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화가와 두 여인 <3> '뉴욕 화단의 팜므 파탈' 루스 클리그만
잭슨 폴락, 웰렘 드 쿠닝, 프란츠 클라인에서 앤디 워홀, 재스퍼 존스까지...
'뉴욕학파의 뮤즈(Muse)' 루스 클리그만
1956년 8월 11일 잭슨 폴락의 마지막 날 루스 클리그만과 함께.
존 레논과 사랑에 빠졌던 오노 요코는 '비틀즈를 해산시킨 여인'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 살아야 했다.
루스 클리그만(Ruth Kligman), 그녀는 1956년 잭슨 폴락이 자동차 사고로 44세에 운명을 다했을 때 살아남은 폴락의 마지막 애인이었다.
21세기 미국의 가장 위대한 화가, 추상표현주의의 선구자가 떠난 자리에 생존한 루스 클리그만도 화가였다.
하지만, 그녀의 재능은 그림보다 연애에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메트로폴리탄뮤지엄의 현대미술, 추상표현주의 갤러리. 왼쪽부터 윌렘 드 쿠닝, 재스퍼 존스, 프란츠 클라인의 작품. 루스 클리그만과 절친했던 화가들이다.
루스 클리그만은 폴락이 사망한 후 윌렘 드 쿠닝의 애인이 되었으며, 프란츠 클라인, 앤디 워홀, 재스퍼 존스, 어빙 펜, 로버트 메이플소프 등 당대의 작가들과 어울렸다.
루스 클리그만이 추상표현주의, 뉴욕학파에서 화가로서 살아남을 수는 없었을까?
화가라기 보다는 잭슨 폴락의 마지막 연인, 드 쿠닝의 애인이 더 자랑스러웠을지도 모를 루스 클리그만의 이야기.
'천재 화가와 두 여인' 시리즈 연재 순서
<1> '미국의 반 고흐' 잭슨 폴락 (1912-1956)
<2> 폴락의 구원자 리 크래스너 (1908-1984)
<3> 화단의 '팜므 파탈' 루스 클리그만 (1930-2010)
<4> 폴락-크래스너 하우스 & 스터디 센터
<5> 뉴욕 뮤지엄의 잭슨 폴락과 리 크래스너
'뉴욕학파의 팜므 파탈' 루스 클리그만 Ruth Kligman (1930-2010)
1950년대 루스 클리그만
루스 클리그만은 누구인가?
잭슨 폴락에겐 뮤즈(Muse)였고, 할리우드 필름 느와르로 치면 팜므 파탈(Femme Fatal), 치명적인 유혹녀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방불케하는 미모와 몸매의 루스 클리그만. 화가라기보다는 화단의 뮤즈(Muse)였던 여인.
2010년 3월 6일 뉴욕타임스에 실렸던 루스 클리그만의 부고 기사를 찾아봤다.
New York Times
2010. 3. 6.
루스 클리그만, 뮤즈이자 아티스트, 80세로 사망
Ruth Kligman, Muse and Artist, Dies at 80
루스 클리그만, 수십년간 미술세계의 모두를 알고, 모든 곳에 있었던 것처럼 보이는 추상화가, 1956년 잭슨 폴락을 사망케한 자동차 충돌사고의 유일한 생존자이며, 당시 그의 애인이 월요일 브롱스의 갈보리병원에서 사망했다. 그녀는 80세로 맨해튼에 살았다...
사진작가 어빙 펜(Irving Penn)과 로버트 메이플소프(Robert Mapplethorpe)가 그녀의 사진을 찍어주었고, 잭슨 사망 직후엔 웰렘 드 쿠닝의 애인이 되어 1957년 회화에 '루스의 조위(Ruth's Zowie)라는 제목을 붙였다. 앤디 워홀(Andy Warhol)도 자신의 일기장에 루스 클리그만에 대해 몇차례 언급했다.
클리그만은 워홀과 오랜 세월 동안 서로 무진장 반했었다고 회고록에 썼다. 또한 게이로 알려진 재스퍼 존스(Jasper Johns)와도 친했으며, 클리그만이 그에게 청혼했다. 역시 폴락의 친구였던 프란츠 클라인(Franz Kline)과는 14스트릿 스튜디오를 나누어 썼으며, 그가 사망한 후엔 그의 스튜디오 아파트에서 여생을 보냈다.
로버트 메이플소프의 루스 클리그만, 1972.
