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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큐비즘을 버리고, 폴락을 흡수했다" 

 

화가 리 크래스너  Artist Lee Kras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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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리 크래스너가 잭슨 폴락이 'One'을 그리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Photo: Hans Namuth

 

 

만약에 리 크래스너(Lee Krasner)가 잭슨 폴락(Jackson Pollock)과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리 크래스너는 붓을 꺾고 자기파괴적인 폴락의 매니저처럼 돌보아주는 대신, 작품에 몰두해서 더 성공한 화가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크래스너는 스승 한스 호프만이 칭찬했을 만큼이나 자기 세계를 구축한 화가였다. 

그러나, 크래스너는 4살 아래의 폴락에게서 천재성을 발견했다. 그리고, 자신의 그림에 열중하기보다 폴락의 작업을 지원하면서 '미시즈 폴락(Mrs. Pollack)을 자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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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Krasner, Self-Portrait, ca. 1929, Oil on canvas, 30 × 32 1/8 in.,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1956년 8월 남편은 18살 연하의 유대계 애인 루스 클리그만과 열애에 빠져 음주운전하다 세상을 떠난다. 

크래스너는 브루클린 출신 러시아계 유대인이었다. 리 크래스너와 루스 클리그만은 이후 폴락의 마지막 작품 감정을 두고 싸우게 된다.

 

크래스너는 이스트햄턴에 남아 '잭슨 폴락'이라는 거대한 유산과 화가로서 자신의 열정을 조율해가면서 28년을 더 살았다. 크래스너에게 폴락은 따사로운 봄날의 햇살이라기 보다는 추운 겨울 오후의 따가운 그림자였을지도 모른다.   

 

 

'천재 화가와 두 여인' 시리즈 연재 순서 

 

<1> '미국의 반 고흐' 잭슨 폴락 (1912-1956)

<2> 폴락의 구원자 리 크래스너 (1908-1984)

<3> 화단의 팜므 파탈 루스 클리그만 (1930-2010)

<4> 폴락-크래스너 하우스 & 스터디 센터

<5> 뉴욕 뮤지엄의 잭슨 폴락과 리 크래스너

 

 

 

'잭슨 폴락의 구원자' 리 크래스너  Lee Krasner (1908-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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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브루클린에서 태어난 러시아계 유대인. 본명은 레나 크래스너(Lena Krassner). 

쿠퍼유니온, 아트 스튜던트 리그와 내셔널아카데미오브디자인에서 미술 공부를 했다. 독일 출신 화가 한스 호프만으로부터 큐비즘을 배워 신 입체파 경향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이때 호프만은 크래스너에게 “네 작품이 너무도 훌륭해서 여자가 그린 것인줄 모를 정도야”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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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Krasner, Gansevoort, Number 1, 1934, Oil on canvas, 20 × 25 in.,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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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Krasner, Still Life, 1938, Oil on paper, 19 x 25", The Museum of Modern Art

 

 

크래스너는 1935년부터 43년까지 잭슨 폴락, 윌렘 드 쿠닝, 마크 로스코처럼 루즈벨트 대통령의 미술가 후원 프로젝트인 WPA(Public Work of Art Project)에 참가했다. 

 

리 크래스너는 1941년 뉴욕에서 열린 그룹전 ‘프랑스와 미국 회화’전에 초대되었고, 피카소, 브라크, 마티스 등 유럽 회가들과 함께 전시에서 낯선 미국 화가 ‘잭슨 폴락’의 이름을 발견한다. 

그리고, 폴락의 작업실을 예고없이 방문, 그의 에너지 넘치는 캔버스에 반하게 된다. 서부(와이오밍) 출신 스코틀랜드와 아이리쉬계 알콜중독자와 동부(브루클린) 출신 철두철미한 러시아계 유대인은 자석처럼 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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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폴락과 크래스너가 동네 주민과 작품을 보고 있다. 창문 아래 벽의 그림은 'Portrait and a Dream'. Photo: Tony Vaccaro

 

 

폴락과 크래스너는 1945년 11월 5일 맨해튼 마블 칼리지에이트 교회에서 하객 없는 결혼식을 올린다. 그리고, 맨해튼을 탈출하기 위해 신혼집을 물색하러 이스트햄턴으로 갔다. 스프링 지구에서 어부의 집을 발견한 폴락은 페기 구겐하임으로부터 빌린 2000달러를 다운페이하고, 은행 융자를 빌려 보금자리를 마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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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락-크래스너 하우스의 뒷마당. 아카보낙 하버의 호수가 보인다.

