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치작가 강익중 인터뷰: 세계로, 미래로 뛴다
"작가는 잠자는 영혼을 깨우는 사람"
설치작가 강익중 Ik-Joong Kang
강씨는 50세 이후엔 세계를 60세 이후엔 우주를 생각하며 그림을 그리고 싶다. 뒤의 TV 모니터는 백남준의 작품이다.
Photo: Sukie Park/www.NYCultureBeat.com
*이 인터뷰는 2012년 2월 진행된 것입니다.
강익중(51)씨가 사는 모던한 아파트는 2012 AIA(미건축가협회) 인테리어상 수상작이다. 부동산투자회사 영우&어소시에이츠(YWA)의 공동대표인 부인 이희옥(50, 영어이름 마가렛 리)씨의 지휘로 완성됐다. 강씨가 오픈 키친에서 커피를 끓이고 있는데, 진돗개가 졸졸 따라 다닌다. 한국에서 데려온 두살배기 ‘허드슨 강(Hudson Kang)’군이다.
1984년 뉴욕으로 이민 온 강익중씨는 분명 ‘부와 명예’라는 두 마리 토끼를 쥔 화가다. 뉴욕에서 미술가로 성공하는 것을 ‘낙타 바늘귀 들어가기’로 비유한다면, 그는 바늘귀를 통과한 낙타인 셈이다. 그러나, 그가 순전히 재능과 행운으로 이 자리까지 왔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해다. 맨손의 유학생으로 시작한 강씨는 두 세가지 힘든 일자리를 저글링하며, 지하철과 버스에서 짬짬이 그림을 그렸다.
화가로서 입지를 구축한 이후엔, 민족을 생각해 한글과 달 항아리로 통일을 염원하는 설치작업을 해왔다. 그리고, 지금은 세계 5대륙 어린이들의 꿈을 모아 ‘화합과 평화’라는 이름으로 동서남북,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연결하고 있다.
강씨는 1997년 베니스비엔날레 특별상 수상 후 ‘글로벌 아티스트’로 자리매김했다. 아시아나 항공에서만 마일리지가 100만이 넘었다는 ‘현대의 유목민’이다. 높은 산 정상에 올랐지만, 그는 봉우리 위에서도 치열하게 뛰고 있다. 부자이지만, 소박한 마음을 잃지 않으며, 유명 화가지만, 겸손으로 일관한다.
최근 강씨는 모교 프랫인스티튜트의 ‘2012 동문 공로상(Alumni Achievementt Award)’ 수상자 5인에 선정됐다. 개교 125주년을 맞는 프랫의 영광스런 공로상 시상식에 참가할지는 아직 모른다. 그가 가장 잘 쓰는 단어는 ‘그냥’, 내친 김에 자신의 호를 ‘그냥’으로 지었다고 고백한다.
스튜디오에 설치한 '해피 월드' 앞에서 허드슨 강과. 아들이 플로리다 골프대회에 참가했을 때 강씨는
허드슨과 21시간 논스탑으로 달렸다. 허드슨은 물도, 밥도 거부하며 든든한 동반자가 되어주었다.
Photo:SP/www.NYCultureBeat.com
돈 벌기 위해 뉴욕으로
-프랫 동문 공로상을 받는 소감은.
“오랫 동안 '프랫'이라는 단어를 잊고 있었다. 앞으로 모교를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나하나 찾아봐야 할 것 같다.”
-프랫에서 배운 것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대학원 첫 드로잉 시간에 수염이 덥수룩한 미국 교수가 ‘Are you enjoying?’하고 물었다. 보통 그림 그리는 선후배, 동료들끼리는 ‘요즘 고민 좀 하냐?’라는 말을 종종 했다. 그림은 우리들에게 고민의 대상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림을 즐기고 있나?’라고 했을 때 상당히 놀랐다. 프랫을 통해 많은 친구들도 만났고, 그림의 ‘신바람’도 다시 만났다.”
-화가로 성공하고 싶어 뉴욕에 왔나.
“사실 돈을 벌어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빨리 호강시켜드리겠다는 생각이었다. 신분상 적을 두어야했기 때문에 프랫에 등록했고, 가져온 3000불 중 등록금과 기숙사비를 내고 나니 딱 20불 남았다. 그래서 바로 일을 시작했다.”
-무슨 일을 했나.
“주중에 델리에서 12시간 일하고, 주말엔 벼룩시장에서 망을 봤다. 브루클린 옷가게에서도 9년 반 동안 일했다. 델리에서 일한 첫날 칼로 베이글을 써는데, 세워서 자르는 바람에 손가락이 잘렸다. 마침 손님이 간호원이라 핸드백에서 응급조치용품들이 나왔다. 처음엔 피를 보니 무척 아팠는데, 아픈 나를 인정하니 아프지 않더라. 부정하면 아픔이 되는 것 같다. 삶의 한 교훈을 배운 셈이다.”
-옷과 먹거리에 도사가 됐겠다.
“내가 배운 것 중 하나는 사람들 목둘레 2배가 허리 사이즈라는 점이다. 특별히 운동하는 사람 빼놓고는(!)”
-늘 단정한 청바지와 셔츠 차림인데, 옷을 직접 사나.
