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디자이너로서 앤디 워홀과 그의 인생@모건라이브러리(2/5-5/15)
*모건 라이브러리가 렌조 피아노의 설계로 뮤지엄 확장 10주년을 기념해 4월 15일부터 17일까지 무료로 개방한다.
http://www.nyculturebeat.com/?mid=CulBeatExpress&document_srl=3438702
앤디 워홀과 북 디자인
Warhol by the Book
February 5-May 15, 2016
@Morgan Library & Museum
Ed. by Andy Warhol, Kasper König, Pontus Hulten et al. Stockholm: Moderna Museet, 1968, [reprint, 1970], Collection of Dr. Bruce Nerenberg
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1928-1987)은 광고 디자이너였다. 캠벨 수프와 마릴린 먼로같은 스타의 복제에 매료되기 이전 일러스트레이터로서 도서 디자인을 즐겼다.
2월 19일부터 5월 15일까지 모건 라이브러리 & 뮤지엄에서 열리고 있는 'Warhol by the Book'은 북 디자이너로서 앤디 워홀의 세계를 조명한다. 전시품은 피츠버그의 앤디워홀 뮤지엄에서 온 학생 시절 작품을 비롯, 드로잉, 판화, 사진, 자가 출판 도서, 동화책, 편지 등 130여점을 소개하고 있다.
Highlight from Warhol by the Book & His Words
In the Bottom of My Garden, New York: the artist, ca. 1956, The Andy Warhol Museum
“아티스트란 사람들이 가질 필요가 없는 것들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다.”
"So Sweet", 1950s, ink, stamped ink, graphite, and Dr. Martin's Aniline dye on paper, The Andy Warhol Museum
"미국의 위대한 점은 가장 부유한 소비자도 가장 가난한 사람과 기본적으로 같은 것을 산다는 것에 있다. 당신은 TV를 보면서 코카콜라를 본다. 이 나라의 대통령과 엘리자베스 테일러도 코카콜라를 마시는 것을 안다. 그리고, 생각해보라. 콜라는 콜라이며, 아무리 돈을 더 준다고 해도 거리 구석에서 거지가 마시는 콜라보다 더 좋은 콜라를 살 수는 없다. 모든 콜라는 같고, 모든 콜라는 좋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도, 대통령도, 거지도, 당신도 그것을 안다.”
Three More Novels of Ronald Firbank: Vainglory; Inclinations; Caprice, by Ronald Firbank, New York: New Directions, 1951, The Andy Warhol Museum
“난 항상 죽기를 바랬다. 그리고, 난 아직도 바라고 있다. 왜냐하면, 난 모든 것을 다시 해보고 싶기 때문이다.”
“난 항상 나 자신의 묘비에 아무 것도 써있지 않기를 바랬다. 이름 조차도. 아, 사실, 난 ‘허구’라고 남기고 싶다.”
Marilyn, 1967, Screen print on paper, The Andy Warhol Museum, Pittsburgh
“난 LA를 사랑한다. 할리우드도 사랑한다. 그들은 아름답다. 모두가 성형적이지만, 난 성형을 좋아한다. 나도 성형하고 싶다."
“다시 태어나서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손가락에 낀 커다란 반지가 된다면 황홀하겠다.”
Flash—November 22, 1963, Text by Phillip Greer, Briarcliff Manor, N.Y. : Racolin Press, 1968, Spencer Collection, The New York Public Library, Astor, Tilden and Lenox Foundations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사진이란, 초점이 맞아야 하며, 유명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15분간 유명해질 것이다.”
Illustration for “Leroy,” 1948–1949, Ink, tempera, and graphite on board, The Andy Warhol Museum
“당신이 앤디 워홀에 대해 모두 알고 싶다면, 내 그림과 영화, 그리고 나의 표면을 보기만 하라. 거기에 내가 있다. 뒤엔 아무 것도 없다.”
