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dern/Contemporary Artists
2015.05.23 11:42
롱아일랜드 이스트햄턴 폴락-크래스너 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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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슨 폴락과 리 크래스너의 보금자리 겸 작업실 속으로
추상표현주의의 요람: 폴락-크래스너 하우스 & 스터디 센터
롱아일랜드 이스트햄턴 스프링스에 자리한 폴락-크래스너 하우스. 1945년 결혼 후 5000불에 사들였다.
1945년 10월 서른셋의 잭슨 폴락과 서른일곱살의 리 크래스너는 맨해튼의 마블 칼리지에이트 처치(Marble Collegiate Church, 1 West 29th St.)에서 하객을 초대하지 않은 채 결혼식을 올린다.
리 크래스너와 잭슨 폴락. 1949 Photo: Wilfrid Zogbaum
폴락은 1933년부터 결혼할 때까지 빌리지(46 East 8th St.)의 스튜디오에서 작업했다.
이들은 결혼 후 작업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찾아 롱아일랜드 이스트햄턴으로 갔다. 그리고, 고요한 스프링스에 자리한 어부의 집(830 Springs-Fireplace Road)을 발견한다.
집 앞에 펼쳐진 아카보낙 하버(Acabonac Harbor)에선 조개도 캘 수 있다.
평화로운 호수가 드넓게 펼쳐진 작은 집. 그러나 1.56 에이커의 땅이다. 5000달러.
빈털털이였던 폴락은 후원자인 페기 구겐하임으로부터 2000달러를 지원받고, 이스트햄턴 뱅크에서 3000달러 모기지를 얻어 집을 사들인다.
결혼식을 올린 지 2주일 후인 11월 5일 폴락과 크래스너는 햄턴으로 이사간다. 몇 년 후 작품이 날개돋힌듯 할리면서 인근 땅을 사들이면서 부동산은 5에이커로 늘어났다.
거실의 테이블은 조립이 가능해서 크기를 조절할 수 있다. 폴락의 편지와 베티 파슨스 갤러리에서 판 폴락의 그림 가격 명세서가 전시 중.
사실 폴락과 크래스너가 이스트햄턴에 둥지를 튼 첫 화가들은 아니었다.
1870년대 윈슬로우 호머와 토마스 모란이 햄턴에서 작업을 했으며, 1930년대부터는 주로 유럽에서 미국으로 온 화가들이 햄턴의 아름다운 풍경에 매료됐다.
1962년 7월 4일 이스트햄턴 비치에 모여든 화가들... Photo: Hans Namuth
이즈음 페르낭 레제, 앙드레 브레통, 마르셸 뒤샹, 막스 에른스트가 몰려왔다.
이후로는 애쉴리 고르키, 이사무 노구치, 프레데릭 카이슬러, 마크 로스코, 로버트 마더웰 등 아티스트들과 컬렉터들이 정착해서 작업하기 시작하면서 이스트햄턴에 화가촌이 형성됐다.
월척 생선을 일본식 판화기법으로 제작한 후 요리를 해먹었을 것으로 상상된다. 리 크래스너의 Spider Plant($5)도 판매한다.
2층의 부부침실에는 크래스너가 수집했던 조개 껍질이 진열되어 있다. 크래스너의 전 애인이 그려준 초상화도 전시되어 있다.
크래스너가 작업실로 쓰던 작은 침실
1945년 겨울은 따뜻하지 않았다. 이 집에는 중앙난방도 실내 수도시설조차 없었다. 화장실도 집 밖에 있었다.
폴락은 외양간을 고쳐서 작업실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듬해 이 스튜디오에선 추상표현주의의 획을 그을 액션 페인팅이 탄생하게 된다.
액션 페인팅, 추상표현주의의 요람이 된 외양간 스튜디오. 폴락 사망 후엔 크래스너가 작업실로 썼다.
재즈의 즉흥성을 좋아했던 폴락. 루이 암스트롱, 듀크 엘링턴, 빌리 할러데이 등 폴락의 재즈 컬렉션 CD를 구입할 수 있다.
한편, 큐비즘에 매료되었던 리 크래스너는 부부침실 옆의 작은 침실을 작업 공간으로 썼다.
폴락이 외양간 스튜디오에서 액션 페인팅을 '발견'하게 된 것과는 달리 크래스너는 작은 침실에서 간간이 작업을 했다.