“쇼핑을 제일 싫어한다. 옷 가게와 델리에 가는 것을 꺼린다. 옷은 가격을 뻔히 아니깐, 델리는 특이한 냄새 때문에. 신발도 두 켤레뿐이다. 난 농구화도 없다. 옷은 와이프가 사다 주는 대로 입는다. 청바지는 몇 벌 되지만, 두 벌 갖고 번갈아 입는다. 옷을 차려 입을 일이 별로 없다."
-차려 입을 일이 있을 땐.
"하루는 미드타운의 프랑스 레스토랑에 갔다. 재킷은 입었는데, 청바지 때문에 웨이터들이 못 들어가게 하더라. 그래서 와이프와 근처 H&M(*스웨덴에서 온 저가 의류 백화점)에 가서 기지 바지를 사서 단을 걷어 입고 들어갔다. 턱시도는 하나 있지만, 내가 입으면 웨이터로 본다. 얼마 전 아내의 지인이 포시즌에서 결혼식을 했다. 앵커 바바라 월터스, 에드 코치 뉴욕 전 시장도 오고, 뉴욕타임스가 대서특필한 결혼식이었다. 그런데, 아시안이 딱 두 명이더라. 중국인 웨이터와 나뿐이었다. 손님들이 나한테 ‘물 달라’고 할까 봐 일부러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리고, 가능한 그 웨이터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예전에 어느 행사에 차려 입고 갔더니, 누가 내게 빈 와인 잔을 주더라. 그런 경우 많다. 이게 아시안 남자들의 딜레마다.”
-지금 제레미 린이 아시안 위상을 ‘확’ 바꾸지 않았나.
“대단하다. 기호 친구가 와서 유투브로 경기 모습을 봤다. 아시안 남자들은 학교에서 보통 ‘샌님(*nerd, 두뇌는 좋으나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으로 찍히는데, 제레미 린은 하버드 출신에 농구도 잘한다. 머리가 좋아 경기를 ‘읽을’ 줄 알아 부진했던 팀의 활력소가 됐다. 린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아시안들에게 큰 롤 모델이 될 것이다. 기호도 뿌듯해하는 것 같다.”
"백선생님이 꼭 서울에서 함께 전시하자고 했는데, 돌아가신 후에야 이루어졌습니다." 2009년 1월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백남준/강익중 2인전. 백남준의 1003개 TV 모니터 설치작 '다다익선' 주위로 강익중의 6만2000점 모자이크 설치작 '삼라만상'이 보좌하고 있다. Photo: Ikjoong Kang
8시부터 6시까지 그린다
강씨는 잠이 없다. 아침 5시 30분에 일어나 허드슨에게 밥을 주고, 스튜디오의 탁구대에서 혼자 탁구를 친다. 그리고 나서 아들 기호(13)에게 줄 아침식사를 만든다. 그날의 아메리칸 브렉퍼스트는 딸기로 장식한 팬케이크, 달걀과 베이컨 요리. 아빠는 아들이 남긴 것으로 아침을 때운다. 7시에 일어나는 사업가 아내는 아침을 거르고, 회사로 간다. 홀로 남은 강씨는 8시부터 6시까지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린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강씨는 아침마다 뉴욕타임스 2면의 ‘뉴스 섬머리’를 줄줄 외면서 두뇌를 가동시켰다. 요즘엔 신문을 끊고, 대신 유명 연설문으로 휘발유를 바꾸었다.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 마틴 루터 킹의 ‘I Have a Dream’, 그리고 오바마의 ‘국정연설’까지 도전했다. 낮에 그림을 그리면서 연설문의 주요 대목을 계속 머리 속에서 돌리는 것이 습관이 됐다.
-어떻게 8 to 6로 규칙적인 작업을 하나.
“샐러리맨보다 더 열심히 일한다. 습관이 된 것이다. 1988년 대학원 마치고, 차이나타운에 120스퀘어피트(3평) 짜리 작업실을 구했다. 아침에 사람들이 가방을 하나씩 들고, 출근들하고 있었다. 작업실 문을 딱 닫고 들어가 ‘이제부터 학교가 아니니, 나 혼자 시작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도 가방을 만들어서 그 속에 책, 신문, 도시락을 넣고, 사무원인체 하고 작업실에 들어가서 일을 했다. 그곳에서 12년 동안 작업했다. 규칙적으로 일하지면, 특별한 프로젝트가 있으면 밤도 샌다. 광화문 가림막 작업 때는 밤 12시, 새벽까지도 그렸다.”
-전업 작가라 시간이 많을 것 같은데.
“사람들은 시간이 많을 꺼라 생각하는데, 사실 별로 없다. 난 사회생활 별로 안 하지만, 작업하고 아이에게 엄마 노릇까지 하려니까 바쁘다. 기호가 이것저것 배우는 것이 많아 라이드도 해줘야 한다. 6시 반에 일을 정리하면, 근처 홍콩마켓에서 장을 봐서 저녁을 만든다. 청소도 하고, 집안 일을 한다.”
-점심도 해 먹나.
“점심 때는 바쁘니까 인근 중국 식당에서 4불짜리 음식을 사다 먹는다. 가끔 중국인 화가친구 빙 리가 점심 먹으러 온다. 우리 집 중고 오디오를 잘 고쳐 주어서 죽을 때까지 점심 사주기로 약속했다.”
