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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파니 S. 리/흔들리며 피는 꽃
2019.02.20 14:10

(400) 스테파니 S. 리: 그래도 100점짜리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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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며 피는 꽃 (40) 엄마 점수 38점?


그래도 100점짜리 딸 


2.JPG  Math test result


천재인줄 알았던 우리 딸이 38점을 받아왔다.

뜬금없이 “엄마도 어릴때 산수 못했다고 했지?” 하고 물어보기에 이상하다 싶어 다그치니 그제야 아빠한텐 말하지 말아달라며 머뭇머뭇 산수 시험지를 내민다. 제 딴에도 큰일났다 싶었는지 며칠을 숨기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83점도 아니고 무려 38점! 이게 웬일인가. 당부하지 않아도 내가 애 아빠한테 말 못하게 생겼다.


아이가 3학년이 된 후 가끔씩 80점대 시험지를 들고오긴 했지만 그 정도는 실수할 수도 있다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Study more’ 라는 빨간색 메모가 적힌 반타작도 못한 시험지를 마주하게될 줄은 정말 몰랐다. 뒤늦게 내 공부하겠다며 딸애 학자금을 털어 대학원에 갔는데… 탄력받아 더 늦기전에 공부를 하겠다며 박사 과정까지 알아보고 있던 와중에 비상이 걸렸다. 


졸업을 했으면 번듯한 직장을 잡아야지 무슨 공부를 또 하냐며 탐탁치 않아하던 남의 편 앞에 면목도 없거니와, 그동안 내가 너무 아이 공부에 너무 소홀했었던가 싶어 아이한테도 몹시 미안하다. 내 공부할 시간에 아이 공부에 좀 더 신경썼으면 이렇게까지 뒤처지지는 않았을텐데… 마치 나의 엄마 점수가 38점이라는 것만 같다. 대학원만 졸업하면 미뤄뒀던 그림도 그리고, 공부도 더 해서 다시 정규직으로 일 할 수 있겠다는 기대에 부풀었는데 삶은 이렇게 내게 정신차리라고, 너는 이제 엄마라는 걸 잊지 말라고 하는구나... 


많이 울고, 잠이 없고, 예민하긴했어도 침도 잘 안흘려 턱받이도 필요없던 영특한 아가였다. 떼놓기 걱정스럽던 아이가 무사히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커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애가 영재는 아니고 평범한 아이란 걸 깨달았지만 그저 기특했다. 그런데 이렇게 일찍 공부걱정을 하게될 줄이야… 하필 모자란 과목이 나도 학창시절 포기하고 지냈던 수학인지라 혼내지도, 가르치지도 못하겠으니 이걸 어쩌나… 이런 건 아빠를 닮아도 되는데 어째서 닮지 말아야 할 것까지 닮아버리는 건지, 무섭도록 정직한 유전자의 힘마저 원망스럽다. 



1.JPG Stephanie S. Lee, Tigers (work in progress)


겨우 서너살 된 애들을 영재반에 넣겠다고 공부시키던 엄마들을 보며 자존감 낮은 극성 엄마들이라 비웃었는데… 애들은 건강하고 잘 놀면 되는 거라며 자신신만만했는데 막상 닥치니 나도 별 수 없네. 산수 점수 한번에 휘청, 그간의 신념이 뿌리째 흔들린다. 최근 인기리에 종영한 드라마 ‘스카이 캐슬’속 엄마들은 자기를 다 버리고 자식 교육에 올인하기라도 했지, 나는 대체 자식을 위해 뭘 했나… 재밌다며 드라마나 보고, 내 공부하겠다며 자식공부는 뒷전이지 않았나… 후회와 자책이 밀려오며 만감이 교차한다. 


아직 모르는 것도 많고, 배우고 싶은 것도 많고, 저깊이 심연으로 내려가 탐험해보고 싶은 것 천진데… 육아와 일상에 쫒겨 내적 탐구와 사색은 불가능한 것이 되었고, 조용히 앉아 커피 한잔 마시는 시간도 사치가 되었다며 한탄했는데 실은 아이한테 대단히 뭘 해준 것도 없으면서 아이 때문에 하고싶은 것을 못한다며 아이 탓을 하고 있었던 건 아닌가 싶다. 아이가 생겼는데 나는 왜 아직 내가 더 중요한 이기적인 사람인건지… 아직 한 사람의 인간으로 성장하려면, 한참 멀었는데 준비도 안된 채 남들 따라 애를 낳아 이렇게 헤매는건가 하는 마음마저 든다.


