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영화제 (6) 도망친 여자(The Woman Who Ran)' ★★★★
NYFF58 (9/17-10/11) <6> 도망친 여자(The Woman Who Ran)' ★★★★
그녀는 왜, 어디로 도망쳤을까?
2020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홍상수, 감독상) 수상작
'도망친 여자(The Woman Who Ran)'. NYFF58 감희가 친구들과 대화하는 창가의 구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순의 집에는 영지와 사는 이혼녀 영순(위부터), 멋진 연애를 꿈꾸는 수영, 감희의 옛애인과 결혼한 우진.
홍상수(Hong Sangsoo) 감독의 24번째 영화 '도망친 여자(The Woman Who Ran)'가 예상대로 2020 뉴욕영화제에 초청됐다. 뉴욕영화제에서 상영되는 15번째 작품이다. 아마도 최다 기록 감독일 것이다. 올 2월 제 70회 베를린영화제에서 은곰상(감독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2017년 베를린 영화제에서는 그의 뮤즈인 김민희가 홍 감독의 '밤의 해변에서 혼자(On the Beach at Night Alone)'로 은곰상(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바 있다.
'도망친 여자'는 세가지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주인공 감희(김민희 분)는 남편이 출장 간 사이에 친구 셋을 만나게 된다. 첫째 에피소드에서 감희는 교외에서 텃밭을 가꾸며 룸메이트 영지와 사는 이혼녀 영순(서영화 분)을 방문하며, 두번째 에피소드에선 예술가촌에 사는 독신녀 수영(송선미 분)을 찾아간다. 세번째는 영화관 카페에서 감희의 옛 애인과 결혼한, 유부녀 우진(김새벽 분)을 우연히 만나게 된다.
감희는 30-40대의 친구들을 통해 한국에서 중년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 결혼과 사랑의 여러 모습을 발견한다. '도망친 여자'는 어디까지나 여성들의 이야기이며, 남자들은 불청객들고 뒷모습을 포착하거나, 화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따라서 소주는 없고, 대신 고기, 막걸리, 파스타, 와인, 커피, 그리고 사과가 먹거리로 등장한다.
#1 이혼녀 영순: 남자 없는 삶
'도망친 여자(The Woman Who Ran)'. NYFF58. 영지는 수탉의 폭력성에 흥분하고, 이웃집 남자는 '도둑 고양이' 불평하러 찾아온다.
첫 에피소드는 이혼녀 영순의 집 근처 닭들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희곡작가 겸 연출가 남편과 힘겹게 이혼한 영순은 룸메이트 영지와 교외에서 살고 있다. 엄마 가출 후 아버지와 어렵게 살고 있는 이웃집 26세 여자는 영순에게 의지한다. 고기와 막걸리를 사들고 방문한 감희는 영지가 구워주는 고기를 먹고, 소의 눈망울와 채식주의에 대해 이야기한다.
룸메이트 영지는 대화 중 옆집 우리의 수탉이 텃새를 위해 암탉의 뒷머리를 쪼는 것에 대해 비난한다. 갑자기 이웃의 남자가 찾아와 '도둑 고양이'에 먹이를 주지 말아달라고 요청한다. 감희는 한밤중 CCTV를 통해 영순이 이웃집 딸와 담배를 피우며 포옹하는 모습을 목격한다.
'도망친 여자(The Woman Who Ran)'. NYFF58. 3층의 비밀과 CCTV.
이혼녀 영순의 공간은 남자 없는 삶과 여자끼리의 자매애가 무르 익고 있는 곳이다. 영순의 집에는 창살이 쳐있다. 그 창살은 남자들을 방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도둑 고양이' 불평하러 찾아온 남자는 정서적인 침입자다. 부인이 고양이를 무서워한다는 이유만으로 영순과 영지가 고양이에 대해 발휘하는 모성애를 단절하려는 훼방꾼이다.
감희는 소파에서 자면서 '3층의 비밀'을 캐묻는다. 한밤중 CCTV로 영순과 이웃집 딸이 담배를 피우며 포옹하는 장면을 지켜본다. 3층은 무엇일까? 영순과 영지가 나누는 동성애 공간의 뉘앙스를 풍기는 장치다. 영순은 남편으로부터 이혼을 통해 도망친 여자다. 이웃집 딸의 엄마도 도망친 여자다. 영순은 영지와 이웃집 딸과 우정 또는 그 이상의 감정을 나누며 여성들간의 유대를 즐기고 있다.