Edward Wallowitch (1932–1981), Young Man Smoking a Cigarette, ca. 1956, Gelatin silver print, The Andy Warhol Museum/ A Gold Book, New York: the artist, 1957, Williams College Museum of Art
“환상 속의 사랑은 실제 사랑보다 훨씬 낫다. 한번도 그걸 하지 않는 것은 흥분된다. 가장 흥분되는 매력은 양쪽이 절대로 만나지 않는 것에 있다.”
“인생이란, 각자가 반복하면서 변화하는 이미지의 시리즈가 아니던가?”
a: A Novel, New York: Grove Press, 1968, The Andy Warhol Museum
“난 심오하게 피상적인 인간이다.”
“난 10-15명의 사람들에게 무언가 제안하라고 물었다. 마침내 한 나이 든 여성이 바른 질문을 했다. “당신은 무엇을 가장 사랑하지요?” 그래서 난 돈을 그리기 시작했다.”
Andy Warhol's Exposures, Text by Bob Colacello and Andy Warhol, New York: Grosset & Dunlap, 1979, The Andy Warhol Museum
"사업 수완이 좋다는 것은 가장 매혹적인 종류의 예술이다. 돈 버는 것은 예술이며, 일하는 것도 예술이며, 사업 잘하는 것은 최고의 예술이다.”
☞Andy Warhol(1928-87): A Life
▶피부병과 고독: 펜실베이니아 피츠버그의 슬로바키아 이민자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안드레이 바촐라 주니어(Andrej Varchola, Jr.). 초등학교 시절 성홍열 후유증으로 인한 신경증세로 피부병이 생겼다. 이와 함께 소년기 우울증으로 병원과 의사를 기피했고, 학교에서도 왕따 당해 엄마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광부였던 아버지는 워홀이 13살 때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소년 앤디는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서 라디오를 들으면서 영화배우 사진을 수집해 방을 꾸몄다.
▶그래픽 디자인: 10대 때 난독증으로 공부보다 미술에 관심을 가진 후 미술교사가 되기 위해 카네기인스티튜트오브테크놀로지(현 카네기멜론대학교)에 입학한다. 그래픽디자인을 전공하면서 상업 일러스트레이터로 전향했다.
▶뉴욕에 오다: 1949년, 스물한살의 소심한 청년 워홀은 뉴욕에 왔다. 잡지 삽화가와 광고 디자이너로 일한 후 구두 잡지에 그린 잉크 드로잉으로 유명해진다. RCA 레코드사에 취직해서 앨범 커버와 판촉물을 디자인하면서 실크 스크린 판화법을 배웠다.
“당신이 무언가를 정말 잘못하면, 당신은 항상 대단한 것이 된다.”
16mm 영화 '엠파이어'(1964)
▶팝아트 시대의 개막: 1962년 뉴욕 보들리갤러리에서 데뷔 개인전을 열었으며, 같은 해 11월 스테이블갤러리에서 팝아트 전시회를 열었다. 이 전시에서 마릴린 먼로, 100개의 수프 캔, 100개의 코카콜라병, 100개의 달러화를 선보였다. 1962년 MoMA에서 팝아트에 관한 심포지엄을 주관했다.
1963년엔 시인 존 지오르노의 잠자는 모습을 담은 영화 ‘잠(Sleep)’과 3시간 5분 동안 빌딩을 보여준 '엠파이어(Empire)'를 만들었다. 유명인사들과 신문에서 소재를 구하며 작업하던 워홀은 작업실 ‘팩토리(The Factory)’를 설립하고, 화가, 작가, 뮤지션, 언더그라운드 유명인사들과 교제했다. 그의 팝아트는 인기를 얻었지만, 비판도 거셌다.
'Green Coca-Cola Bottles'(1962)와 'Big Campbell's Soup Can, Beef Noodle'(1962). 2012년 메트뮤지엄 특별전 'Regarding Warhol'에서.