그래도 한탄은 나중에 하고 우선은 아이에게 집중하기로 한다. 잘게 조각난 나의 하루처럼 조각내 칠하던 호랑이 그림들도 잠시 놔두고, 더 깊이 자맥질 할 생각도 접어두고 당분간 얕은 물에서 아이와 함께 물장구 치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하자. 저 깊은 바닷속은 언젠가 아이가 크면 함께 내려가 보면 되지 뭐. 그때 내가 너무 늙어 잠수할 호흡이 남아있지 않다면, 아이가 내려가 보고 온 걸 전해 듣는것도 나쁘지 않겠지… 지금이라도 아이 공부에 신경을 써주자 결심을 하고 아이 학습지부터 잔뜩 샀다. 


그런데, 영어도 모자라고, 수학 머리는 더 모자란지라 봐도 모르겠으니 내가 가르치지를 못하겠다. 다른 학부모들이 선행학습이며 학습지 이야기에 열올릴때 쓸데없다 생각해 흘려들은 정보들이 이렇게 귀하고 아쉬울줄이야... 뒤늦게 여기저기 도움을 청해봤지만 이미 정원이 다 차고, 시간도 안맞고… 제대로 된 학원 찾는 일이 만만치 않다. 마음이 급해져 전화번호부를 꺼내 근처 학원들에 죄다 연락을 했다. 세상에, 학원이 이렇게 많은데 나만 모르고 있었구나…



3.jpg Fox craft by Claire


심란하고 우울한 내 마음처럼 우중충하고 눈까지 내린다. 그래도 폭설 탓에 일이 취소되어 학교에서 아이를 픽업해 아이가 좋아하는 버블티 집에들러 삼각김밥을 하나씩 먹고선 주말에 가보려던 학원들을 찾아갔다. 첫번째 학원은 개인교습을 추천하는데 가격도 만만치 않지만 너무 멀고, 두번째 학원은 학년별 구분없이 선생님 한명이 관리하는지라 체계적인 지도가 불가능해 보였다. 


눈길을 헤치고 학원을 오가는 내 마음은 무거운데 아이는 눈이 온다고 마냥 신났다. 눈발도 세지고 날도 어두워져서 포기할까 했는데 그래도 죽으란 법은 없는지 마지막으로 방문한 방과후 학원은 실망스럽지 않았다. 이미 한달 늦었지만 등록이 가능하고, 자격증 있는 선생님들이 숙제를 봐주신다고 하니 나보다는 낫겠지 싶어 당장 등록했다. 천진난만한 아이를 급하게 학원으로 밀어넣고서야 안도하는 내 마음이 편치많은 않다. 갑자기 내일부터 새로운 곳으로 가 적응하기가 쉽지는 않을텐데…


다행히 아이는 새로운 방과후 학원이 좋다며 잘 적응하는듯 하다. 포부있게 잔뜩 사다둔 문제지가 밀려있지만 주말이고, 갑자기 안하던 공부를 시키려니 좀 안스럽기도해서 하고싶은 걸 하게 뒀더니 저 닮은 귀여운 여우를 만들어온다. 그래, 저 깊은 바닷 속에 뭐가 있는지 좀 모르고 살면 어때, 이렇게 물가에서 아이가 주워오는 작은 보물들을 보는 것도 괜찮다. 절망하고 실망하는 건 욕심이 많기 때문이라고 하던데, 건강하고 행복하게만 자라달라던 기도는 잊고 공부까지 욕심을 내 미안하다. 그깟 산수 좀 못하면 어떠냐, 엄마한테 너는 언제나 100점인 착하고 이쁜 딸이란다. 



Stephanie_100-2.jpg Stephanie S. Lee (김소연)/화가, 큐레이터 

부산에서 태어나 예술고등학교 졸업 후 1996년 뉴욕으로 이주했다. 프랫인스티튜트 학부에서 그래픽디자인을 전공한 후 맨해튼 마케팅회사, 세무회사, 법률회사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딸을 출산하면서 한동안 전업 주부생활을 했다. 2010년 한국 방문 중 우연히 접한 민화에 매료되어 창작민화 작업을 시작했다. 2014년 한국민화연구소(Korean Folk Art)를 창설, 플러싱 타운홀의 티칭아티스트로 활동하며, 전시도 기획하고 있다. http://www.stephaniesle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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