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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1) 이영주: 몬태나 목장의 양털 깎는 날
뉴욕 촌뜨기의 일기 (59) Sheep Shearing Day
몬태나 목장의 양털 깎는 날
5월은 양목장에선 양털깎는 달(Sheep Shearing Month) 입니다. 오는 7월 2일 결혼하는 막내 사위 후보가 몬태나에 양목장을 가지고 있어서 양털깎는 구경을 할 수 있었습니다. 양털 깎는 날은 끝나고 나서 그 자리서 밤 10시 경까지, 늦게까지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게 전통이라고 해서 가기 전부터 궁금했습니다.
양털깎기는 랜치의 가장 큰 Barn에서 진행됐습니다. 4명의 기술자가 2명씩 교대로 깎았습니다. 제가 본 것은 Ben과 Brian 이었는데, 브라이언은 손이 무척 빨랐습니다. 한 마리 깎는데 걸리는 시간은 평균 3분.
양들은 길게 일렬로 서 있었습니다. 맨 앞에는 경비병 역할의 양이 한 마리 얼굴을 마주보며 서있습니다. 거기 아무도 없으면 양들이 앞으로 움직이지 않아서 그렇게 맨 앞에 얼굴을 마주 보게 끝날 때까지 세워둔다고 합니다. 털을 깎는 양들은 모두 임산부들이어서 털을 깎으면 박을 엎어 놓은 것같은 둥글게 부푼 배가 나타났습니다. 얘들은 씨받이라서 살아남은 것이고, 다 자란 아기양들은 가을에 이미 고기용으로 다 팔려나갔습니다. 그 양을 우리가 맛있다며 먹었다는 생각을 하니 뭔가 기분이 묘했습니다.
양은 문을 열고 두 앞발을 들어 꺼내서 양치기가 자기 두 발 사이에 고정시키고 연장으로 털을 깎기 시작합니다. 깎는 작업엔 일정한 순서가 있습니다. 그렇게 순서대로 리드미컬한 동작으로 능숙하게 쭉쭉 털을 깎는데, 아프지 않은지 마치 애무받는 것 모양 대부분 얌전하게 이발하는 양들의 모습이 신통했습니다. 때로 반항하는 녀석도 있다는데, 제가 보는 동안은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털을 깎는 작업은 마치 레슬링 시합 같았습니다. 그 무거운 양을 오직 한 손과 두 다리 사이로 컨트롤 하면서 요리조리 돌려가며 쉬지않고 털을 미는 모습이 그러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하나의 예술작품을 만드는 과정을 보는 것도 같았습니다. 마치 흙으로 도자기 만들 때, 자신이 원하는 모양으로 만들기 위해 물레를 돌리던 기억과 오버랩 되기도 했습니다. 보는 동안 많은 생각과 감동이 오갔습니다. 별로 불편해보이지 않았음에도 털을 다 깎은 양들이 쏜살같이 반 뒤쪽으로 달려가는 걸 보면 억압돼서 이발당하는게 어지간히 힘들었다는 증명인 것같아 보는 마음이 편치는 않았습니다.
브라이언은 12년 전, 처음 양털 깎는 일을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사위후보 리차드의 랜치에서 였다고 합니다. 지금은 몬태나 최고의 양털깎이로 명성이 높습니다. 시즌이 끝나는 5월말까지 하루도 쉬는 날없이 스케줄이 꽉 차있다고 합니다.
양털은 일년에 한번씩 깎아주는데, 시기는 랜치마다 다르지만 2월부터 시작해 5월말에 끝냅니다. 그렇게 깎아주는 이유는 여름에 피부병을 예방하고, 털이 길면 아기양이 젖을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양털깎이 시즌이 끝나면 브라이언의 또 다른 직업은 목수입니다. 양털깎이는 한시적인 직업이니 그렇게 다른 직업들을 가진다고 합니다.
