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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Korean Artists
2014.02.09 17:55

(30) 김보현(김포, Po Kim: 1917-2014)

조회 수 9564 댓글 2

In Memory of Artist Po Kim    

김보현(Po Kim, 1917-2014) 화백을 추모하며


Photo: Sukie Park/NYCultureBeat

From the Interview with Mr. Po Kim on March 6,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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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 6일 뉴욕컬처비트와 인터뷰가 진행된 그 날 아침에도 김보현 화백은 붓을 들었다. 라파옛스트릿의 펜트하우스 가든에서.



“억압과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과거에서 난 자유를 갈망하고 있었고, 당시 내 심리에 가장 적합한 화풍이 추상표현주의였지요. 인습과 전통에 반대하고, 폭발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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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추상표현주의 미술활동이 전부 여기서 다 일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드 쿠닝, 라우셴버그 등 유명한 사람은 이 부근에서 살았어요. 당시 ‘10th St. Galleries’라고 집집마다 화랑들이 생기기 시작했지요. 젊은이들이 많이 모여 들고, 모두 여기서 활동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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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을 한 20년 하다 보니, 어느 순간 너무 관념적인 것 같아 못하겠더라구요. 그래서 70년대 초반 학생의 자세로 돌아가 드로잉 작업을 했지요. 학생같이 사실적으로 대상을 관찰하기 시작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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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중에 경관들이 와서 잡아갔어요. 난 이유도 몰랐지요. 여순반란 사건 이후 경찰이 사람을 마구 잡아갈 때였으니깐. 그땐 경찰이 사람 죽여도 아무도 말을 못하는 무법천지였지요. 난 공산주의고 사회주의고 흥미가 없어요. 난 자유주의자예요. 그러니까 양쪽에서 몰린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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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어요. 한국이 무서웠어요. 경찰을 봐도 겁나고… 한국에선 항상 소화가 잘 안돼서 항상 약을 먹어야 했지요. 여기 와선 그게 없어졌어요. 마음이 편해져서 그런가 봐요. 여러 번 죽을 뻔 했으니까요. 도피하러 왔으니, 어떻게 해서든 버텨야 했지요. 뉴욕은 생동감 있는 도시였어요. 일리노이는 학술적이었지만, 뉴욕은 맥박이 뛰는 당시 미술의 중심지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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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올 때 수중에 300불이 있었어요. 1년 연구원으로 미국에 왔기 때문에 바로 불법체류자 신세가 됐지요. 그래서 뉴욕에 온 뒤 소호의 넥타이 공장에 나갔어요. 넥타이에 인쇄된 선을 따라 흰색 물감으로 점을 찍는 일이었는데, 시간당 1불 받고 일했지요. 하루에 넥타이 1200여개 이상 하다가 그만 두니 다른 한국 화가를 소개해달라고 하더군요. 한국 사람 다 잘하는 줄 알고. 이 후엔 백화점에서 디스플레이도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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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군정 때 광주 주둔 사령관의 딸에게 그림을 가르쳤어요. 어느 날 부인이 찾아와 개인지도를 해달라고 했어요. 좋다고 했지요. 그런데 당시엔 한국에 자동차가 없었잖아요. 그래서 일주일에 한 두번씩 우리 집으로 미군 지프차를 보냈지요. 동네 사람들이 보기엔 미군들이 왔다갔다 하니까 이상해 보였던 모양이예요. 인민군이 내려왔을 때 다시 잡혀가 고초를 당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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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점에서 일할 때 어느 날 이민국 형사가 잡으러 왔어요. 그때 인사과장이 ‘절대 필요한 사람이니 잡아가지 말라’고 하더래요. 형사가 그러면 ’자수하라’고 권해서 자수하러 갔더니, 서류가 준비되어 있더라구요. 담당자가 나보고 ‘You are very lucky!’하더군요. 