첫번째 에피소드는 감희, 영순, 영지가 우산을 쓰고 텃밭 옆의 닭 우리를 구경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텃밭은 영순의 새로운 삶이며, 수탉이 횡포를 부리는 닭장은 가부장적인 질서로 돌아가는 동물의 세계처럼 보인다.
#2 독신녀 수영: 재미있는 삶
'도망친 여자(The Woman Who Ran)'. NYFF58. 수영은 창밖의 풍경처럼 위층 건축가와 멋진 연애를 꿈꾸고 있다.
산을 배경으로 2편으로 넘어가면서는 홍상수 감독이 *아이폰으로 작곡한 단순하고, 멜란콜리한 음조가 흐른다. 감희가 필라테스 강사 수영의 집을 찾아갈 때는 전선 위의 까마귀가 울고 있다.
감희는 예술가촌에서 모던한 공간에 살고 있는 수영에게 옷을 선물한다. 남성 수트를 개조한듯한 코트다. 수영에게 남자가 필요함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수영의 창문에서는 조선시대 정선이 그렸던 인왕산이 시원하게 보인다. 이혼녀 영순과는 달리 수영의 마음과 몸은 열려있다. 엄마와 오랫동안 살다가 모처럼 독립한 수영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남자다. 인생을 재밌게 즐기고 싶다.
'도망친 여자(The Woman Who Ran)'. NYFF58. 감희는 수영의 재미있는 삶을 부러워한다.
수영은 예술가들이 모여드는 동네 술집에 처음 간 날 만난 근사한 건축가를 만났다. 알고 보니 윗집에 사는데, 그가 별거 중인 유부남이라는 것도 문제되지 않는다. 하지만, 수영에겐 아킬레스건이 있다. 그 술집에서 만난 26세의 시인 청년과 술취한 채 잠을 자버린 것.
시인이 집까지 찾아오며 매달리자 수영은 쫓아 버린다. 영순의 집에서는 세 여자가 고양이를 불평하는 이웃집 남자를 보냈다. 홍상수 감독은 그 남자들의 처량한 뒷 모습을 포착한다. 그 남자들은 여자들의 세계에서 추방당한다. 하지만, 수영은 엄마로부터, 시인으로부터 '도망친 여자'이기도 하다.
#3 유부녀 우진: 불만의 삶
'도망친 여자(The Woman Who Ran)'. NYFF58. 감희와 우진 사이의 벽, 우진은 감희의 옛 애인 정선생과 결혼했다.
세번째 만남은 우연이다. 영화 보러간 날 카페에서 옛 친구 우진과 마주친다. 감희와 우진은 서먹한 사이다. 우진은 감희의 옛 애인 정선생(권해효 분)과 결혼했다. 우진은 감희에게 뒤늦게 사과한다. 그리고, 남편에 대해 푸념하기 시작한다. 인기 소설가가 되어 TV에 출연하고, 북콘서트를 하는 남편이 못마땅하다. 감희에게 "같은 이야기를 계속하면서 어떻게 진심을 유지할 수 있겠어?"하며 불평한다.
감희는 그날 극장 밖에서 정선생과 마주치자 "똑같은 말만 계속하다 보면 다 날아갈 것 같아요. 그게 어떻게 진심일 수 있어요?"라며 비판한다.
'도망친 여자(The Woman Who Ran)'. NYFF58. '도망친 여자'에서 남자들은 뒷모습으로 남는다.
세가지 에피소드에서 공간 설정이 흥미롭다. 영순의 3층에는 무언가 비밀이 있는듯 하며, 수영은 윗집 건축가와 연애를 시작했고, 우진은 지하에서 북콘서트하는 남편을 찾아가지도 않는다. 세 여자의 파트너가 3가지 레벨로 설정됐다.
반면, 고양이 불평 이웃, 스토커같은 시인 청년, 인기에 매몰된 우진 남편 정선생도 거의 뒷모습만 보여진다. 그리고, 이웃집 딸의 아버지, 위층 건축가와 감희의 남편은 등장하지 않는다. 사실 '도망친 여자' 속 여자들은 한국남성들을 혐오하고 있는듯 하다.
#4 감희: 영화관으로 도망친 여자
감희는 세 친구와 만나서 같은 말을 반복한다.
"우린 5년 동안 단 한번도, 하루도 떨어져 본 적 없어. 그 사람 생각이 그래. 사랑하는 사람 무조건 붙어 있어야 하는거래. 그게 자연스러운거래."