Untitled (Ruth Kligman), 1972, Robert Mapplethorpe. Gift of The Robert Mapplethorpe Foundation to the J. Paul Getty Trust and the Los Angeles County Museum of Art. © Robert Mapplethorpe Foundation.
루스 클리그만은 1930년 1월 25일 뉴왁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7살 때 베토벤 전기를 읽은 후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뉴욕으로 이주한 후 1958년부터 아트스튜던트리그, 뉴스쿨과 뉴욕대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1956년 폴락을 만났을 때 클리그만은 작은 갤러리에서 어씨스턴트로 일하던 중이었다. 26세의 클리그만은 음주벽을 버리지 못한 채 아내 리 크래스너와 냉각 관계에 들어간 44세의 폴락과 열정적인 관계에 들어간다.
폴락의 사망 후엔 윌렘 드쿠닝의 애인이 되어 쿠바, 이태리, 프랑스로 여행을 다녔다. 드 쿠닝은 폴락 사망 후에도 여전히 라이벌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드 쿠닝은 클리그만을 '그의 스폰지'라고 불렀다. 클리그만은 수없이 질문을 퍼부었으며, 뉴욕학파의 그림을 흡수했다.
클리그만은 스페인 화가 카를로스 산세군도와 7년간 결혼했으며, 산타페에서 살다가 뉴욕에 정착해 홀로 여생을 보냈다.
루스 클리그만은 1974년 출간한 ‘정사: 잭슨 폴락 회고록(Love Affairs: A Memoir of Jackson Pollock)’에서 폴락과의 관계를 낱낱이 털어놓았다. 회고록에서 클리그만은 "리 크래스만은 무시무시하고, 분노한 여인으로 폴락을 위협했다"고 썼다.
하지만, 실제로 폴락은 클리그만과 열애 중이었지만, 유럽으로 간 크래스너에게 매일 장미를 보내면서 용서를 구했다고.
리 크래스너는 이 회고록에 대해 “다섯번의 섹스와 폴락”이라는 제목이 더 적합할 것이라고 조롱했다.
교통사고 이후 루스 클리그만은 리 크래스너 측을 상대로 교통사고 부상에 대한 10만 달러 피해보상 소송을 제기했고, 1만 달러를 받아낸다.
영화 '폴락(Pollock, 2000)'에서 잭슨 폴락(에드 해리스 분)과 루스 클리그만(제니퍼 코넬리 분)의 마지막 날. 영화에선 클리그만이 마지막 10분간 정도에만 나오지만, 클리그만은 자신의 회고록 저작권 위반으로 소송을 제기했다.
루스 클리그만은 젊고, 아름답고, 야심만만한 화가였다.
갤러리에서 조수로 일하던 무명 화가 시절 루스 클리그만에게는 목표가 있었다. 당시 그녀는 미술계 친구에게 '지금 뉴욕에서 가장 잘 나가는 화가가 누구냐?'고 물었다.
친구의 대답은 #1. 잭슨 폴락 #2. 윌렘 드 쿠닝 #3. 프란츠 클라인. 그리고 이들이 잘 모이는 곳이 8스트릿의 시더 바(Cedar Bar)라고 알려준다.
#1 잭슨 폴락
이후 루스 클리그만은 붓을 놓고 있던 맨해튼에 정신상담을 받으러 다녔던 잭슨 폴락을 시더 바에서 만나 열애를 했다.
그리고, 폴락이 사망한 후엔 그의 라이벌이자 친구였던 윌렘 드 쿠닝과 6년간 연인이 되었다.
#2 윌렘 드 쿠닝
해변의 루스 클리그만과 윌렘 드 쿠닝. 1959. Photo: John Jonas Gruen
드 쿠닝은 1957년 그린 작품에 ‘루스의 조이(Ruth’s Zowie)’라는 제목을 붙이기도 했다.
일설에 따르면, 윌렘 드 쿠닝은 폴락 사망 이후 “이젠 내가 넘버 원이군”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폴락이 사망한 뉴욕 화단에서 드 쿠닝은 실제 '킹(King)'으로 등극했다.
윌렘 드 쿠닝의 'Ruth’s Zowie'(1957)
이후 클리그만은 폴락과 드쿠닝의 친구였던 추상화가 프란츠 클라인(Frantz Kline)과 맨해튼 14스트릿 스튜디오를 나누어 썼다. 1962년 클라인이 사망한 후엔 그의 아파트를 소유하게 됐다. 무슨 관계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1956년 폴락을 묻으면서. 리 크래스너, 드 쿠닝과 클라인.