전 해에 법이 바뀌어 교환비자 소지자는 무조건 나가야 했는데, 나는 이미 그 전부터 불법체류자라 영주권을 신청할 자격이 있다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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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자씨와 나는 조선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어요. 우리 집이 광주 시내에 있어서 조선대 교수들이 종종 모였지요. 전쟁 후 종군화가단에서 같이 활동하며 친하게 지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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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하지는 않았지만, (윌렘) 드 쿠닝은 몇 번 봤어요. 내가 왔을 땐 벌써 유명한 사람이 됐지요. 그도 유명해지기 전엔 페인트 칠을 했고, 마크 디 수베로도 페인트공으로 일하다 엘리베이터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지요. 중요한 건 그림을 그리는 것이니깐 살기 위해서 아무거나 해야 했어요. 후엔 뉴욕대학교에서 동양미술사와 수채화를 가르쳤지만, 강사 월급은 별로 좋지 않았지요. 고생 많이 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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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크리스마스 직전에 레노어 토니라는 섬유예술가 친구가 인도로 간다면서 한 100명을 초대해 파티를 했지요. 이때 실비아가 친구를 따라 왔어요. 파티에서 동양 사람은 나와 이사무 노구치(*일본계 미국인 조각가)뿐이었지요. 실비아가 친구보고 ‘저 사람 누구냐’고 물은 후 소개해 만났어요. 실비아의 첫 인상이 어딘지 동양인 같았지요. 실비아가 집에 초대하면서 데이트가 시작됐어요. 그리고 이듬해 결혼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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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는 조각이고, 나는 평면 작업을 하지요. 재료도, 작업 방식도 달라 서로 영향을 주는 일이 없어요. 내가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 그림에 대해 이야기를 안하지요. 실비아도 거의 내 작품에 대해 말을 안하고, 어쩌다 ‘It’s good’ 정도로만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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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비아가 1년간 아팠을 때 화집을 준비하느라고 주야로 바빴어요. 한국의 인쇄, 출판사와 연락하느라고 정신이 없었지요. 너무 바빠서 슬픈 지도 몰랐지요. 장례 끝나고 나서 보니, 함께 살다 한 사람이 죽어도 그냥 내 삶은 계속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슬프다기보다는 글쎄, 그냥 적응해야 하지 않나 하는 마음이었지요. 실비아 죽던 날도 아침 6시에 약을 주려고 일어났는데, 벌써 실비아 손끝이 파래져 있었어요. 그래서 그때 간다는 걸 알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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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새를 좋아했어요. 뉴욕 와서 조그만 새 두 마리를 사서 위안을 삼았지요.  찰리도 여기서 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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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내 생활이지요. 다른 건 아무 것도 없지요. 특히 요즘 와선 더 그래요. 몸이 이렇게 됐으니, 다른 건 하고 싶어도 못하니깐요. 내가 두 번 죽을 뻔하다가 살아났어요. 첫 번째는 경찰에 잡혀서 고문 당하며 여러 번 죽을 뻔했지요. 그리고 이번에 병원에서 여러 번 죽음을 생각했고요. 그런데, 살고 보니 이제 몸은 병신이 되어 있고. 지금 여생에 뭘 할 것인가를 생각해보면, 이젠 여생이라고 이름을 붙일 여유조차 안 남아 있어요. 내가 얼마나 더 살겠어요. 2-3년? 이젠 여생이 너무 짧은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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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0.jpg *Po Kim: Full Interview(2012.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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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han 2014.02.10 03:27
    글과 그림 감사해요. 이젠 retro 전시를 기다리는 수 밖에 없겠군요...
  • sukie 2014.02.10 22:55

    김포 선생님 회고전이 열린다면, 서양미술사의 축소판이 될 것 같네요.
    추상표현주의, 리얼리즘, 야수파풍, 미니멀리즘... 다양한 팔레트와 스펙트럼을 모두 거치셨지요.
    선생님 가셔서 앵무새 찰리가 울고 있지나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