차이나타운 아화 식당에서. SP
돈이 없었던 유학생 시절 강씨는 바이런 김과 빙 리를 비롯 중국계 작가들과 화요일마다 만나 싸고 맛있는 집에서 점심식사를 하는 ‘화요일의 런치클럽(Tuesday Lunch Club)’을 만들었다. 모임은 8년간 계속돼다가 거의 작가로 유명해지면서 자연스럽게 해체됐다.
1996년 강씨는 그 시절 얻은 정보를 모아 ‘배고픈 화가들을 위한 식당 가이드(Starving Artists’ Restaurant Guide)’를 아코디언 형식으로 제작했다. 100권을 만들어 휘트니뮤지엄에서 3달러50센트에 팔았는데, 30분만에 매진됐다. 강씨는 더 이상 배고픈 화가가 아니지만, 점심은 아직도 늘 차이나타운 음식으로 때운다.
이 날의 점심 식사는 가정식, 미리 만들어 짜장면이다. 기름을 뺀 돼지고기, 호박, 양파, 리크(leek), 생강과 춘장으로 만든 짜장을 한국산 메밀국수 위에 올렸다. 반찬은 농장하는 델리 아주머니가 가져온 총각김치와 콩자반. 검은 콩을 식초에 담구어 한달 간 숙성시킨 후 고추장과 물엿에 버무린 ‘강익중 표’ 보신 콩자반이다. 담백한 짜장면과 감칠맛 나는 콩자반, 두가지 검은색 요리가 잘 어우러진다.)
-화가가 안되었다면,
“아마도 요리사가 됐을 것 같다. 난 요리의 도사다(웃음). 아들 셋에 둘째여서 어머니 도와 드리다가 요리를 배웠고, 김장도 어머니와 함께 했다. 아침에도 스파게티, 볶음밥, 짜장면, 만두, 삼겹살, 갈비, 만두, 샌드위치, 청국장 김치찌개, 된장찌개 등 무엇이든 해준다. 기호는 ‘5스타 레스토랑 같다’고 좋아한다. 난 김치 담글 때 마늘 대신 물 미나리(watercress)와 생강을 넣는다. 이렇게 하면 마늘의 톡 쏘는 맛이 난다. 전에 인턴들이 많을 땐 탕수육도 만들어줬다.”
-한식 세계화에도 일가견이 있을 것 같은데.
“한식당의 가장 큰 문제는 마늘 찌든 냄새, 생선 구운 냄새, 바비큐 연기 등 환기인 것 같다. 이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 둘째는 주방을 오픈해야 한다. 손님과 소통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식은 온도가 중요해서 주방에서 나와서 식탁까지 가는 시간이 짧아야 한다. 미국 사람들은 모르는 음식일수록 조리 과정을 보고 싶어한다. 키친이 식당 뒤가 아니라 중앙에 오거나, 중앙에 오픈하는 것도 생각할 수 있겠다. 조리 과정이 투명하게 보여지는 것이 중요하다. 칠레 산티에고에 갔더니 시청이 유리로 되어 있더라. 주방도 보여서 만드는 과정을 다 볼 수 있도록, 퍼포먼스처럼 소통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셋째, 메뉴가 이해되어야 한다. 식당마다 음식 스펠링이 다 틀리다. 모든 것은 소통의 문제다.”
문인화가 표암 강세황의 후손
문인서화가 강세황의 자화상 초상화(1782).
보물 제590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어려서 증조할머니 영정을 사진처럼 베껴 큰 아버지의 칭찬을 받았다.
Photo:SP/www.NYCultureBeat.com
1960년 청주에서 약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강익중씨는 영•정조 때 화가 표암 강세황(1712-91)의 후손이다. 단원 김홍도의 스승이었던 강세황은 시•서•화의 삼절로 꼽혔다. 그에 앞선 세종 때 선비화가 강희안•강희맹 형제는 먼 선조 벌이다. 한 살 때 강씨 가족은 서울 이태원으로 이사했다. 초등학교 때 영등포 큰집에 가서 연필에 침을 묻혀가면서 증조 할머니 증명사진을 그대로 카피해 제사 때 쓸 영정을 그렸다. 그랬더니, 큰아버지가 크게 칭찬하셨다. 이름난 선조의 DNA가 익중에게 내려왔으니, 가문의 경사였다. 그림만 그리면 엔돌핀이 솟는 익중이 화가가 되겠다는데 가족은 반대하지 않았다.
사실 그의 본명은 경중이다. 어느 날 스님이 대중에게 이롭게 한다는 ‘익중(益中)’으로 지어주었는데, 이제 글로벌 화가로 그 이름 값을 하고 있는 셈이다. 2009년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표암과 ‘그냥’이 만나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2인전 ‘강세황•강익중 300년전’이 기획됐다가 취소됐다. 표암의 피가 흐르기 때문일까? 강씨가 틈틈이 써온 시 '내가 아는 것'도 벌써 1000여편이 넘었다. 조만간 책으로 묶어낼 계획도 있다.
내가 아는 것
폭풍 직전의 하늘은 연한 청록색이다.
코가 닮은 사람끼리 친하다.
계란을 좀 더 오래 삶으면 껍질이 저절로 까진다.
예쁜 사람 보다 착한 사람이 훨씬 예쁘다고 기억된다.
흐린 날 밤 산속에선 내 손바닥도 안보인다.
