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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국왕의 총애, 제자를 사랑했던 르네상스 맨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 500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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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onardo da Vinci(left)/ Jean Auguste Dominique Ingres(1780-867), The Death of Leonardo da Vinci, 1818. Petit Palais



'르네상스 시대 천재'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는 1452년 4월 15일 피렌체 공화국의 빈치에서 태어나 1519년 5월 2일 프랑스 공화국 앙부아즈에서 눈을 감았다. 그의 나의 67세였다. 레오나르도 500주기를 맞아 세계 곳곳에서 전시와 특별 행사가 열리고 있다. 루브르에서는 오는 10월 24일부터 레오나르도 특별전, 런던의 왕실컬렉션에서는 5월 24일부터 레오나르도 드로잉전을 시작한다. 메트로폴리탄뮤지엄은 7월 15일부터 바티칸뮤지엄에서 대여해오는 미완성 회화 '성 제롬'을 전시할 예정이다.


레오나르도는 61세인 1513년부터 3년간 로마의 바티칸에 살았다. 미켈란젤로의 후원자였던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서거하고, 교황 레오 10세가 재위하던 시기였다. 당시 라파엘은 바티칸에 '아테네 학당'을 그렸고, 미켈란젤로는 시스틴 예배당에 '천지창조'를 끝낸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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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 Clouet, François I of France, c. 1530. Louvre Museum


프랑소아 1세와의 우정


1515년 밀라노를 정복한 프랑스의 왕 프랑소아 1세(François Ier, 1494-1547)가 그해 12월 볼로냐에서 교황 레오 10세와 만나 협약을 체결하게 된다. 이 자리에 레오나르도가 동석했다. 루이 12세의 사위에서 21세에 전격 왕위에 오른 프랑소아 1세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르네상스 미술에 조예가 깊었다. 레오나르도는 프랑소아 1세를 위해 '움직이는 사자 로보트'를 제작했다. 사자의 가슴을 열면 백합 한다발이 나타나는 이 장난감에 프랑소아 1세는 매료됐다. 이때부터 42세 차이 나는 화가와 왕의 우정이 시작된다.


이듬해 레오나르도를 후원해주던 귀족 줄리아노 드 메디치(Giuliano de'Medici, 1479-1516)가 세상을 떠났다. 이즈음 프랑소아 1세의 초청으로 프랑스 왕족과 귀족들의 휴양지인 루아르 밸리로 가게된다. 알프스를 넘는 레오나르도의 짐 보따리에는 '모나리자(La Giocoda)'를 비롯 '밀라노 귀족 부인의 초상(La Belle Ferronnière)' '세례자 요한(St. John the Baptist)', '암굴의 성모(The Virgin on the Rocks)'와 루이 12세의 주문을 받아 그리다 만 미완성의  '성안나와 함께 있는 성모자상(The Virgin and Child with St. Anne)'도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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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useppe Cades(1750–1799), Allegory of Painting (The Death of Leonardo da Vinci),ca. 1780–99), Etching,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레오나르도는 그의 제자이자 파트너였던 프란체스코 멜찌(Francesco Melzi, 1491 – 1570)를 프랑스로 데려가 루아르밸리의 매너하우스 클로 뤼세(Clos Lucé)에 거주작가로 들어갔다. 왕의 휴양처였던 샤토 앙부아즈(Château d'Amboise) 옆이었다. 레오나르도는 프란체스코와 이곳에 작업실을 꾸미고 후원금을 받으며 살았다. 


1517년 뇌졸중을 일으켜 오른쪽 반신이 마비됐으나, 왼손잡이라 드로잉은 지속할 수 있었다. 루아르 밸리 생활 3년 후인 1519년 5월 2일 천재는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67세, 샤토 앙부아즈의 생 플로랑탱 교회에 묻혔다. 프랑스 혁명 당시 유해가 작은 예배당 생 위베르로 이동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탈리아에서는 그의 머리채 진위여부 DNA 검사를 할 계획이다. 한 미국인이 소장하고 있던 이 머리채는 레오나르도의 고향 빈치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뮤지엄에서 열리는 특별전에 처음 공개될 예정이다. 레이블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머리카락(Les Cheveux de Leonardo da Vinci). 검사 결과에 따라 레오나르도의 유해의 진위여부도 확정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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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sare Mussini(1804-1879), Leonardo morente, 1828


당대 미술 비평가 조르지오 바사리는  그의 예술가 평전 'Lives of the Most Excellent Painters, Sculptors, and Architects'에서 레오나르도가 숨을 거둘 때 프랑소아 1세가 그의 머리를 자신의 팔에 안았다고 기록에 남겼다. 