▶갤러리에 수퍼마켓: 1964년 워홀은 5명의 팝아티스트들과 함께 ‘미국의 수퍼마켓(The American Supermarket)’라는 타이틀의 그룹전에서, 식료품, 깡통 식품, 육류, 포스터 등 전형적인 미국의 작은 수퍼마켓 물품을 갤러리에 설치했다. 워홀은 이 전시에서 캠벨 토마토 수프 그림을 전시했다. 이 전시는 ‘무엇이 미술이며, 무엇이 미술이 아닌가’의 논쟁을 촉발시킨다.
▶살해 미수: 1968년 팩토리에 드나들던 무명의 페미니스트 작가 발레리 솔라나스가 워홀과 큐레이터 마리오 아마야를 총으로 쏘았다. 워홀은 부상을 입었지만, 죽을 때까지 살해미수 후유증에 시달린 것으로 전해진다. 이 사건을 옮긴 영화가 마리 헤론 감독, 릴리 테일러 주연의 '나는 앤디 워홀을 쏘았다(I Shot Andy Warhol, 1996)'이다.
▶유명인사 초상화: 70년대 워홀은 믹 재거, 라이자 미넬리, 존 레논, 브리짓 바르도, 마이클 잭슨, 다이애나 로스, 마오 저뚱 등의 초상화 작업을 했다. 1973년엔 잡지 ‘인터뷰’를 창간했으며, 2년 후엔 ‘앤디 워홀의 철학(The Philosophy of Andy Warhol)’을 출간했다.
▶장사꾼 아티스트: 80년대 장 미셸 바스퀴아, 줄리안 슈나벨 등 신추상주의 화가들과 어울리면서 워홀의 인기는 다시 정점에 이른다. 유명인사들의 초상화 전시회를 하자 ‘피상적이고, 경박하며, 상업적인 장사꾼 아티스트’라는 비판을 받았다.
▶마지막 숨결: 워홀은 1987년 2월 22일 쓸개 수술 후유증으로 수면 도중 사망했다. 피츠버그의 카톨릭교회 묘지에 잠들어 있는 워홀의 마지막 모습은 검은색 캐쉬미어 수트에 페이슬리 무늬 넥타이, 가발, 선글래스 차림에 기도문과 빨간 장미를 든 모습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무덤에는 그가 창간한 잡지 ‘인터뷰’, 인터뷰 T셔츠, 그리고 에스테로더의 향수(Beautiful)도 함께 묻혔다. 그해 4월 1일 맨해튼 세인트 패트릭 처치에서 추도식이 열렸다.
▶유언: 워홀은 자신의 재산을 ‘시각미술의 발전’에 기여할 재단 설립에 쓰라고 유언을 남겼다. 소더비는 무려 9일에 걸쳐서 그의 소장품을 경매해서 총 2000만 달러를 올렸다. 1991년 고향 피츠버그에 개인 뮤지엄으로서는 미 최대 규모인 앤디 워홀 뮤지엄(The Andy Warhol Museum)이 설립됐다.
▶워홀 영화: '나는 앤디 워홀을 쏘았다'(1966)이외에 워홀이 조연으로 등장하는 영화가 있었다, 같은 해 화가이자 워홀의 친구였던 줄리안 슈나벨은 요절한 화가 장 미셸 바스퀴아의 삶을 그린 영화 '바스퀴아(Basquiat, 1996)'를 연출했다. 이때 바스퀴아의 멘토였던 워홀 역은 가수 데이빗 보위, 바스퀴아 역은 제프리 라이트가 맡았다. 사진은 영화 '바스퀴아'의 한 장면.
▶경매: 2006년 ‘8명의 엘비스(Eight Elvises, 1963)’가 개인 소장가에게 1억달러에 팔렸다.
모건 라이브러리 콜렉션 하이라이트
*앤디 워홀과 그 후예들@메트뮤지엄, Regarding Warhol
*첼시는 지금 Chelsea Now: 마틴 퍼리어, 카라 워커, 윌리엄 웨그만
*마티스 자화상에서 렘브란트 부인까지 드로잉전@모건 라이브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