그림을 그릴 때 눈을 반쯤 감고 그려야 좋은 그림이 나온다.
지하철에서 나와 방향을 모를 때 맞는다고 생각하는 쪽의 반대로 가면 된다.
변비엔 날고구마가 제일 빠르다.
햇볕에 눈이 부실 때는 찡그리지 말고 웃으면 된다.
‘솔직히 말해서’ 라는 말을 들을 때 제일 민망하다.
붐비는 식당은 역시 반찬이 맛있다.
우울할 땐 매운 고추다.
이건 정말 신기한데 뉴욕과 서울은 날씨가 거의 같다.
가장 좋은 냄새는 학교 앞 문방구에서 방금 산 책 받침 냄새다.
서울서 인천까지 걸을 만 하다.
어릴 쩍 들은 칭찬은 오래 기억된다.
만두 속의 부추와 돼지고기 비율은 2대1이다.
지구에서 풍수가 제일 좋은 땅이 한반도다.
부자들은 돈을 항상 잘 펴서 가지고 다닌다.
양손을 가슴에 얹고 자면 꼭 가위에 눌려 고생한다.
감기가 올 때 헤어드라이어로 5분 동안 목뒤를 따뜻하게 해주면 좋다.
짜장면이 자장면보다 그냥 좋다.
급한 일이 있더라도 몸이 불편한 사람 앞에서 뛰면 안된다.
라면은 양은냄비로 끓여야 한다.
정말 필요한 것은 별로 없다.
밤하늘의 별들은 우리 보라고 붙은 크리스마스 장식이 아니다.
빨래비누로 머리를 감으면 다음 날 꼭 머리가 가렵다.
‘기쁨 감사’ 가 우리가 사는 별의 요술 암호다.
평양 고려호텔의 샹들리에를 떼불알이라고 부른다.
남북이 풀리면 세계가 풀린다.
정말이다.
-강익중 1985-2006-
어릴 적 강씨의 집은 가난했다. 아버지가 사업을 인수했다가 실패한 것. 이태원에서도 가난한 동네 골목에서 미국 아이들과 공놀이를 즐겼다.
“대한민국이라는 집을 잠시 비운 것 같은데 어느새 28년이란 세월이 훌렀다. 팔십 노인이나 일곱 살 어린이가 느끼는 세월의 무게는 같다고 들었다. 누구나 기억의 슬라이드 파일에 들어갈 이미지의 숫자는 정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라도 그렇겠지만 내 머리 속의 슬라이드는 어릴 적 편이 훨씬 많다. 초등학교 시절의 이태원 골목들이 아직도 생생하다.”
강씨는 미술 입시학원을 거치지 않고 홍익대 서양화과에 입학한다. 하지만, 학교가 맞지 않았다. 수업 몇 번 들은 후 잘못 갔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 제 5공화국 시절, 강의실도 살벌했을 법하다. ‘아웃사이더’ 미대생이었던 그였으니, 84년 뉴욕에 왔을 때 화가의 꿈은 이미 물 건너 간 셈이었다.
프랫에 등록해놓고, 주중 12시간 델리에서, 주말이면 JFK 공항 인근 파라커웨이의 벼룩시장에서 망보는 일을 했다. 또, 브루클린 그린포인트의 옷 가게에서도 일했다. 지하철과 버스 타는 시간이 3시간여 됐다. 강씨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모자이크 설치작의 세포 격인 3x3인치 미니어처 캔버스는 이때 시작된다.
-어떻게 손바닥만한 캔버스를 발상했나.
“호주머니에 들어갈 수 있는 작은 캔버스가 필요했다. 얇은 나무를 톱으로 잘라서 미니어처 캔버스를 만들었다. 나중에 돈 벌면 큰 캔버스로 옮기리라 생각했다. 지하철 안에서 사람들의 모습, 미국 와서 느낀 단상들을 그렸다. 예전엔 사람들이 그림이 너무 작아 잘 안 보인다고 했는데, 디지털시대인 지금은 스마트폰이 손 안에 들어가지 않나(!).”
-첫 전시회는.
“1985년 롱아일랜드대학 브루클린 캠퍼스에서 했다. 당시 학교 기숙사에 케냐에서 온 축구선수가 취미로 그림을 배우고 있었는데, 그가 아는 교수에게 ‘기숙사에 이상한 놈 그림이 있는데, 구경 와라’고 했단다. 그 교수 덕에 복도에서 1년간 그린 3x3인치 그림 1000개를 모아 전시했다. 이후로 여기저기서 전시 요청이 왔다. 내가 충청도 출신이라서 그런지 체면 때문에 열심히 했다. ‘와이프는 숨쉬는 것까지 미안하냐’고 놀린다. 남에게 민폐끼치지 않으려고, 게으름 피우지 않고 하다 보니 이렇게 된 것 같다.”
'94년 커네티컷 휘트니뮤지엄의 2인전에서 두 작가. 백남준은 독일에서 "익중에게 좋은 자리를 주라"고 팩스를
보냈다. 소호에서 우연히 마주치면 백씨는 '익중아!'하고 크게 불렀다. Photo: Okkee Kim
-작가로서 터닝포인트는.