하지만, 결혼 5년 차 감희가 자신의 말처럼 행복한지는 미지수다. 감희의 반복적인 말은 우진 남편의 반복적인 말처럼 진실성이 떨어진다.
'도망친 여자(The Woman Who Ran)'. NYFF58. 감희는 행복한 여자일까? 도망친 여자일까?
감희가 영순의 집을 방문하면서 최근 머리를 자신이 잘랐다고 말한다. 여자가 긴 머리를 자랄 때는 심경의 변화가 있는 것이다. 게다가 자신이 자르는 것은 삶의 변화를 예고한다. 영순은 감희 머리에 대해 정신나간 고교생같다고 말한다. 수영을 만나서는 그녀의 근사한 집과 재미있게 사는 모습을 부러워하며, 자신이 운영하는 꽃가게가 재미없다고 고백한다.
번역일과 대학 강사를 하는 감희의 남편은 출장 중이라고 했지만, 그녀는 남편과 통화조차 하지 않는 것같다. 우리는 감희가 '위기의 여인'이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그러면, 감희는 진정 누구인가? 그녀는 남편으로부터 도망친 여자일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5년간 속박됐던 여자의 자유 선언일까? 아니면, 감희와 남편의 열정적인 사랑은 그녀 자신에게 거는 마법, 혹은 최면일지도 모른다.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하니까.
'도망친 여자'에서 연상되는 영화들. '무도회의 수첩' '5시에서 7시까지의 클레오' '베를린 천사의 시' '카이로의 자주빛 장미'.
감희가 남편 출장간 사이 친구들을 만나는 모습은 크리스틴과 클레오를 연상시킨다. 줄리앙 뒤비비에(Julien Duvivier) 감독의 '무도회의 수첩(Un Carnet de Bal, 1937)'에서 미망인 크리스틴은 옛날 수첩을 발견하고, 16살 무렵 무도회에서 함께 춤추었던 남자들을 찾아간다. 아그네스 바르다(Agnes Varda) 감독의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Cléo de 5 à 7, 1962)'에서 가수 클레오는 카드점을 본 후 불안한 마음으로 의사의 검진 결과를 기다리며 시간을 보낸다.
한편, 감희는 남자와의 관계로 인해 중년의 위기에 놓인 여자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테라피스트같다. 아니, 어쩌면 한국 보통 여성들의 삶에 귀를 기울이는 천사일지도 모른다. 빔 벤더스(Wim Wenders) 감독의 '베를린 천사의 시(Der Himmel über Berlin/Wings of Desire, 1987)'에서 두 천사 다미엘과 카시엘은 베를린 거리를 배회하면서 사람들의 고통과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귀기울이며 위로한다. 어느날 다미엘은 곡예사와 사랑에 빠져 인간이 된다. 그 순간 화면은 흑백에서 컬러로 바뀐다.
'도망친 여자'(2020,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밤의 해변에서 혼자'(2017),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2015).
영화의 피날레는 극장 안이다. 감희가 극장에 처음 들어갔을 때 스크린에는 흑백의 바닷가 장면이 보인다. 하지만, 다시 텅 빈 영화관으로 돌아갔을 때 바닷가 화면은 컬러다. 왜 바뀌었을까? 우디 알렌(Woody Allen) 감독의 '카이로의 자주빛 장미(Purple Rose of Cairo, 1985)'에서 공황기의 웨이트레스 미아 패로는 영화관으로 도피하다가 스크린 밖으로 뛰쳐나온 배우 제프 다니엘스와 사랑에 빠진다.
어쩌면 감희는 극장으로 도피한 여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모두에게는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 영화는 우리에게 위안을 주며, 우리를 꿈꾸게 해준다. 홍상수 감독은 이미 전작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Right Now, Wrong Then, 2015), '밤의 해변에서 혼자'(On the Beach at Night Alone, 2017)에서도 김민희가 영화관에 있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감희가 보는 영화의 해변 장면은 어쩌면 '밤의 해변에서 혼자'일지도 모른다. 러닝타임 77분.
The Woman Who Ran(도망친 여자)
FRIDAY, OCTOBER 2, 8PM
Brooklyn Drive-In
https://www.filmlinc.org/nyff2020/films/the-woman-who-ran
*홍상수 영화는 왜 나를 슬프게 하나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홍상수 감독과 김민희씨의 콤비가 잘 어울립니다. 이렇게 저예산으로도 좋은 영화를 만들어서 영화를 빛내게 해주고 있는 홍 감독과 김민희씨의 건투를 빕니다.
-Ela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