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체(727)
- 강익중/詩 아닌 詩(83)
- 김미경/서촌 오후 4시(13)
- 김원숙/이야기하는 붓(5)
- 김호봉/Memory(10)
- 김희자/바람의 메시지(30)
- 남광우/일할 수 있는 행복(3)
- 마종일/대나무 숲(6)
- 박준/사람과 사막(9)
- 스테파니 S. 리/흔들리며 피는 꽃(49)
- 연사숙/동촌의 꿈(6)
- 이수임/창가의 선인장(149)
- 이영주/뉴욕 촌뜨기의 일기(65)
- June Korea/잊혀져 갈 것들을 기억하는 방법(12)
- 한혜진/에피소드&오브제(23)
- 필 황/택시 블루스(12)
- 허병렬/은총의 교실(101)
- 홍영혜/빨간 등대(69)
- 박숙희/수다만리(66)
- 사랑방(16)
(298) 박숙희: 패션디자이너가 된 공주 다이앤 폰 퍼스텐버그
수다만리 (21) 다이앤 폰 퍼스텐버그의 첫 뉴욕, 1970
유럽에서 뉴욕으로, 공주에서 패션 디자이너로...
My First New York
다이앤 폰 퍼스텐버그 Diane von Furstenberg
1970년, 그때 내 나이 스물두살, 막 에곤 폰 퍼스텐버그 왕자(Prince Egon von Furstenberg)와 결혼한 직후 뉴욕에 왔다. 나는 임신한 상태였고, 미국에서 팔려고 커다란 러기지백에 스텐실을 가득 싣고 있었다. 난 미래에 대해 좀 생각하고 싶어서 비행기 대신 배를 타고 서서히 왔다. 10월에 내가 도착했을 때 뉴욕은 가장 멋졌다. 그 아름다운 청색의 상큼함이란.
유럽에서 오면서 나는 뉴욕이 모던한 도시일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사실상 그렇지 않았다. 나는 젊은 공주였고, 맨해튼 파크애브뉴에 살면서 아이들을 길렀다는 따위의 이야기들...
하지만, 우리는 젊은 부부였고, 좋은 직함에다가, 꽤나 잘 생긴 커플이었기에 여기저기에서 초대를 받았다. 앤디 워홀(Andy Warhol), 할스턴(Halston, 패션디자이너), 다이아나 브릴랜드(Diana Vreeland, 보그지 편집장 ), 조지오 산탄젤로(Giorgio di Sant'Angelo, 패션디자이너 ), 물론 많은 유럽인들도 만났다. 우리 생활은 지노(Gino's 이탈리아 식당), 엘레인(Elaine's)와 라 그레누이(La Grenouille) 등지에서 날짜가 고정되어 있지않은 축제였다.
그리고, 난 디너 파티를 수없이 열었다. 지금도 명백하게 기억하는 것은 수퍼마켓에 가면 50달러에 파스타, 샐러드, 커다란 햄까지 살 수 있었다.
독일 왕족의 며느리(공주)에서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가 되기까지 다이앤 폰 퍼스텐버그(Diane von Fürstenberg)의 인생은 한편의 동화와 같다.
1946년 뉴이어스이브 벨기에 브뤼셀, 유대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의 본명은 다이앤 시몬 미셸 할핀스. 아버지는 몰디바 출생이며, 어머니는 그리스계로 홀로코스트 생존자다. 어머니는 다이앤을 낳기 전 18개월간 아우슈비츠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살아남았다.
모친의 생존 의지 DNA는 성공에 대한 야망의 DNA로 전이되었을까? 다이앤은 유럽을 휘저으며 유목민처럼 살았다. 마드리드대학을 다니다가 중퇴 후 제네바대학교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그리고, 파리로 이주해 패션사진가 알버트 코스키의 조수로 일했다. 그후엔 이탈리아로 가서 섬유재벌 안젤로 페레티의 공장에서 견습생으로 일하면서 컷, 컬러, 직물에 대해 배운다. 여기서 첫 실크 저지 드레스를 디자인하게 된다.