“1994년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설치작 프로젝트를 하면서다. 예산이 커서 그림을 그려도 돈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같은 해에 백남준 선생님과 커네티컷의 휘트니뮤지엄에서 2인전을 했다. 큐레이터 유지니 차이가 백 선생님은 TV 모니터로, 나는 미니 캔버스로 한국의 비빔밥처럼 다양한 재료를 섞어 반복해 표현하는 것에 공통점이 있다고 봤다. 전시 전엔 독일에 있던 백남준이 휘트니에 팩스를 보내 ‘나는 괜찮으니, 익중에게 좋은 자리를 주라’고 하셨다.”
-백남준씨가 '전생의 아들'이라고 말했다는데.
“선생님의 완전 농담이다. 그래도 안경을 머리에 올리면 약간 비슷하다고 하셨다" 내게 지금도 함께 일하는 딜러 칼 솔로웨이를 소개해주셨으며, ‘그림 싸게 팔아라, 여행 많이 다녀라, 파티에 많이 다녀라’고 조언도 해주셨다. 이중 파티만 빼곤 지켰다."
백남준은 2006년 1월 마이애미에서 눈을 감았다. 강씨는 2009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백남준과 2인전 ‘멀티플/다이얼로그 ∞’를 열었다. 백남준이 3층석탑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1003개 TV 모니터 설치작 ‘다다익선’ 주변을 강씨의 미니 그림 6만2000점 ‘삼라만상’이 탑돌이처럼 돌며 오른다. 위대한 스승에 대한 오마쥬다.
한글, 달 항아리, 그리고 아이들의 꿈
강씨는 1997년 베니스 비엔날레의 한국관 대표로 참가해 한자가 등장하는 ‘모든 것을 더하고 던지기’로 특별상을 수상한다. 이듬해엔 퀸즈 플러싱의 메인스트릿 역에 대형 모자이크 벽화 ‘해피 월드’를 걸었다.
3인치 캔버스 때문일까? 강씨의 작품은 조그만 세포들이 모인 거대한 구조물이다.
‘8490일간의 기억-한국에서 지낸 23년’(97, 휘트니뮤지엄 필립모리스갤러리전), 달항아리 그림 2611점을 모은 가림막 ‘광화문의 달’(2008-10, 서울), 6만2000개의 그림이 설치된 ‘멀티플 다이얼로그’(2009, 국립현대미술관), 4만개의 판넬에 한글로 그린 ’내가 아는 것’(2010 상하이엑스포 한국관), 그리고, ‘1392개의 달항아리’(구겐하임뮤지엄 소장품) 등 미니 캔버스 모자이크와 함께 달 항아리와 한글이 주 소재로 등장한다. 또, 하나 주목할만한 것은 그가 특별한 숫자가 제목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2010 상하이 엑스포의 한국관에 전시된 '내가 아는 것'.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한글과 달 항아리가 모자이크로 설치됐다. Photo: Kang Ikjoong
-왜 특별히 숫자에 집착하나.
“잘 모르겠다. 아주 어렸을 때 버스 타고 지나면서 가로등의 수를 셌는데, 그래서 나중엔 멀미가 났다. 사람들이 내가 소심해서 그렇다고 하더라. 그런데, 멈출 수가 없다. 아직도 걸으면서 나도 모르게 발자국 숫자 세고, 탁구 칠 때도 친 횟수를 센다.”
-이전에 작품에 ‘한자 배우기’’영어 배우기’가 나왔는데, 한글 작업은 어떻게 시작했나.
“기호를 세 살 때 한글학교 보내면서였다. 자음과 모음을 다른 크레파스색으로 구별해 그리다가 나무판으로 옮기면서 작품이 나왔다. 한글이라는 문자는 화합하며 상호 연결되어 이어져 조화를 이루며 그 자체 내에서 오묘하게 하나의 소리를 만들어낸다. 남녀가 만나 아이를 낳는 것처럼. 화합과 평화의 뜻이 담겨있는 것 같다.”
(강씨는 한글 세계 전파 프로젝트에도 열중이다. 유네스코 파리본부에는 강씨가 민태원의 ‘청춘예찬’을 그린 모자이크 작품 '청춘(Youth)'이 전시되어 있다. 강씨는 세계 각국어로 된 한글교본을 만드는 것도 꿈이다.)
-달 항아리는 어떻게 나왔나.
“2004년 9월 일산 호수공원에서 세계 어린이 그림 13만점을 붙인 애드벌룬이 오프닝 전날 바람이 빠져 한쪽으로 기울어지더라. 그때 무릎을 탁 치고, 어릴 때 보았던 백자 달 항아리를 생각해냈다.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이 모두 달 항아리에 있다고 생각했다. 뉴욕에 온 후 바로 작은 달 항아리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큰 달 항아리, 새•바람•물소리가 들어간 입체 달 항아리까지 나왔다.”
2004년 강씨는 일산 호수공원에 세계 149개국에서 모은 어린이 그림 12만6000점으로 애드벌룬을 만들었다. 작업 중. Photo: Ikjoong Kang
-작품의 소재로서 달 항아리에는 무엇이 담겼나.
“달 항아리에는 어릴 적 고향 언덕 위에 뜬 파란 하늘, 해질녘 동네 모퉁이를 돌다 본 분홍 하늘이 있다. 달 항아리는 이리 봐도 순박하고 저리 봐도 넉넉하다. 원래는 둘이었지만 불 속을 뚫고 나와 하나로 합쳐진 우리의 모습이다. 달 항아리와 한글은 비슷한 데가 있다. 모음과 자음이 붙어서 한 소리를 내는 것처럼 달 항아리도 위와 아래가 따로 만들어지는데 불 가마를 통과하면 하나가 된다. 너와 나, 남과 북, 나아가 세계를 잇는 이미지를 통해 연결의 중요성을 보여주고 싶다.”
