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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t Mondrian:Jazz & Dance 

피트 몬드리안 탄생 150주년 

 

"재즈와 신조형주의는 고도로 혁명적인 현상이다. 그것들은 파괴적인 건설성이 특징이다. 그들은 형식의 실제 내용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새로운 질서로 끌어올리기 위해 형태를 심화한다. 그들은 보편적인 통합을 가능토록 하기 위해 개별적인 형태의 유대를 깨트린다."

-피트 몬드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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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t Mondrian,    / Evening; Red Tree (Avond; De rode boom), 1908–1910, Gemeentemuseum Den Haag 

 

수평선, 수직선과 빨강, 파랑, 노랑색의 격자로 그림을 단순화한 네덜란드 화가 피트 몬드리안(Piet Mondrian, 1872-1944)은 러시아 출신 바실리 칸딘스키(Vasily Kandinsky, 1866-1944)와 함께 추상미술의 선구자, 쌍두마차였다. 유부남 칸딘스키는 독일화가 가브리엘 뮌터와 청기사그룹을 결성하고 결혼을 약속했다가 결별 후 러시아로 돌아가 32세 연하의 여인과 결혼했다. 한편, 몬드리안은 평생 독신이었다. 그는 "젊어서는 가난해서, 나이 들어서는 맞는 여성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몬드리안은 57세에 이르러 네덜란드 시인 돕 블레스의 딸 릴리(19세)와 3년간 사귀다가 헤어졌다.  

 

몬드리안과 6살 연상의 칸딘스키는 1944년 같은 해 세상을 떠났다. 몬드리안은 그해 2월 뉴욕에서 폐렴으로, 칸딘스키는 1944년 12월 파리 근교 뇌이쉬르센에서 사망했다. 동시대 화가 몬드리안과 칸딘스키는 만났을까? 칸딘스키는 1930년대 중반 독일을 떠나  파리 근교의 뇌이쉬르센느에 정착한 후 호안 미로(Joan Miró), 로버트 들로네(Robert Delaunay), 그리고 몬드리안과도 교류한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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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t Mondrian, Composition in White, Black, and Red, Paris 1936. Museum of Modern Art #512

 

직선과 미니멀 원색 컬러의 그림과 독신자의 삶을 보아서는 몬드리안이 기계적이며, 무감정의 금욕적인 은둔자라는 선입견을 갖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다. 피트 몬드리안은 난독증이 있었으며, 1918년 스페인 독감에 걸려 죽을 뻔했다. 그후로 쾌락주의자가 되었을까? 몬드리안은 자전거광이자 춤꾼이었으며, 재즈광으로 뉴욕에서 말년을 보냈다. 그리고, 브루클린에 묻혔다. 

 

피트 몬드리안의 탄생 150주년을 기념 네덜란드 헤이그의 쿤스트뮤지엄(Kunstmuseum den Haag)에선 특별전 '몬드리안 무브(Mondrian Moves/ Rondom Mondriaan, 4/2-9/25)이 열리고 있다. 전시 큐레이터 카로 버빅(Caro Verbeek)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몬드리안은 비주얼 아티스트가 아니라 작곡가였다고 말할 수 있다"고 전했다. 그리고, 몬드리안의 작품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의 그림 앞에서 춤 추는 것"이라고 말했다. 버빅은 "몬드리안이 일종의 영적인 흥분을 유발할 수 있는 다이나믹한 감각적 경험을 갈구했으며, 균형감각을 추구했으며, 시각미술은 그림 뒤에 숨겨진 무엇으로 가는 관문일 뿐"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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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position II in Red, Blue, and Yellow, 1930, Kunsthaus Zürich/ Yves Saint Laurent, Dress, fall/winter 1965–66.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1872년 네덜란드 유트레히트의 아메르스포르트에서 태어난 몬드리안은 어릴 적 미술 교사였던 아버지와 화가 삼촌으로부터 그림을 배웠다. 엄격한 개신교 가정에서 자란 그는 아버지를 따라 교사 자격증을 땄으며, 암스테르담미술아카데미에서 수학했다. 처음엔 반 고흐의 스타일의 목가적인 전원 풍경화를 따르다가 후기인상주의, 점묘파, 야수파를 시도했다. 

 

몬드리안은 1911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입체파를 접하면서 파리로 이주해 나무 등 풍경을 추상화하기 시작했다. 네덜란드로 귀국한 후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 발발하자 모국에 남아 수직, 수평선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917년 동료 화가들과 더 스테일(De Stijl, 신조형주의) 그룹을 결성하고, 잡지를 창간했다. 이들은 수직, 수평선, 원색, 무채색으로 그림을 기하학적으로 단순화함으로써 진리와 근원, 유토피아라는 정신적인 세계를 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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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t Mondrian, Evening Red Tree, 1908-10 

 

1918년 전쟁이 끝나자 몬드리안은 다시 파리로 가서 데카당트한 문화에 빠졌다. 몬드리안은 시끌벅적한 음악과 재즈, 그리고 춤을 사랑했으며, 나이트 클럽을 열심히 드나들었다. 1925년 파리에서 미국인 흑인여성 댄서/가수였던 조세핀 베이커(Josephine Baker, 1906-1975)의 데뷔 공연에도 찾아갔다. 

 

그는 파리에서 초기 전자음악에도 심취했었다. 1921년 미래파 루이지 루쏠로(Luigi Russolo)가 파리에서 소음기계(Intonarumori)를 시연했을 때 문드리안은 친구인 댄서이자 아방가르드 뮤지션 넬리 반 도에스버그에게 전자음악장치를 만들고 싶었다는 편지를 쓴 것으로 전해진다. 몬드리안은 1922년 미술 잡지 '스타일(De Stijl)과 바우하우스에 "신조형주의: 음악과 미래연극에서의 그 실현"을 주제로 칼럼을 기고했다. 

