥중에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쉴레와 발리는 1915년 4월 결별에 이른다. 쉴레가 비엔나 작업실 건너편에 사는 부잣집 딸 에디트 하름스(Edith Harms)와 약혼해버린 것이다. 에디트를 소개한 것도 발리였다. 쉴레는 결혼 후에도 1년에 한번씩 휴가 가자고 제안했지만, 발리는 거절했다. 쉴레는 에디트 부모의 결혼 기념일에 웨딩마치를 울렸다.
쉴레는 결별을 앞두고 자신과 발리를 모델로 '죽음과 소녀(Der Tod und das Mädchen, 1915, 그림 위)'를 그렸다. 발리는 쉴레에게 배신당한 후 1916년엔 클림트에게 돌아가 다시 모델이 된다. 이어 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간호원으로 복무하다가 1917년 성홍열에 걸려 삶을 마감하게 된다. 그녀 나이 23세였다.
Egon Schiele, Self-portrait(16), 1906/ Self-portrait(22)/ Egon Schiele
쉴레는 결혼식 나흘 후 군복무를 발령을 받고, 에디트와 함께 프라하로 갔다. 에디트는 호텔에 머물렀다. 스페인 독감이 번지기 시작하던 1918년 2월 6일 스승 클림트(55)가 세상을 떠났다. 다음날 쉴레는 비엔나의 병원 시체실로 가서 스승의 모습을 그렸다. 그리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성취한 아티스트, 드물게 심도깊은 사람, 그의 작품은 성소(sanctuary)다"라고 썼다.
1918년 에곤 쉴레는 떠오르는 작가로 주목받게 된다. 비엔나 분리파 화가협회와 개인전을 열었으며 작품이 팔리기 시작했다. 이즈음 에디트가 임신하자 가족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에디트는 누드로,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은 뒤에 배치했다. 그리고, 조카 토니를 모델로 가족의 초상을 그렸다. 그림은 미완성으로 남았다.
Egon Schiele, Edith with Striped Dress, Sitting, 1915, Leopold Museum, Dying Edith Schiele, 1918
1918년 10월 쉴레는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다.
"유디트가 8일 전 스페인 독감에 걸려서 지금 폐렴으로 고통받고 있어요. 유디트는 6개월 임신 상태입니다. 이 질병은 무척 격심하고, 위태로워요. 저도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고 있어요."
유디트는 10월 28일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했다. 쉴레는 사망 전날까지 고통에 괴로워하는 유디트를 스케치(위 그림 오른쪽 끝)했다. 그리고, 사흘 뒤인 10월의 마지막날 눈을 감았다.
그해 11월 11일 제 1차 세계대전은 끝났다. 전쟁으로 900여만명이 죽었다. 스페인 독감은 1920년 말까지 퍼지며 세계에서 5천여만명의 사망자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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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의 표지를 에곤 쉴레의 4그루의 나무로 했다는 걸 알고 놀랐습니다. 컬빗을 통해 또 배웠습니다. 기쁩니다. 감사합니다.
그래서 표지를 다시 볼려고 책을 찾았는데 책장에 꽂혀있지 않아서 계속 뒤척이고 있습니다. 채식주의를 몇년 전에 읽었지만 표지는 그냥 스쳐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표지가 에곤 쉴레의 작품이란 걸 몰랐습니다. 표지를 꼭 봐야 속이 시원하게 풀릴 것같아요.
28살이란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그의 그림은 오래 산 사람같은 느낌을 주네요. 색상이 화사하고 밝은 쪽보다는 침울한 느낌을 줍니다. 그래서일까요, 화가가 늙었지하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Elaine-
화가 쉴레와 클림톤이 이 독감으로 사망한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두 화가를 자세하게 해설을 해주셔서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