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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와 모델, 레즈비언 로맨스

칸영화제 감독상(셀린 시암마) 수상작


NYFF 2019 (9/27-10/13) 

<5> 불타는 여인의 초상 Portrait of a Lady on Fi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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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trait of a Lady on Fire/ Portrait de la jeune fille en feu by Céline Sciamma


*불타는 여인의 초상 Portrait of a Lady on Fire 예고편


칸 영화제는 2013년 압델라티프 케시시(Abdellatif Kechiche) 감독의 '파랑은 가장 따뜻한 색(Blue Is the Warmest Color)'에 황금종려상을 바쳤다. 2016년엔 박찬욱 감독이 '아가씨(The Handmaiden)'로 경쟁 부문에 진출했다. 두 영화는 남성 감독이 그린 레즈비언 로맨스다. 2019년 칸 영화제 각본상 수상작 '불타는 여인의 초상(Portrait of a Lady on Fire/ Portrait de la jeune fille en feu)'는 프랑스 여성감독 셀린 시암마(Céline Sciamma)에 의해 레즈비언 러브 스토리의 정점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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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trait of a Lady on Fire/ Portrait de la jeune fille en feu by Céline Sciamma


'불타는 여인의 초상'은 남성감독들의 관음주의 시선에서 벗어나 있다. 셀린 시암마 자신이 레즈비언이자 페미니스트로 시나리오도 직접 썼다. 18세기 배경의 시대극이라 원작이 있으리라는 선입견은 오해였다. 플롯은 간단하고, 대사는 간결하고, 미장센은 정제되어 있다. 시암마 감독은 카메라로 주인공들의 시선을 응시하며 이들의 교감과 미묘한 심리를 포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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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trait of a Lady on Fire/ Portrait de la jeune fille en feu by Céline Sciamma


해안 절벽이 위험스러운 절경인 프랑스 브리타니를 배경으로 여성 화가 마리안느(노에미 메를랑 분, Noemie Merlant)와 고집스러운 백작가문의 딸 엘로아즈(아델 아에넬 분, Adèle Haenel)가 만난다. 수녀원에서 갓나온 엘로아즈의 언니는 절벽에서 떨어져 자살했다. 백작부인은 딸을 밀라노의 귀족과 결혼시킬 작정으로 화가 마리안느에게 딸 초상화를 의뢰한다. 


마리안느는 처음 화가라는 사실을 숨긴 채 엘로아즈의 동반자로 관찰하며 초상화를 그리게 된다.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있던 엘로아즈는 서서히 마리안느에게 호의를 느낀다. 마리안느는 엘로아즈를 모델로 앉히고 본격적인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하고, 시간이 흐르며 두 여인은 겉잡을 수 없는 격정에 휘말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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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trait of a Lady on Fire/ Portrait de la jeune fille en feu by Céline Sciamma


영화는 마리안느의 회상으로 시작한다. 배를 타고 브리타니로 가던 마리안느는 풍랑에 캔버스가 바다로 빠지자 헤엄쳐 건져오는 행동파다. 그녀의 성격을 단숨에 알려주는 에피소드. 저택에 도착한 마리안느는 화로 옆에 젖은 캔버스 두개를 말리면서 그 앞에 누드로 앉아 담배를 피운다. 그녀의 불꽃같은 사랑이 시작되고, 두개의 초상화가 그려질 것임을 예고한다. 수녀원 생활, 중매결혼, 언니의 죽음 등 자신을 둘러싼 상황에 분노하는 엘로아즈는 해안가에서 죽지도 못하고, 단지 달리는 것이 꿈이다. 화가 마리안느에겐 결혼이 선택이지만, 백작의 딸 엘로아즈에게 결혼은 강요된 것이다. 자유로운 여인과 구속된 여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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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trait of a Lady on Fire/ Portrait de la jeune fille en feu by Céline Sciamma