시가 박스에 담긴 화구들과 해골 형상. 잭슨 폴락이 작업하던 도구들이다.
1946년 페기 구겐하임은 초현실주의 화가인 남편 막스 에른스트와 결별하면서 유럽으로 떠난다.
구겐하임은 폴락을 뉴욕 아트딜러 베티 파슨스(Betty Parsons)에게 넘겨주었다. 이즈음 가장 왕성한 창작기를 보내던 폴락은 1949년 12월 베티 파슨스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성공적으로 열었다.
1948-49년 베티 파슨스 갤러리가 판매한 폴락의 그림값 기록부. 위는 폴락이 파슨스에게 쓴 편지.
폴락-크래스너 하우스엔 당시 베티 파슨스가 폴락의 작품 판매가격 명세서가 전시되어 있다. 비싼 No. 8은 1500달러, 대부분의 그림은 300-500달러 수준이었다. 폴락이 베티 파슨스에게 보낸 편지도 볼 수 있다. 폴락은 작품 판매 수입이 들어오면서 비로소 수도관을 집 안에 설치하고, 난방시설도 마련했다.
그러나, 이즈음 폴락은 슬럼프에 빠지게 된다.
추상표현주의를 버리고, 구상에 들어가면서 음주벽에 빠진 폴락은 맨해튼으로 정신치료를 받으러 다녔다. 그리고, 당시 뉴욕학파들의 아지트였던 시더 태번에서 문닫을 때까지 술을 마시다가 싸움질을 했다. 필립 거스톤은 폴락으로부터 폭행까지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크래스너가 떠난 집 앞 바윗돌에서 폴락과 클리그만.
그리고, 폴락은 '팜므 파탈' 루스 클리그만을 만났고, 크래스너는 유럽으로 도피한다. 1956년 8월 11일 폴락은 클리그만과 그녀의 미용실 친구를 태우고 음주운전하다가 집에서 1마일도 채 떨어지지 않는 길가의 나무를 받아 즉사하고 만다.
덧버선을 신고 관람해야 하는 외양간 스튜디오. 맨발도 금지.
크래스너는 친구인 윌렘 드 쿠닝, 프란츠 클라인과 함께 폴락을 이웃 그린리버 묘지에 묻은 후 폴락이 쓰던 작업실에서 빅 스케일의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크래스너의 걸작으로 꼽히는 '가에야(Gaea, MoMA 소장), '사이렌(Siren, 워싱턴 DC 허쉬혼뮤지엄 소장)' 등이 탄생하게 된다.
리 크래스너가 신던 부츠와 화구들.
폴락은 담배를 바닥에 캔버스를 깔고, 담배를 입에 문 채 페인트를 뿌리고, 붓을 대지 않으면서 그림을 그렸다. 그 흔적들.
1953년 폴락은 작업실 월동준비를 위해 형이 가져다준 나무 야구 게임판을 마룻바닥에 깔았다.
훗날 이 바닥을 드러내면서 폴락의 명작 '가을 리듬(Autumn Rhythm, )'(메트로폴리탄뮤지엄 소장), 집합점(Convergence, Albright-Knox Art Gallery 소장), '블루 폴(Blue Poles, 호주 내셔널 갤러리 소장), '라벤더 미스트(Lavender Mist, 워싱턴 DC 내셔널갤러리 소장)' 작업의 흔적을 발견했다.
사망 1년 전 리 크래스너. Photo: Hans Namuth
1982년 크래스너의 건강은 쇠약했고, 1984년 뉴욕 병원에서 생을 마감한다.
크래스너는 자신과 폴락이 사랑하고, 작업하던 집을 공공 뮤지엄 겸 도서관으로 만들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1987년 스프링스의 집은 스토니 브룩 재단(Stony Brook Foundation)에 귀속되었고, 1988년 6월 뮤지엄으로 개관하게 된다.
1994년 폴락-크래스너 하우스는 미 랜드마크로 지정됐다. http://sb.cc.stonybrook.edu/pkhouse
스튜디오에선 신발 벗으시고, 덧버선 신어주세요. 맨발도 안됩니다.
Hours
개관: 5월-10월 목요일/금요일/토요일(*예약 필수). 일-수요일 폐관
가이드 투어: 오전 11시-오후 4시까지(*1시간)
입장료: $10(성인) $5 (어린이)
예약: 631-324-4929
POLLOCK-KRASNER HOUSE
830 Springs-Fireplace Road
East Hampton, NY 11937-1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