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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6) 홍영혜: 마른 갈대와 숨어 우는 바람소리
빨간 등대 (44) 피어몬트 갈대밭 Piermont Marsh
마른 갈대와 숨어 우는 바람소리
Athena S. Kim, Piermont from Mt. Tallman State Park, 2021, oil on linen board
가을에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데 딱히 갈 곳이 떠오르질 않는다. 마음을 잘 다스리지 못하고, 분노, 원망, 불신, 외로움, 가고 싶지 않은 시베리아 노선으로 달리고 있었다. 나를 자제하고, 잡아 주던 탄탄한 고무줄이 이제는 다 낡고 늘어져 작동하지 않는 걸까? 이럴 때 처방전은 무엇일까? 아마도 나에겐 자연 속에서 걷고 헤매고, 얼마 동안 그러다 보면 상한 마음이 추스러지고, 사랑받는 존재라고 보듬어주는 하나님의 품을 느끼지 않을까?
뉴저지 식물원에 벚꽃 필 때 만났던 화가 아테나(Athena)가 이즈음 연락을 했다. 뉴욕주 피어몬트(Piermont)에서 그림을 그리는데, 톨맨 마운틴 주립공원 (Tallman Mountain State Park)안에 Sawmill Picnic Area(소밀 피크닉 에어리어)에서 내려다 보는 갈대밭(Piermont Marsh)과 피어 (Pier)의 풍광이 백미라고.
“갈대밭?” 마음이 동해서 액셀러레이터를 밟고 클래식 FM을 크게 틀고 피어몬트로 달렸다. 사실 마음 속으로만 달렸지, 주말 맨해튼 트래픽은 거북이 걸음이다. 조지 워싱턴 브리지를 지나 팰리세이즈 파크웨이로 들어서니, 그제야 차가 달리면서 숨통이 트인다. 초행길이어서 어디에 주차를 해야 하는지, 허용이 안되는 곳은 왜 이리 많은지 결국 텅텅 비어있는 “Permit Only” 에 주차해 놓고 잠깐 살펴본다고 하는 것이 …
피어몬트(Piermont)는 뉴욕과 뉴저지의 경계선에 마리오 코모 브리지 (Mario Cuomo Bridge, 옛 Tappan Zee Bridge) 남서쪽에 위치한 자그마한 마을이다. 지형이 허드슨강 쪽으로 뛰쳐나오고, 거기에다 1마일이나 가늘고 길게 뻗은 피어가 허드슨강을 호수처럼 느끼게 하는 360도의 파노라믹 뷰를 연출한다. 보는 순간 가슴이 뻥 뚫린다. 커피숍, 아기자기한 가게들, 괜찮은 음식점들, 갤러리들로 주말엔 꽤 붐빈다.
북쪽으로 정박한 보트들이 보이고 동쪽으로 뻗은 강변길 (North Shore Walkway)로 컨도미니엄을 지나 피어까지 이어진다. 낚시꾼들이 드리운 낚싯대 너머로 물새들이 군데군데 앉아 있다. 한 젊은 동양 여인이 다소곳이 벤치에 앉아 조그만 도화지에 스케치하고 있다. 자신을 건강하게 다스리는 것 같아 보기 좋다. “아, 저기 물수리(Osprey)!”라고 누군가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마른 갈대
노구치 우조
나는 개천의 마른 갈대
똑같이 너도 마른 갈대
어차피 둘이는 이 세상에서
꽃을 피울 수 없는 마른 갈대
かれすすき(枯れ芒)
己は 河原の 枯れ芒 오레와 카와하라노 카레스스키
同じ お前も 枯れ芒 오나지 오마에모 카레스스키
どう せ二人は この世では 도우세 후타리와 고노요데와
花の 咲かない 枯れ芒 하나노 사카나이 카레스스키
船頭小唄, 1921
作詞: 野口雨情/作曲: 中山晋平
https://www.youtube.com/watch?v=FOj80muZGY4
갈대밭 주위를 걸으면서 아버지 생각이 난다. 아버지가 갈대밭을 좋아하셔서, 3년 전 가을 한국에 갔을 때 함께 난지도 하늘 공원을 걸었다. 바람이 불어 갈대가 휘어지는 싸늘한 날이었다. 아버지는 일본 유학시절 좋아하셨던 시 ‘마른 갈대’를 낭송하시고, 한국말로 풀이해주셨다. 짧은 시여서 함께 따라 읊으면서 갈대밭을 돌았었다.
Athena S. Kim, Piermont Marsh, 2021. Top left: view from Sawmill Picnic Area, Tallman Mountain State Park (oil on linen board), Top right: view from Long Path, Tallman Mountain State Park (oil on paper), Bottom: view from Marsh Point (oil on paper)
피어의 남쪽으로는 1,000 에이커도 넘는 갈대 습지가 펼쳐있다. 피어몬트 습지는 짠물이 들어오는 허드슨 강어귀에 남아있는 다섯 군데 습지 중 하나라고 한다. 갈대는 오염된 강물을 정화하는 필터 역할을 하여, Atlantic Sturgeon 처럼 사라져가는 물고기들의 서식지가 되고 새들의 은신처가 된다. “바람에 흔들리는 연약한 갈대”, “상한 갈대”가 아니라 환경, 생태계에 도움을 주는 “강인한 갈대”임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
피어와 갈대밭을 한참 동안 헤매다가 그제야 “아 파킹!”하고 정신을 차렸다. 차로 오는데 티켓이 하나 얹혀 있었다. 조그만 마을이니 얼마나 하랴했는데, 120불이나 되었다. 그 옆에는 기간 내에 내지 않으면 500불 정도를 내야된다는 협박도 쓰여 있었다. 값비싼 수업료를 톡톡히 치루고 “D 파킹랏!”이란 교훈을 얻었다.
Athena S. Kim, Waterfront, Piermont, 2021, Oil on linen board
PS 1. “카레스스키(枯れ芒)” 시를 기억해내고, 시의 배경을 찾는데는 아버지, 오빠, 나 그리고 일어에 능한 조카 혜엽이 3대가 힘을 모았다. 당대 일본에서 3대 시인으로 꼽히고, 동요, 민요 작사가인, 노구치 우조(野口雨情/ Ujō Noguchi, 1882-1945)가 이 시를 썼다. ‘카레스스키’로 처음 알려진 이 시는 일본 가요 “뱃사공의 노래(船頭小唄, 1921)”의 첫 소절이기도 하다. 아버지와 추억은 사과밭과 함께, 갈대밭도 깊어가는 가을 기억할 것 같다. 난지도 하늘 공원은 억새밭인데 아버지와 나에겐 갈대밭이다.
PS 2. 이 글을 쓰다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 오래전 가라오케를 하면 고역이라 18번을 하나 골라 연습해야지 하고 물망에 올랐던 곡인데 어려워 포기하였다. 이정옥의 ‘숨어 우는 바람 소리’ 배경 장면이 피어몬트 갈대밭과 흡사하다.
홍영혜/가족 상담가
2007년, 40대에 미국에 이민와 우여곡절 끝에 서양화를 하게 되었다. 고전 회화의 대가 및 Hudson River School 화풍에 영감을 받고, 겸재 정선을 흠모한다. 북부 뉴저지에서 풍경, 정물, 인물 등 실제 대상을 소재로 연필 소묘와 유화를 즐긴다.
홍영혜씨의 아버님과 갈대밭을 거닐은 그윽한 추억이 아름답습니디. 저도 갈대밭을 걷고싶은데 누구와 같이? 에서는 답이 없고 그냥 슬퍼집니다.
-Ela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