-어린이 그림 모으는 이유는.
“1997년 베니스 비엔날레 수상 후 세계를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는 작업을 생각했다. 나중에 기호가 봤을 때도 중요한 곳에 아이들의 꿈을 설치해놓고 싶었다. 그 후 세계 어린이들의 그림을 모으기 시작했는데, 이제까지 149개국에서 약 50만점이 왔다. 어린이들 그림을 모으는 것은 미래의 시제를 현재로 끌어오는 일로 내 평생의 작업이다. 어린이 그림이 주식이고, 내 그림은 반찬인 셈이다. 임진강 위에 전 세계 어린이들 그림으로 다리를 만드는 것이 꿈이다.”
어린이 6만명의 그림을 모은 ‘10만의 꿈’(파주 통일동산), 120개국 3만4000점을 모자이크한 ‘놀라운 세상’(2001, 유엔 본부), 149개국 12만6000점을 모은 ‘꿈의 달’(2004, 호수공원) 등 세계 어린이들의 꿈이 담긴 그림으로 제작한 기념비적인 설치작으로 희망과 평화의 메시지를 강조했다.
이제 세계 140여개국 400여개의 병원 도서관 공공기관 등지에서 버튼만 누르면 그림들이 온다고 한다. 강씨는 탐욕과 전쟁으로 얼룩진 어른의 세계에 전 세계 어린이들의 꿈을 알리는 지휘자처럼 보인다. 어린이들 그림으로 만든 작품인 ‘이라크 친구에게 보내는 그림편지’는 이라크의 자이툰도서관 로비에 상설전시돼 있다. 그는 UN본부, G8 정상회담 등에 대규모 설치작품을 전시했다.
뉴요커들에겐 누구라도 그러하겠지만, 2001년 9월 11일은 잊혀지지 않는 날이다. 그날은 강씨의 마흔 한살 생일이기도 했다.
-9.11 때 어디에 있었나.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지기 바로 직전 유엔 본부에서 'Amazed World'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었다. 세계 135국에서 모은 어린이 그림 3만2000여점으로 로비에 ‘희망의 벽’을 세우고 있었다. 그 날 오후에 열릴 오프닝 때문에 자원 봉사자들과 전날 밤을 꼬박 샜다. 우리는 아침까지 마지막 정리를 하고 있었는데, 오전 9시쯤 갑자기 ‘건물에서 즉시 나가라’는 다급한 목소리의 방송이 나왔다.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본부 앞 함마슐트 광장 쪽으로 걸어갔다. 얼마 후 남쪽 건물이 무너졌다는 소식에 모두 잠이 확 깨었다. 물론 그 날 오프닝 행사가 취소가 되었고, 유엔 본부도 2002년 봄에야 일반인들의 입장이 허가됐다. 그날 다운타운에서는 테러로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졌지만, 업 타운 유엔에서는 전 세계 아이들의 꿈으로 이루어진 ‘희망의 벽’이 세워졌다. 9월 11일은 공교롭게도 생일인데, 워낙 잔치를 안하는 편이라, 그냥 지나간다.”
-북한 어린이 그림도 모으려 했는데.
“2000년과 2002년 평양을 다녀왔지만, 아무 성과가 없었다. 넓고 긴 강을 건너려면, 오랜 기다림이 필요한 것 같다.
-김정은 체제 후 그림 모으기의 전망은.
“남북이 어떤 체제로 바뀌든 결국 문화가 통일의 열쇠가 된다. 더 확실한 것은 분단의 아픔을 안고 있는 우리가 분쟁의 세계를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백신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남북이 풀리면 세계가 풀린다.”
(2006년 신시내티어린이병원에 ‘놀라운 어린이’ 프로젝트를 시작한 후 강씨는 조용히 세계 25개국 어린이 병원에 벽화 설치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또, 2010년부터는 한국의 어린이 암병원과 보건소를 돌며 어린이 그림으로 ‘희망의 벽’을 세우고 있다. 서울 아산병원, 충남대병원, 고양 명지병원, 제주 한라병원, 수원 장안구보건소까지 한반도를 종횡무진했다.)
이번에 강씨는 한국에서 ‘어린이 그림 다리’를 짓고 있다. 세계 16만명 어린이들의 그림을 한글 타일로 감싸 순천만에 200미터짜리 교량을 놓는다. 내년 4월 순천국제정원박람회에 공개될 예정이다.
세계 149개국에서 어린이들이 '나의 꿈'을 주제로 그림을 보냈다. 12만6000장은 강씨의 애드벌룬에 모자이크 됐다. Photo: Kang Ikjoong
"미국이 차려논 밥상 찾아 먹어야"
강씨의 부인 이희옥씨도 미술을 전공했다. 초등학교 때 이민 와 웨스턴워싱턴주립대에서 미술을 전공하던 이씨가 1983년 홍익대에 교환학생으로 가서 만났다. 마음이 잘 맞던 이들은 ‘UFO 클럽’을 만들어 활동했다. 이씨가 미국에 돌아온 후 펜팔 친구가 됐다. 1년 후 강씨가 졸업하자마자 뉴욕으로 왔고, 1년 후 두 사람은 부부가 된다. 뉴욕에서 부부가 화가로 살아간다는 것은 지독하게 고달픈 일이었다.
