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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1) 홍영혜: 그리니치 빌리지 '위로의 정원'
빨간 등대 (60) LaGuardia Corner Garden
그리니치빌리지 '위로의 정원'
Sue Cho, “Love chat makes a garden grow”, 2023, July. Digital Painting
날은 더운데 우유, 달걀 또 내가 좋아하는 바나나가 똑 떨어졌다. 지척인 마켓이 가기 싫어 꾸물거리다가 이렇게 속삭여 본다.
“장을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 마켓 옆 가든에 꽃구경 가는거.”
그제서야 호기심이 발동해 도파민이 샘솟는지, 장바구니를 들고 길을 나선다. 가든까지는 반 블록을 더 가야 하는데 꽃향기가 솔솔 느껴진다.
동네 모튼 윌리엄스(Morton Williams) 슈퍼마켓에 벽화가 있다. 한때 그리니치 빌리지에 살았던 작가, 예술가, 가수들이 그려져있다. 오른쪽 위로는 조앤 바에즈(Joan Baez)와 밥 딜런(Bob Dylan)도 보인다. 조안 바에즈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이름이다. 전에 한국 갔을 때 택시에서 친숙한 음악이 나오는데 택시 기사가 그 가수의 왕팬이라고 하면서 가수 이름을 대면 택시 요금을 공짜로 해주겠다고 했는데, 맞추지 못한 이름이다. 가수이자 인권, 반전운동가이기도 한 조앤 바에즈, 아직도 벽화를 지나가면 그때 기억을 되뇐다.
마켓 코너에 가늘고 긴 커뮤니티 가든이 있다. 이름은 LaGuardia Corner Garden이다. 이 정원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곳에 가면 마치 내 집 정원에 앉아 있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뉴욕시에 쪼그만 땅뙈기를 얻어서 제집 마당을 가꾸듯, 사람들이 정성껏 가꾼 손과 마음이 보인다. 정원사들이 와서 깨끗하게 정돈해 놓은 공원과는 사뭇 다르다. 뭔가 서투르지만 마음을 끄는 정원이다.
느즈막까지 정원 일을 하던 제프리가 정원의 역사를 이야기 해준다. 1981년, 자원봉사자들로 시작된 커뮤니티 가든에 그는 유일하게 남은 원년 멤버라고 한다. 그때는 크랩애플(Crab apple) 몇 그루만 덩그러니 있던 헐벗은 땅이었는데, 지금은 빼곡히 심은 가지각색 꽃 사이로 벌 나비와 새 소리를 도시 사거리 코너에 들을 수 있게 탈바꿈시켰다.
올해부터는 멤버가 없어도 매일 문을 열어 놓고 가든을 개방하기로 했다고 한다. 입구에 사람들이 앉을 수 있도록 벤치가 옹기종기 모여있다. 팬데믹 이후 동네 공공 도서관에도 화장실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는다고 못쓰게 하고, 교회들도 주중에는 문을 닫아 놓는 실정인데 뜻밖이었다. 제프리는 이곳을 가꿀 수 있는 것만도 특권인데, 사람들이 꽃을 따고 망쳐 놓는 것을 기꺼이 감수하고라도, 사람들이 이곳을 즐겼으면 한다고 말한다.
그리니치 빌리지로 이사와 동네 이웃을 사귀기 힘들었는데 이곳에서 이웃들을 만나니 좋다. 타이치 클래스에서 만난 마시아는 정원을 시간가는 줄 모르고 가꾸다가 클래스에 종종 늦게 나타나곤 한다. 어린 딸 둘과 함께 정원을 열심히 가꾸는 동양인 엄마도 대견해 보인다.
한 여인은 매일 꽃을 배경으로 사람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려놓는다고 하면서, 선글라스 끼고 모자를 써 신원을 알 수 없는 나를 한 컷 찍었다.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꽃이 hollyhock이라고 보여주었다. 우리에게는 도종환 시인의 “접시꽃 당신”으로 친숙해진 꽃이다. 키가 껑충 울타리 너머로 올라오고 울타리 밖으로 얼굴을 “까꿍”하고 내미는 것을 보아 호기심이 많은 꽃인 것 같다. 빨강, 분홍, 하얀색으로 무궁화와 얼핏 꽃 모양이 비슷하다. 잎사귀도 손가락처럼 갈라지고, 단단한 가지엔 솜털이 나있다. 그 여인은 오하이오 할머니 댁에 이 꽃이 많아 어렸을 때 발레리나라고 이 꽃으로 인형을 만들어 놀았던 기억이 난다고 한다.