 

파리의 무명화가 시절 몬드리안은 웨이터나 포도나 올리브 따는 일도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그는 스튜디오를 삼원색과 무채색, 사각형 보드로 꾸민 후 20년간 작업했다. 1919년 첫 격자 그림을 그렸으며, 1920년대 수직, 수평선과 삼원색의 미니멀 캔버스- 몬드리안의 스타일은 성숙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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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t Mondrian, Tableau I: Lozenge with Four Lines and Gray, 1926 (left)/ Composition No. II, with Red and Blue, 1929. Museum of Modern Art #512

 

1926년 마르셀 뒤샹, 만 레이와 함께 뉴욕독립미술가협회(New York Society of Independent Artists)를 창립한 화가 겸 후원자 캐서린 드라이어(Katherine Dreier)가 몬드리안을 찾아와 마름모꼴/다이아몬드 패턴의 그림 'Painting I'을 구입, 브루클린뮤지엄 전시에 소개했다. 드라이어는 카탈로그에 "네덜란드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 첫째는 렘브란트, 두번째는 반 고흐, 세번째는 몬드리안"이라고 썼다. 

 

1938년 가을 몬드리안은 파시즘을 피해 런던으로 이주했다. 1940년 네덜란드와 파리가 함락되자 몬드리안은 리버풀에서 배를 타고 10일간 항해 끝에 뉴욕에 정착했다. 그의 나이 68세였다. 몬드리안은 친구 해리 홀츠만(harry Holtsman)의 도움으로 미드타운(353 East 56th St.)에 보금자리를 만들고, 바로 미추상화가협회에 들어가 화가들과 교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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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t Mondrian, Broadway Boogie Woogie, 1942-43. Museum of Modern Art #512

 

그 시절 손에 물집이 생길 때까지 그림을 그리면서 우울증에 걸리기도 했다. 음악은 그의 해방구였을까? 몬드리안은 당시 뉴욕에서 유행하던 비밥 재즈에 심취했다. 당시 음악에 영감을 받아 그린 'Broadway Woogie Woogie'(1942-1943, MoMA 소장)는 1930대 미국에서 유행했던 빠른 템포의 블루스, 부기우기의 리듬에 즉흥성과 도시의 생동감과 조화를 융합한 작품으로 추상기하학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몬드리안은 열혈 재즈팬이었으며, 자신의 스튜디오를 찾아오는 이들에게 축음기를 틀어주었다고 한다. 추상표현주의 화가 잭슨 폴락(Jackson Pollock, 1912-1956)의 부인이었던 화가 리 크래스너(Lee Krasner, 1908-1984)와도 춤을 추었다. 크래스너는 몬드리안이 "광란의 댄서로 항상 새로운 스텝을 만들어내서 함께 춤추기가 어려웠다"고 술회했다. 

 

몬드리안은 평생 댄스 교습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가 특히 좋아했던 것은 찰스턴(Charleston) 댄스였다. 1923년 재즈 뮤지션 제임스 P. 존슨(James P. Johnson)이 작곡한 'The Charleston'으로 시작되어 세계적으로 유행한 스윙댄스. 몬드리안은 재즈와 시각적이면서 리드미컬한 측면에 끌렸다. 하지만, 당시 찰스턴은 부도덕하며, 음탕하고, 노골적으로 섹슈얼한 춤으로 보는 시각이 주류였다. 1926년 네덜란드에선 찰스턴춤 금지령이 내려졌고, 몬드리안은 이 때문에 귀국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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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drian Moves, Kunstmuseum den Haag

https://www.kunstmuseum.nl/en/exhibitions/mondrian-moves

 

몬드리안은  1943년 10월 맨해튼 미드타운 59스트릿(15 East 59th St.)에서 살며 걸작 'Victory Boogie Woogie'를 그리고 있었다. 그는 1944년 2월 1일 폐렴으로 사망했으며, 브루클린 사이프레스 힐(Cypress Hills) 묘지에 묻혔다. 렉싱턴애브뉴 유니버설 채플에서 열린 추모식에는 마크 샤갈, 마르셀 뒤샹, 알렉산더 칼더, 로버트 마더웰 등 200여명이 참석했다.  

 

몬드리안은 뉴욕의 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 미니멀리즘(Minimalism), 색면화(Color Field paintings)에 영향을 주게 된다. 몬드리안은 모더니즘의 대명사였다. 

 

 

*헤이그 시청, 몬드리안과 '더 스테일'에 오마쥬, 2017

http://www.nyculturebeat.com/?document_srl=3542667&mid=Art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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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ukie 2022.07.25 23:06
    피트 몬드리안을 잘읽었습니다. 재즈와 춤과 자전거 광이 었다니, 언제 그림을 그렸나 의심스럽습니다.어떤 그림은기하학적으로 배치돼 있어서 다른 물체가 들어갈 틈이 없어보입니다. 레고(Lego)를 배치한 듯해 보이기도 해요. 그런데 red tree는 나무가 정열적으로 춤을 추는 느낌이 었습니다. 칸딘스키와 함께 추상미술의 선구자라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저에게 추상미술은 이해하는데 시간이 걸리는데 몬드리안의 그림은 이해가 쉽게 되는 것 같아요. 노랑 빨강 파랑색이 확 눈에 들어와서 눈에 익히네요. 회가 중에서 춤과 째즈광이 있었다는게 흥미있네요. 몬드리안이 춤을 추는 사진도 부드러움을 느낄 수 없네요. 두 손을 정확하게 배치해서 춤을 추는 모습이 딱딱하기만 해보입니다.
    -Ela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