그뿐인가? 동성연애자인 재스퍼 존스(Jasper Jones)에게 청혼한 대담한 여인도, 역시 게이로 알려진 앤디 워홀(Andy Warhol)에게 키스 세례를 하면서 친구가 된 여인도 루스 클리그만이었다.
사진작가 어빙 펜(Irving Penn)과 로버트 메이플토프(Robert Mapplethorpe)도 그녀를 카메라 앞에 세웠다.
이처럼 1950년대-60년대 뉴욕의 작가들은 루스 클리그만의 유혹을 즐겼던 듯 하다. 클리그만은 화가라기보다는 뮤즈(Muse), 혹은 팜므 파탈(Femme Fatal)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Red, Black and Silver
루스 클리그만이 다시 주목을 받은 것은 잭슨 폴락의 유작 ‘Red, Black and Silver’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면서다.
클리그만은 1956년 7월 폴락에게 "어떻게 그림을 그리는 지 보여달라"고 요청했으며, 이에 폴락은 클리그만이 보는 앞에서 폴락이 24x20인치 크기의 캔버스에 그려준 '러브 레터'라고 말했다.
그러나, 루스 클리그만이 1974년 폴락과의 관계를 낱낱히 밝힌 회고록에는 언급하지 않았던 그림 이야기다. 그러다가 1999년 회고록 'Love Affair'의 재판을 낼 때는 표지를 이 그림으로 바꾸었다.
갑자기 왜 폴락 그림이 튀어나왔을까? 클리그만의 한 그룹전에서 이 그림에 자신의 이름으로 출품했었다는 소문도 있다.
리 크래스너가 관여했던 폴락 작품 감정위원회에서는 1996년 해산할 때까지 이 그림에 퇴짜를 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크래스너가 미워했던 클리그만 소유의 유작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풍문도 있었다.
클리그만은 1984년 크래스너 사망 후 다시 유작이라며 경매에 내놓았다. 당시 그녀는 정어리 통조림에 의존하면서 가난하게 살고 있던 가난한 화가에 불과했다.
Photo: Mark Sink
클리그만은 진품 판명을 받지 못한 채 2010년 사망한다.
이후 클리그만의 유산 신탁위원회가 은퇴한 형사에게 감정을 의뢰했다. 형사는 범죄과학 CSI 기술을 이용, 그림에서 북극곰의 털이 폴락의 이스트햄턴 집에서 쓰던 북극곰 가죽 카페트와 같으며, 그림 위의 모래도 그 지역의 특유한 것이라면서 진품으로 결론짓게 된다. 이로써 진품 논쟁은 57년만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로써 클리그만 에스테이트는 횡재를 한 셈이다.
이와 같은 크기의 폴락 그림은 2012년 5월 소더비에서 5830만 달러에 낙찰된 바 있다. 미술 주식시장에서 주가를 폭등하게 만들 폴락의 유작을 필요로 했을까?
하지만, 잭슨 폴락의 그림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가짜가 많은 작품이기도 하다. 지난해엔 퀸즈에 사는 중국 출신 화가가 뉴욕 아트딜러와 짜고, 폴락의 위작을 그려내다가 덜미가 잡혔으니...
루스 클리그만은 재능있는 화가는 아니었다. 하지만, 유명 화가들의 연인으로 삶을 즐기다 갔다.
여성으로 추상표현주의의 마초 세계에서 살아남는 방법이었을까?
흥미로운 것은 리서치하다 보니 뉴욕스쿨, 추상표현주의의 대가들이 대부분 아버지와 문제가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잭슨 폴락(1912-1956)의 아버지는 어렸을 적 부모가 사망하면서 이웃에 입양됐으며, 알콜중독이었다가 잭슨이 8살 때 가정을 버렸다.
-프란츠 클라인(1910-1962)의 아버지는 7살 때 자살했고, 어머니는 3년 후 재혼했다.
-윌렘 드 쿠닝(1904-1997)은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태어나 부모가 3살 때 이혼했다.
-필립 거스톤(1913-1980)은 10살 때 자살한 아버지의 시체를 발견했고, 14살 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들은 모두 미술을 파리 중심에서 뉴욕으로 전환한 미 추상표현주의의 대가들이라는 것은 순전한 우연일까?
그들에게 그림은 아버지를 찾기위한 방황이자 안식처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천재 화가와 두 여인 <1> '미국의 반 고흐' 잭슨 폴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