큰 반이었지만, 목장을 작년에 새로 맡은 일라이자 부부와 일꾼들, 우리 식구, 그리고 곧 글렌과 글렌 딸 애니부부, 뉴욕에서 놀러온 애니 친구 부부까지 합류해서 반이 제법 북적거렸습니다. 그런데 마스크를 쓴 사람은 우리 가족 뿐이었습니다. 건강에 문제가 있는 저는 조심스러워서 별로 오래 머물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저녁 7시가 넘어서야 우리 식구들과 글렌네 그룹이 저녁식사하러 들어왔습니다. 사람이 많으면 조심해야 하는 저는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 제 방으로 미리 올라왔습니다. 저녁 메뉴는 양버거와 양갈비였습니다. 글렌이 양상치에 깍둑 썬 고구마(오븐에 익힌), 호박씨, Goat Cheese를 넣은 심플한 샐러드를 해왔는데, 양고기와 잘 어울렸습니다. 9명의 어른과 블루가 있던 저녁은 반에서 전작이 있던 터라 시작부터 왁자지껄했습니다.
저녁식사 후엔 화이어 플레이스 앞에 둘러앉아 와인을 마시면서 뭐가 그리 재밌는지 와하하! 큰 소리로 웃는 리차드의 우렁찬 웃음소리, 깔깔깔 풍선 터지듯 웃음보 터뜨리는 둘째의 웃음소리, 수줍음 없는 막내의 활기찬 웃음소리, 소프라노로 뭔가 맹렬하게 속사포 쏘는 목소리, 콧소리 나기 시작한 크리스찬의 익살스런 목소리 등, 이층에 있는 제 방까지 그들의 즐거움이 다 전달되었습니다. 아래층의 폭발적인 흥겨운 잔치는 자정이 지나서야 겨우 끝이 났습니다. 저도 그 자리에 동석하고 싶어 근질근질해서 몇번 들썩였지만 애써 참았습니다. 저도 사람이 좋고, 파티가 좋습니다.
어차피 저는 체력이 딸려 저녁식사 후엔 평소에도 미리 퇴장합다. 하지만 방에서 가족과 친구들의 유쾌한 만남을 웃음소리와 말소리로 만나는 재미도 매우 좋았습니다. 팬데믹으로 서로 만나지 못하니 사람이 그리운 시대가 되었는데, 오랫만에 비슷한 친구들과 만나 회포를 풀며 가족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은 제가 즐거운 것만큼이나 좋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 막내와 둘째의 얼굴이 환희로 반짝반짝 빛났습니다. 밤 10시 40분쯤 침대로 갔다는 블루는 8살 짜리가 퀴즈까지 내어 어른들을 쥐었다 폈다 했다며 엄마인 둘째가 뿌듯해했습니다. 블루는 이모네와 엄마 아빠에게 절대 말하지 말라고 다짐하더니 제게도 문제를 냈습니다.
“젊어선 키가 크고, 늙어선 키가 작은 게 뭘까요?”
뭐지? 전혀 감조차 잡히지 않는습니다. 사람이라고 대답하고 싶었는데, 사실 사람은 반드시 젊다고 키가 크지도 않고, 나이 먹었다고 작지도 않으니 탈락. 도대체 뭘까. 어제 글렌도 사람이라고 대답했었다며, 그건 정답이 아니라고 블루가 단호하게 선을 긋습니다. 그럼 뭐지? 도무지 모르겠다고 하니 블루는 정말 모르느냐, 대답을 포기하느냐, 확인한다. 그래서 그렇다고 했더니 정답을 알려주었습니다. 정답은 Candle. 아하, 당했다! 블루는 유머집 책이 있어서 가끔 거기서 한 가지씩 우리한테 써먹습니다. 그걸 한번도 맞추지 못하고 우리 어른들은 늘 당하는 편입니다.
암튼 Sheep Shearing Day 덕에 색다른 경험도 했고, 양털깎이를 통해 또하나의 새로운 신세계를 알게 됐습니다. 참으로 우리 인생은 끝없는 배움의 영원한 학교입니다.
이영주/수필가 강원도 철원 생. 중앙대 신문학과 졸업 후 충청일보 정치부 기자와 도서출판 학창사 대표를 지냈다. 1981년 미국으로 이주 1990년 '한국수필'을 통해 등단한 후 수필집 '엄마의 요술주머니' '이제는 우리가 엄마를 키울게' '내 인생의 삼중주'를 냈다. 줄리아드 음대 출신 클래식 앙상블 '안 트리오(Ahn Trio)'를 키워낸 장한 어머니이기도 하다. 현재 '에세이스트 미국동부지회' 회장이며 뉴욕 중앙일보에 '뉴욕의 맛과 멋' 칼럼을 연재 중이다. '허드슨 문화클럽' 대표로, 뉴저지에서 '수필교실'과 '북클럽'도 운영하고 있다.
-Ela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