 

 

폴락은 처음에 2층의 침실을 작업실로 사용하다가 이듬해 외양간을 스튜디오로 개조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대신 침실은 크래스너의 스튜디오가 됐다.

 

결혼 후 크래스너는 자신의 작업보다 폴락을 돌보고, 조언하는데 더 열중했다.

"입체파를 버리고, 폴락을 흡수했다"고 고백했을 정도로 폴락은 그녀에게 이미 한 미술의 사조였다. 크래스너는 종종 자신의 그림을 잘라 콜라쥬 작업을 했지만, 자아비판으로 작품을 파기해 남겨진 작품이 많지 않다.

 

그러나, 이런 비평가적 시각이 남편 폴락에게는 중요했다. 크래스너와 폴락의 관계는 피카소와 브라크의 관계처럼 서로를 자극했다. 이들은 구태의연한 미술과 타협주의, 억압된 문화에 저항했으며, 즉흥성과 개인적인 표현을 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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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햄턴 비치에서 크래스너와 폴락(왼쪽). 오른쪽은 1954년 경 신원 불명의 아기와 함께 한 부부. Photo: Willard Bayer Golovin

 

 

애정이 결핍된 막내로 자랐던 폴락은 아기를 원했다.하지만, 크래스너는 아기를 원치 않았다. 영화 '폴락'(2000)에선 폴락이 이 때문에 폴락의 우울증이 더 심해진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폴락과 크래스너는 대신 개를 키웠다. 1954년 경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위 사진 속의 아이는 누구였을까?

 

리 크래스너는 폴락이 바람둥이 아트딜러 페기 구겐하임과 외도를 하며 재정 지원을 받는 것도 눈감아주었으며, 폴락이 루스 클리그만과 열애에 빠졌을 때 유럽으로 여행가며 초연하게 천재화가의 삶을 지켜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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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Krasner, Untitled(left), 1949, Oil on composition board, 48 x 37",  The Museum of Modern Art

Lee Krasner, Number 3 (Untitled), 1951, Oil on canvas, 6' 10 1/2" x 57 7/8", The Museum of Modern Art

 

 

크래스너는 여성 작가로서, 잭슨 폴락의 아내로서 정체성의 고민을 했다. 때문에 이름보다 정체성을 알 수 없는 이니셜 L. K.로 전시하기도 했다. 마티스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던 크래스너는 서예와 콜라쥬를 합성한 회화로 주목을 끌게 된다. 

 

1956년 8월 잭슨 폴락은 붓을 꺾고 18세 아래의 미모 화가 루스 클리그만을 이스트햄턴의 집까지 끌어들였다. 어느날 리 크래스너는 클리그만이 집에서 슬그머니 나가는 걸 목격하고, 페기 구겐하임이 있는 유럽으로 간다.  몇주 후엔 폴락의 열애가 식고, 방황이 정리될 것으로 생각했다.

 

 

0000photo 3 (2)9.jpg 그린리버 묘지에서 크래스너(왼쪽부터), 드 쿠닝, 클라인.

 

 

그러나, 폴락은 클리그만과 그녀의 친구를 태우고 만취한 채 고속으로 운전하다가 나무와 충돌해 현장에서 사망했다. 집으로돌아온 크래스너는 폴락을 그린우드 리버에 묻었다. 친구 윌렘 드 쿠닝, 프란츠 클라인도 지켜봤다.

 

한편, 교통사고에서 살아남은 루스 클리그만은 리 크래스너 측을 상대로 교통사고 부상에 대한 10만 달러 피해보상 소송을 제기했다. 그리고, 1만 달러를 받아낸다.

 

이후 크래스너는 폴락의 작품을 뮤지엄에 팔고, 관리하면서 붓을 다시 잡았다. 침실에서 나와  폴락이 쓰던 외양간 스튜디오에서 그림을 다시 그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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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Krasner, Untitled, Gaea, 1966, Oil on canvas, 69" x 10' 5 1/2", The Museum of Modern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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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asner in the studio, 1969, at work on Portrait in Green. Photo: Mark Patiky

 

 

1965년 크래스너는 런던 화이트채플 갤러리와 1973년 휘트니뮤지엄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그리고, 화단에서 '잭슨 폴락의 부인'보다 '리 크래스너'로의 이름을 각인시킨다. 