From “Sing, Little Birdie” (1928) by Gertrude E. Heath (Author), Helene Nyce & Jan Cragin (Illustrator)
https://youtu.be/0m4ADnfu91k
나도 이 가든에 오면 어렸을 때 집 마당이 떠오른다. 마당에서 흙을 파고 구멍을 만들어 예쁜 꽃들을 넣어서 유리 조각을 올려놓고 텔레비전이라고 놀았던 기억이 난다. 보라색 제비꽃 씨앗이 옥수수라고 하고 개미들을 잡아 불고기라고 하고, 친구는 개망초로 달걀후라이와 개여뀌로 밥을 만들면서. 언젠가 정원이 생기면, 나의 정원에 이런 꽃들을 심어보리라 상상한 적이 있다. 봄이 오면, redbud (박태기나무), 라일락, bleeding heart (금낭화), Wisteria (등나무), 여름엔 lily of the valley (은방울꽃), 빨간 Bee Balm (비밤), 보라색 Iris (난초), 꽈리, 그리고 향이 좋은 honey suckle (인동초)… 그리고 Labyrinth(래비린스)
이제 뉴욕시에 사니 그러한 정원을 가져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내 꿈속의 꽃들이 이 커뮤니티 가든에 많이 있다. 심지어는 자리를 많이 차지하는 래비린스까지도 이곳에 있다. 콘크리트에 파란 칠을 해서 좀 후지기는 하여도. 가끔 래비린스를 걸으면서 위로와 인사이트를 받는다. 가장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 바로 출구가 있고, 금방 빠져나갈 것 같은 지점에 출구는 멀리 있다.
우리의 삶도 그런 것 같다. 지금 상태가 안 좋고 바닥을 칠 때, 이제 차고 올라갈 것밖에 없다는 희망이 있고, 가장 잘 되고 있을 때 내리막길을 생각한다. 오늘도 장에 갔다 오는 길에 래비린스를 돌았다. 머리에 떠오르는 영감이나 메세지는 없고 땡볕이어서 빨리 나오고 싶었다. 오늘은 꽝이다. 어디나 사람 사는 곳, 바로 여기에 잘 찾아보면 우리에게 위로를 주는 공간이 있는데, 항상 멀리서 해맸던 것 같다. 라과디아 코너 가든, 파랑새를 찾은 기분이다.
Sue Cho, “Pink Orange Hollyhock Plant Flowers”, 2023, July. Digital Painting
홍영혜/가족 상담가
수 조(Sue Cho)/화가
미시간주립대학에서 서양화와 판화를 전공하고, 브루클린칼리지 대학원에서 수학했다. 뉴욕주 해리슨공립도서관, 코네티컷주 다리엔의 아트리아 갤러리 등지에서 개인전, 뉴욕한국문화원 그룹전(1986, 2009), 리버사이드갤러리(NJ), Kacal 그룹전에 참가했다. 2020년 6월엔 첼시 K&P Gallery에서 열린 온라인 그룹전 'Blooming'에 작품을 전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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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의 정원'을 읽었습니다. 읽고나니까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어떤 글은 자기 자랑을 너무 늘어나서 미숙해 보이고 불편해 지는데, 홍영혜씨의 글은 달리지도 뛰지도 않으면서, 그냥 부담없이 걷다보면 마음이 차분해지는 글입니다. 그런데 조그만 공원에 꽃 종류들이 어찌 그리도 많은지요?
그중에서도 crab apple나무가 어떻게 생겼나 궁금합니다.
저는 그 시절 조앤 바에즈나 밥 딜런같은 60년대 반전(월남전 반대)가수보다는 Peter, Paul, and Mary-셋이 기타를 치면서 부르던 노래를 더 좋아했어요. (Puff the magic dragon으로 열광) 조앤 바에즈와 피터 폴 메리를 떠올리게 하는 홍영혜씨의 위로의 가든이 나에게도 위로의 가든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수 조화가의 그림은 색상이나 배경이 행복을 느끼게해 줍니다. 꽃을 배경으로 탁자에 앉은 두 여인과 개의 표정이 행복을 만끽하고 있음을 쉽게 느끼겠습니다.
-Elaine-
영혜 언니 따라 여기 한 바퀴 돌던 추억이 떠오릅니다. 그땐 흠.. 별로 화려하지않고 자그마한데 선배가 마이 좋아하시는구나 했는데 이런 역사와 사연과 내러티브가 있네요. 관심과 sarang이 사물을 아름답게 합니다. 이십대 어릴 때 서울을 떠났었건만 꽃 이름은 저보다 훨씬 많이 기억하시네요... 폭염의 새벽을 잔잔한 미소로 깨운 글 행복하게 읽었습니다. 라구아디아 카페 지근 콩크리트 아파트 안의 자그마한 힐링 카페도 떠오르네요. 저 탁자 앞 두 여인, 쑤 조 작가님의 멋진 그림 속 -선배와 나같다는 착각도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