그녀 나이 열여덟살, 제네바대학 유학 시절 독일계 왕자 알렉산더 폰 퍼스텐버그와 사귀다 임신한다. 1969년 여름 프랑스에서 결혼식을 올리나 유대인 신부에 반대한 신랑 아버지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다이앤 할핀스는 결혼 후 다이앤 폰 퍼스텐버그에 공주 작위까지 받았지만, 커리어를 포기하지 않은 모던 여성이었다.
결혼한지 이듬해 뉴욕에 온 것도 패션디자이너로서의 꿈을 완성하기 위해서였다. 임신 상태에서 디자인한 퍼스텐버그는 뉴욕에서 보그 편집장 다이애나 브릴랜드를 만나 칭찬을 들은 후 뉴욕패션위크에 이름을 올리면서 디자이너로서 비상하게 된다.
하지만, 두 아이를 낳은 후 왕자 남편과의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남편 에곤은 성적인 모험심으로 충만한 양성애자였다. 공주는 잠 못 이루고...다이앤은 파크애브뉴의 데카당트한 삶에서 벗어나고 홀로 서기로 작정한다. 1973년 부부는 별거에 들어갔고, 10년 후 이혼에 이른다. 하지만, 다이앤은 로열의 후광인 성 '퍼스텐버그'를 버리지 않았다.
다이앤 폰 퍼스텐버그가 뉴욕 패션계의 스타가 된 것은 1974년. 니트 저지의 '랩 드레스(wrap dress)를 디자인하며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허리를 감싸며 바디라인을 강조하는 랩 드레스는 페미니스트 운동이 한창이던 1970년대의 대표적인 패션 아이콘이 된다. 남성에게 '파워 수트(power suit)가 있었다면, 워킹 우먼에겐 '랩 드레스'가 있었다. 특히 와이셔츠 컬러 랩 드레스는 페미닌한 페미니스트 룩이었다. 랩 드레스는 1976년 100만점 이상이 팔려나갔고, 메트로폴리탄뮤지엄 커스튬인스티튜트의 컬렉션으로 들어간다. 1976년 뉴스위크 잡지는 퍼스텐버그를 커버로 "코코 샤넬 이후 가장 시장성있는 여성"이라고 찬사를 보낸다.
1980년 퍼스텐버그는 '아메리칸 지골로(American Gigolo)' 촬영을 끝낸 젊은 배우 리처드 기어와 데이트를 하기도 했다. 누가 그를 거부하랴?
이제 다이앤 폰 퍼스텐버그(DVF)는 세계 70여개국에 45개의 부티크를 운영하고 있다. 본점은 맨해튼 미트패킹디스트릭트, 하이라인 인근에 두고 있다. 2006년부터 미패션디자이너위원회(CFDA, Council of Fashion Designers of America) 회장을 지내고 있다. 2012년 포브스지는 세계 경제계 파워 여성 20인에 선정했으며, 2015년엔 타임지의 '영향력있는 인물 100인'에 꼽혔다.
아직도 그녀의 대표작은 랩 드레스. 2009년 미셸 오바마가 백악관 크리스마스카드에 랩드레스를 입고 등장했다. 2014년엔 랩드레스 탄생 40주년을 기념한 특별전 'Diane von Furstenberg: Journey of a Dress'이 모스크바, 사웅파울루, 베이징, LA 등지에서 순회로 열렸다.
2001년 같은 유대계인 언론재벌 벤 딜러(Ben Diller)와 결혼 후 딜러-폰퍼스텐버그가족재단(The Diller–von Furstenberg Family Foundation) 설립, 자선사업에 박차를 가하며 하이라인 공원에 2천만달러를 쾌척해 화제가 됐다. 그리고, 뉴욕의 파워 커플로 자리매김했다. 한편, 전남편 에곤 폰 퍼스텐버그 왕자와 사이에는 1남 2녀(알렉산드르, 타티아나 데지레)를 두었다. 에곤 폰 퍼스텐버그는 FIT에서 공부한 후 패션디자인에 뛰어들었고, 저서도 집필했다. 그러다 2004년 57세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