레오나르도의 장례식 때는 그의 유언대로 거지 60명이 운구를 따랐다. 제자 멜찌가 레오나르도 제 1상속인이자 유산 집행자로 회화, 용구, 도서와 개인용품을 물려받았으며, 역시 제자였던 살라이와 시종 바티스타 디 빌루씨스는 레오나르도의 포도밭을 절반씩 나누어 가졌다. 그리고, 레오나르도의 형제들은 토지를 상속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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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cois Guillaume Menageot(1744–1816), The Death of Leonardo da Vinci in the Arms of Francis I, 1781. Musée de l'Hôtel de Ville  


레오나르가 사망한지 20녀년 후 프랑소아 1세는 이탈리아 조각가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에게 "회화, 조각, 건축 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 레오나르도처럼 많이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매우 위대한 철학자였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1818년 로마 주재 프랑스 대사 피에르 루이 장 카시미르 드 블라카스(Pierre Louis Jean Casimir de Blacas)가 인물화로 유명한 프랑스 화가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Jean Auguste Dominique Ingres)에게 레오나르도의 죽음과 프랑소아 1세의 모습을 담은 그림을 위임했다. 이 회화는 파리의 프티 팔레(Petit Palais)에서 소장하고 있다.



바사리가 본 레오나르도


320px-Leonardo_da_Vinci_statue_outside_the_Uffizi_Gallery.jpg 피렌체 우피치미술관 앞의 레오나르도 Wikipedia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미남에 5피트8인치(173m)의 건장한 체격으로 전해진다. 머리를 항상 어깨 아래까지 길렀으며, 수염도 길게 길러 가슴팍까지 내려왔다. 특이하게 밝은 색의 옷을 즐겨 입었으며, 모두들 긴 옷을 입을 때 레오나르도는 짧은 튜닉과 젊은이들이 입는 스타킹을 즐겨 입었다. 또한 채식주의자로 알려졌다. 


조르지오 바사리는 "대부분의 남자와 여자는 다양하고, 현격한 자질과 재능을 갖고 태어난다. 하지만, 종종 단 한사람이 기적적으로 하늘에 의해 아름다움, 우아함과 재능을 그트록 풍부하게 갖추고 태어나 다른 이들을 저 멀리 뒤떨어지게 만드는, 자연을 초월하는 경우가 있다. 모두들 이것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 진실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레오나르도는 탁월한 육체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아트스트로 연구한 모든 문제를 쉽게 푸는 훌륭한 천재성을 연마하며 모든 것에 무한한 우아함을 보여주었다. 그는 위대한 힘과 재능을 겸비했었다"라고 묘사했다.


레오나르도의 두 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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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laì by Leonardo da Vinci(left)/ Francesco Melzi, 1496–1498, Portrait by Giovanni Boltraffio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미켈란젤로처럼 동성연애자로 알려졌다. 스승인 조각가 안드레아 베로키오(Andrea del Verrocchio, 1435-1488)의 연인이었으며, 두명의 제자 겸 조수 겸 연인들과 오랜 관계를 가졌다.


# 안드레아 살라이(Andrea Salaì, 1480–1524): 레오나르도의 밀라노 포도원 인부의 아들로 1490년 10살 때 레오나르도의 조수로 작업실에 들어갔다. 조르지오 바사리는 "곱슬머리에 우아하고, 아름다운 청년으로 레오나르도가 상당히 기뻐했다"고 썼다. 하지만, 레오나르도는 살라이를 "거짓말쟁이, 도둑, 고집스럽고, 대식가라고 부르면서도 30여년간 곁에 두고 그림을 가르쳤고, 하인처럼 부렸다. 결국 살라이는 결투 중 부상으로 43세에 사망했다. 레오나르도 사망 후 '모나리자'를 상속했다는 설과 프랑소아 1세가 레오나르도로부터 구입했다는 설이 있다. 살라이가 '세례자 요한' '바커스'와 심지어는 '모나리자'의 실제 모델이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 프란체스코 멜찌(Francesco Melzi, 1491–1570): 밀라노 귀족 가문의 아들로 아버지의 권유에 의해 1506년 14살 때부터 레오나르도의 견습생이 되었다. 프란체스코는 매력있고, 우아하며, 위엄있고, 교육을 잘 받았으며, 매너가 좋고 성숙한 소년이었다. 레오나르도의 워크숍에 들어가면서 스승의 총애를 받게된다. 밀라노, 로마를 거쳐 프랑스 루아르밸리의 클로 뤼세에서 함께 살았으며, 레오나르도가 사망할 때까지 그의 곁을 지켰다. 레오나르도의 형제들에게 죽음을 알리는 편지에서 프란체스코는 "훌륭한 아버지와도 같았다"고 썼다. 프란체스코는 레오나르도의 유품을 정리하고, 보존하고, 기록하는 역할을 했다. 레오나르도 사망 후엔 이탈리아로 돌아가 결혼해 8명의 자식을 두었다. 



000.jpg *레오나르도 500주기 루브르, 런던 로열컬렉션 특별전

*메트뮤지엄 레오나르도 500주기 바티칸 소장 '성 제롬' 전시

*미켈란젤로의 코가 부러지지 않았더라면...

*메트뮤지엄 미켈란젤로 드로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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