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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 이수임: 의사 부인, 화가 부인
창가의 선인장 (36) 중매결혼
의사 부인, 화가 부인
Soo Im Lee, Picking, 2006, gouache on paper, 12 x 9 inches
의사인 육촌 오빠가 중매쟁이를 통해 결혼했다. 서로 조건만 보고 한 결혼인데도 천생연분인 듯 잘 살았다.
내가 결혼할 나이가 되자 아버지도 육촌 오빠를 결혼시킨 중매쟁이 수첩에 내 이름을 올렸다. 중매하는 사람이 집에 왔다. 집안을 둘러보고 이것저것 물어보며 메모했다.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키가 몇 센티냐고 물었다.
“153센티데요.”
“다른 조건은 그런대로 괜찮은데 키가 문제네! ”
"일단 156센티라고 기록할 테니 선 보는 날 높은 구두를 신어요.”
의사와 선을 보라고 연락이 왔다. 옷 한 벌 얻어 입고 높은 구두를 신고 불편한 걸음걸이로 선 보러 갔다. 남자가 시큰둥하니 말이 없다. 술이나 한잔하며 이야기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은데, 상대는 저녁도 먹지 않고 일어섰다. 내게 흥미가 없나 보다.
며칠 후 중매쟁이로부터 연락이 왔다. 우리가 아파트 한 채 사주는 조건으로 결혼하는 게 어떠냐고.
아버지는 “너 아파트 한 채 사서 의사와 결혼할래? 말래? 네가 원하는 데로 해 줄게.” 아무래도 의사와 나를 저울질 하니 나에게 아파트 한 채를 얹어야만 저울추가 평형이 될 수 있었나 보다. 나는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며 “말래요.” 아버지의 얼굴이 갑자기 환해졌다.
단지 화가라는 이유만으로 애인 부모가 극구 반대해 결혼하지 못한 채 외롭게 지내는 대학 남자 동기를 뉴욕에서 만났다. 그의 여동생도 그림을 전공하니 함께 어울리다 친구가 되었다. '내 오빠지만 화가와 결혼하면 힘들다. 전공을 살려 그림을 계속하려면 경제적으로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사람과 결혼을 해야 한다’며 충고했다.
결국, 그녀는 의사와 ‘성공적인’ 결혼을 했다. 그러나 아파트 한 채를 얹어야만 의사와 결혼할 수 있는 나는 천상 화가를 남편으로 택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화가와 결혼한 것이 생각보다 나쁘지만은 않을 줄이야!
항상 그림 그리는 분위기에서 사니 ‘서당개 삼 년이면 글을 읊는다’고 자연스레 붓을 도로 잡을 수 있었다. 남편이 사온 재료들을 슬금슬금 빼돌려 부엌에서 작은 그림을 그렸다. 남편이 스튜디오를 비울 때는 커다란 화폭에 신나게 그어 대며 스트레스도 풀었다.
그림 그릴 수 있는 분위기는 물론이고 '화가 부인'이라는 이름으로 변명할 수 있는 일도 많았다. 부모 형제 일가친척들에게 시달리지 않았다. 잘못 건드렸다가는 오히려 도와줘야 하니 살아주는 것만도 고마워했다. ‘잘 되면 아내인 내 덕이고, 안되면 화가라는 남편의 직업 탓’이니 당당하고 마음이 편했다.
의사와 결혼한 시누이는 집 사고 아이들 키우며 차고에서 그림 그린다. 그림과는 거리가 먼 분위기에서 시작하느라 준비과정이 오래 걸렸다. 사소한 모임에서도 그녀가 의사 부인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알면 다음날로 당장 ‘우리 아이가 열이 있는데 어떻게 하지요?’ 하며 전화가 온단다. 일가친척들도 아프면 연락해서 도와 달라니 남편에게 미안해 사람 만나기가 두렵단다.
뭐 시누이나 나나 아직은 무명으로 뜨지도 못한 채 붓을 잡고 있지만, 그 먼 옛날 아파트 한 채를 조건으로 할 뻔했던 결혼을 생각하며 아버지의 제안에 ‘말래요’ 라고 한 대답이 나를 이렇게 자유롭게 할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