마침내 이씨는 남편을 위해 붓을 꺾고, 부동산투자회사 영우&어소시에이츠(YWA)의 말단 사원으로 취직한다. 얼마 후 미술을 포기할 수 없던 이씨는 사표를 냈다. 이때 보스 우영식씨는 부부를 불러 저녁을 사주면서 이씨를 설득했다. “남편이 미술을 하고, 아내가 돈을 벌어 서포트하는 것이 어떠냐”고. 스피치에 능통한 이씨는 우씨의 제안에 넘어갔다. 이씨는 고민 끝에 미술과 결별한 후 밤에 브루클린 로스쿨을 다녔고, 뉴욕과 뉴저지 변호사 자격증을 땄다. 그리고, YWA의 공동대표로 초고속으로 승진을 했다. 이씨는 남편이 92년 개인전을 열었던 퀸즈뮤지엄의 이사로 이제 뉴욕의 미술가들까지 지원하고 있다.
YWA는 2009년 금호종금과 콘서시엄을 구성해 세계 최대보험회사 AIG 본사 빌딩을 매입해 화제가 됐다. 지난해엔 브루클린브리지 맨해튼 입구의 버라이존 빌딩도 샀다. 뉴욕옵저버는 우씨를 ‘뉴욕 부동산업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선정했다. 우씨는 추악한 빌딩이라는 오명을 갖고 있던 버라이존 빌딩 구입에 대해 “우리는 추악한 빌딩을 사서 아름답게 만들고, 아름다운 빌딩을 사서 더 아름답게 만든다”고 말했다. YWA가 세운 첼시아트타워엔 뉴욕의 톱 화랑인 말보로갤러리와 패션디자이너 캘빈 클라인이 들어갔고, 아파트 안까지 자동차가 들어가는 ‘스카이 가라지(sky garage)’로 화제가 된 첼시의 콘도의 세입자들 중엔 배우 니콜 키드만과 이탈리안 패션 브랜드 '돌체&가바나'도 있다. ‘
프랫 건축학과를 졸업한 우씨는 강씨에 2010년 프랫 동문공로상을 수상했다. 특별한 인연이 있는 두 가족은 사업의 파트너이자 친구이기도 하다. 일도 함께 하고, 여행도 함께 다닌다. 이들은 아르헨티나 멘도사에 와이너리, 파라과이에 대규모 옥수수 농장도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다.
-화가가 너무 잘 사는 것 아닌가.
“잘 모르겠다! 나도 이상하다!(웃음) 돈은 와이프가 벌고, 나는 돈을 쓰는 사람이다. 내가 주로 하는 공공설치 프로젝트는 돈이 되는 작업이 아니다. 어린이 암 병원 설치작은 재료비, 운반비 등 펀드를 받지만, 디자인료는 안받고, 항공료는 내가 부담하고 있다. 마음 속 대야의 물이 출렁거리지 않게 평상심을 갖고 사는 것, 게으름 피우지 않는 것이 나의 모토다.”
-미술 전공한 부인이 화가 남편을 위해 희생한 것 같다.
“그런 셈이지만, 와이프 하는 일도 창의적인 일이다. 건물을 짓더라도 자동차가 리빙룸까지 올라가는 ‘스카이 카라지(sky garage) 등 이제까지 아무도 안했던 것, 최고급으로, 커팅 에지(cutting edge)로 한다.”
-미국 정착 28년이다. 미국은 어떤 나라인가.
“1997년 샌프란시스코 공항 공항 설치작이 끝날 무렵이었다. 어느 날 주최 측에서 '시민권자'냐고 물었다. ‘코리안’이라니 놀라했다. 연방 프로젝트인데, 외국인이 하면 문제가 될 꺼라면서 얼른 신청하라고 했다. 그때 고민도 많이 했다. 하지만, 미국사회에 뿌리를 내려서 민족을 위해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가 국민과 민족을 혼돈하기 쉽다. 만일 통일이 된다면, 국민 단위의 국가가 민족 단위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여기에 정착해 미국을 움직이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미국이라는 나라는 ‘차려놓은 밥상’이다. 유대인들은 미국에서 이 밥상을 잘 먹는데, 우리는 밥상을 물리는 경향이 있다. 밥상을 열심히 먹기 위해선 시민권을 받고 민족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기로 했다. 투표도 중요하다. 이민자들이 찬밥 신세로 남는 것이 아니라 쟁취를 하고 정치 체계에 참가하는 것이다.
시민권 받은 후 2000년 어린이 그림을 모으기 위해 평양에 갔었다. 자유롭게 방문하고, 끊어진 민족을 위해 무엇인가 할 수 있게 됐다.”
-올 대통령 선거를 어떻게 보나.