 

1974년 '죽음의 자동차 소녀(death-car girl)'로 불리워온 폴락의 애인 루스 클리그만은 폴락과의 6개월간의 러브스토리를 회고록 ‘정사: 잭슨 폴락 회고록(Love Affairs: A Memoir of Jackson Pollack)’을 출간한다. 이에 대해 리 크래스너는 “다섯번의 섹스와 폴락'이 더 적합할 것이라고 조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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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클리그만은 자신이 슨 폴락의 유작 ‘Red, Black and Silver’을 갖고 있다고 주장해왔다. 24x20인치  크기의 이 그림은 붓을 놓았던 폴락이 1956년 7월 잔디 위에서 그녀에게 직접 그려준 ‘러브 레터’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1974년 출간한 회고록에는 밝히지 않았던 그림 이야기다. 리 크래스너가 관여했던 폴락 작품 감정위원회에서는 1996년 해산할 때까지 위작이라고 판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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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린리버 공동묘지의 폴락(1956, 위)과 크래스너(1984)의 무덤. Photo: Wikipedia

 

 

폴락 사망 후 독신으로 살았던 리 크래스너는 관절염을 앓다가 1984년 6월 19일 75세로 세상을 떠났다. 

남편 폴락을 묻은 그린리버 공동묘지 옆에 자신도 묻혔다. 묘비명엔 Lee Krasner Pollock이라고 붙여졌다.

 

lee9.jpg Lee Krasner

 

1983년 가을 휴스턴 뮤지엄에서는리 크래스너의 회고전을 시작했고, 크래스너는 오프닝에 참석했다. 

이 회고전은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SFMoMA), 크라이슬러뮤지엄, 피닉스미술관을 거쳐 마침내 MoMA까지 왔지만 볼 수 없었다. 크래스너가 숨을 거둔지 6개월 후였다. 

 

이전에 MoMA에서 여성작가의 회고전이 열린 것은 루이스 부르주아(1982)에 이어 두번째였다. 이후로 MoMA에선 헬렌 프랭켄탈러(1989), 엘리자베스 머레이(2004), 신디 셔만(2012) 회고전이 열렸다.

 

 

000photo 5 (44)08-500.jpg Pollock-Krasner House

 

리 크래스너 사망 이후 폴락과 살던 집은 폴락-크래스너 하우스 & 스터디 센터가 되었다. 

크래스너는 생전에 폴락-크래스너 재단(Pollock-Krasner Foundation)을 설립해 재정지원이 필요한 젊은 화가들을 지원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리 크래스너가 사망했을 때 재단의 자산은 2800만 달러에 이르렀다. 

 

1985년 폴락-크래스너 재단이 설립된 후 매년 100여명 이상의 신인작가들에게 200여만 달러의 그랜트를 수여해오고 있다. 지난해까지 이 재단은 76개국 작가 3966명에게 총 6100만 달러를 지원했다. 한인 미술가로는 조숙진, 진 신, 마종일, 곽선경, 신형섭, 박가혜, 안성민씨 등이 받았다. http://www.pkf.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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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의 리 크래스너.                                                                                 영화 '폴락'에서 크래스너로 분한 마샤 게이 하든.

 

 

1990년대 초 잭슨 폴락과 리 크래스너의 삶을 그린 영화 세편이 한꺼번에 경주를 벌였다.

 

1993년 로버트 드 니로와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주연으로 영화가 기획됐다. 로버트 드 니로의 부친이었던 추상표현주의 화가 로버트 드 니로 시니어가 폴락-크래스너와 친구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브루클린 출신 유대인 바브라 스트라이샌드가 리 크래스너 역을? 흥행이 더 잘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루스 클리그만의 1974년 회고록 '정사'를 원작으로 해롤드 베커 감독이 메거폰을 잡을 예정이었다. 주연은 '씨 오브 러브'에서 베커 감독의 콤비였던 알 파치노. 그러나, 무산됐다.
 
이즈음 에드 해리스도 퓰리처상 수상 전기  'Jackson Pollock: An American Saga'를 원작으로 영화를 준비했다. 그리고, 2000년에서야  자신이 주연, 감독한영화 ‘폴락(Pollack)’이 만들어졌다. 에드 해리스는 아카데미상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고, 리 크래스너 역을 한 마샤 게이 하든이 아카데미 여우 주연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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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락-크래스너 하우스&스터디센터 스튜디오에 전시 중인 크래스너의 신발과 미술도구.  http://sb.cc.stonybrook.edu/pkhouse

 

*천재 화가와 두 여인 <1> '미국의 반 고흐' 잭슨 폴락

*천재화가와 두 여인 <3> '뉴욕화단의 팜므 파탈' 루스 클리그만  

*천재화가와 두 여인 <4> 폴락-크래스너 하우스 

*에드워드 호퍼의 스튜디오 탐방, OHN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