마리안느는 화가, 엘로아즈는 모델로 기존의 남성 화가, 여성 화가의 관습이 깨진다. 마리안느가 엘로아즈를 향한 관찰에서 드로잉, 캔버스 스케치 과정은 그녀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이며, 엘로아즈는 마리안느의 뮤즈가 된다. 빨간색(루비) 드레스의 흑발 화가 마리안느와 녹색(에머랄드) 드레스의 금발 모델 엘로아즈는 금지된 사랑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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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trait of a Lady on Fire/ Portrait de la jeune fille en feu by Céline Sciamma


'불타는 여인의 초상'은 네 여인이 중심 인물이다. 마리안느와 엘로아즈, 백작 부인과 하녀 소피아. 권위과 관습의 상징인 백작 부인이 집을 비우자 마리안느, 엘로아즈, 소피아의 트리오가 함께 행동하며 여성들의 연대(female bond)를 보여준다. 이들은 책 '오르페와 유리디체' 책을 함께 읽으며, 토론한다. 마리안느와 엘로아즈의 운명을 복선으로 깔라놓은 이야기다. 백작의 딸 엘로아즈와 마리안느가 식사 준비를 하고, 소피아가 자수를 하는 장면은 계급의 수직관계에서 수평관계로 전복되는 상징적인 씬이다.  


또한, 이들은 소피아가 민간요법으로 임신중절을 시도하는 것을 도와준다. 포즈를 거부했던 엘로아즈는 소피아의 낙태 모습을 취하고, 마리안느는 그 모습을 화폭에 담는다. 인물화가가 일상의 모습을 담은 풍속화(장르화)를 그리게되는 장면이다. 또한, 마리안느가 이별하기 전 침대에서 엘로아즈의 책 안(28쪽)에 자화상을 그리며, 소피아가 자수를 하는 것은 감독이 특별히 여성 미술사에서 공예와 미술을 조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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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trait of a Lady on Fire/ Portrait de la jeune fille en feu by Céline Sciamma


셀린 시암마 감독은 음악을 철저히 배제하다가  밤에 들판으로 나들이하는 장면에서 여성 주민들이 모닥불가에서 합창(장-밥티스트 드 로비에와 아서 시모니니 작곡, Jean-Baptiste de Laubier & Arthur Simonini)을 부르게 한다. 어둠 속 박수를 치며 부르는 여인들의 노래는 마치 사랑의 찬가처럼 들린다. 이때 엘로아즈의 드레스에 불이 붙는다. 그것은 사랑의 열정이었다.


마리안느가 훗날 오페라 극장에서 멀리 엘로아즈를 바라보는 마지막 장면에서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Concerto No. 2 in G minor, Op. 8, RV 315, "Summer" (L'estate)이 격정적으로 흐른다. 눈물이 흐르는 엘로아즈의 얼굴이 클로즈업된 채 흐르는 '여름'은 슬픔의 바다로 이끄는 음악이다. 이 마지막 장면은 슬픔, 애처로움, 안타까움이 모두 복합되어 여운을 남긴다. 대만 감독 차이밍량(Tsai Ming-liang)의 'Vive L'Amour(愛情萬歲, 1994)'에서는 여주인공이 벤치에 앉아 서럽게 울며 끝냈다. 두 영화의 엔딩은 파워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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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린 시암마 감독(왼쪽부터), 배우 아델 아에미, 노에미 메를랑.


엘로아즈 역의 아델 아에넬은 올 3월 링컨센터의 '프랑스 영화와의 랑데부(Rendez-Vous with French Cinema)'에 초대된 코믹 액션물 '당신과의 트러블(The Trouble with You)'에서 가짜 영웅 형사의 미망인으로 출연했다. 감독 셀린 시암마와는 연인 사이였다고 한다. 단아하며, 눈빛이 초롱초롱한 노에미 메를랑과 캐스팅을 바꾸었다면, 어땠을지 상상해본다. 뉴욕영화제 상영 후 12월 6일 미국내 개봉될 예정이다. 121분. 9월 29일 오후 5시 45분, 9월 30일 오후 8시 30분. https://www.filmlinc.org/nyff2019/films/portrait-of-a-lady-on-f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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