“난 민주당을 지원한다. 와이프는 비즈니스를 하니 당연히 롬니다. 현대사회의 리더는 깃발을 들고 나가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영웅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연결자를 원한다. 부자와 가난한 자, 동과 서,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는 사람이 리더가 되야 한다. 오바마든 롬니든 간에 연결을 위해서는 본인이 파이프처럼 비어 있어야 한다. 찾아보니 올해만 세계 59개국에서 선거가 이루어진다. 미국, 소련, 프랑스, 한국, 중국, 대만 등 세계 강대국에서 모두. 2012년은 세계적으로 하나의 매듭이 되는 해인 것 같다. 매듭은 나무의 마디, 계단의 참과도 같다. 나무에 마디가 생기지 않으면, 자라지 않는다. 아이도 감기나 옹아리를 하고 나면 키가 크더라. 제레미 린같은 경우도 마디 역할을 하는 셈이다.”
복 항아리로 소문난 달 항아리 그림 앞에서. 속이 텅 비었지만, 넉넉해서 좋다. Photo:SP/www.NYCultureBeat.com
"소통하고 세상 사람들을 품을 터"
-자신의 작품에도 마디가 있어왔나.
“50세가 될 때까진 나라에 대한 주제, 50세 이후엔 세계에 대해, 60세가 넘으면 우주를 생각하고 싶었다. 나, 한반도, 세계, 그리고 우주로 생각을 확장하기로. 전엔 남북, 꿈의 다리를 했지만, 지금은 세계를 생각하며 그림을 그린다. 운전을 할 때도 목표지를 정해야 갈 수 있지 않은가. 달 항아리, 한글에서 한반도를 포함해서 더 나아가는 것, 결국 내 스스로 세상의 한 부분이라는 것, 내가 자연에서 왔으니 나뭇잎 한 장의 한 부분일 수도 있다. 그림에서 메시지라면,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망(net)와 같다."
-작가란 누구인가.
“작가가 평양서 그림 모으고, 임진강에 다리 설치하는 게 너무 정치적이지 않느냐고들 말한다. 비유를 하자면, 작가는 직관을 통해 어망을 던지고, 과학자는 고기를 끌어올리는 사람, 경제인은 도마에서 고기를 자르는 사람, 정치인은 분배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작가의 던짐 없이는 끌어올릴 수도, 나눌 수도 없다. 최소한 작가는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해야할 것 같다. 정치 안엔 문화, 과학, 경제가 포함되어 있다. 이게 한 사이클 안에 있다. 한 식구라는 것은 차려놓은 밥상에서 밥을 같이 먹는 사람들이다.”
-현대미술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현대미술은 사람을 연결시키고,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잠자는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 작가의 임무다. 난 지금 병원을 연결하고 있다. 지난해엔 제주 한라병원, 충남대 병원, 그리고 경기도와 강원도 보건소 등지에서 어린이 '희망의 벽'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현대 아산병원엔 전 세계에서 온 2만5000장의 어린이 그림을 설치했다. 내가 미술계와는 관계없는 일을 하는 것 같지만, 사실 서로 소통하고, 이 시대 사람들을 품고 함께 일하는 것이다. 전시에서 그림 팔아서 돈을 버는 것이 당면 과제가 아니다.”
-2012년 작가로서 결심은.
“첫째 잃어버린 직관(intuition)을 사용하자. 직관은 ‘신이 주신 선물’이라고 했다. 둘째는 유머의 중요성을 잃지말 것. 유머는 방으로 들어가는 열쇠다. 몸이 굳어질수록 유머를 통해 순환시켜야 한다. 셋째는 천천히 한 걸음씩, 한번에 하나씩만 하자. 작품을 하다 보면 망치는 경우가 많다. 망치는 것이 있어야 계단의 참처럼 밟고 올라갈 수 있는 것 같다. 망침도 하나의 경과다. 교만이나 실망하지 않고 꾸준하게 나가야 한다. 시행착오에 대해 관대하고, 끌어 안는 것이다.”
-종교가 있나.
“대학 다닐 때 학교 공부 대신 교회에 빠져서 크리스천 클럽에 나갔다. 수요일, 금요일 철야 예배에 가고, 주말엔 종일 교회에서 지냈다. 여름방학 때 기도원에서 살았다. 당시 아버님이 편찮으셔서 기도를 많이 했다. 다급하니깐. 나중에 동창들이 ‘니가 그림 그릴 지 누가 알았냐’고 하더라. 지금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 하나님을 안 믿는 것이 아니라 더 큰 하나님이고, 더 경배하고 조심하고 있다."
-계기는.
"1994년 샌프란시스코 공항 프로젝트 때문에 차를 몰고 4박 5일간 3000마일을 달렸다. 1월 1일 시카고를 지나는데, 폭설이 내린 중에 해가 막 뜨고 있었다. 환청인지는 모르지만, 그때 생각했다.
하나님이 나만을 위해 있는 분이 아니라 저기 계신 해 뜨는 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즉, 생명의 에센스이시다. 어둠을 뚫고 나오는 새싹, 강에서 물고기가 헤엄치는 힘, 아이들의 맑은 눈동자 등. 난 그 동안 하나님을 작게 봤다. 나만 보시고, 우리를 축복해주시는 분인 줄 알았는데, 너무 커서 우주를 품고, 너무 작아서 먼지 안에도 들어가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안의 하나님과 밖의 하나님이 연결되어 있으며, 기도는 내가 하루하루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것에 불과하다. 나는 하나님의 한 부분이자, 하나님은 나의 한 부분, 교집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자연의 한 부분이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기쁨, 감사, 그리고 정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