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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파니 S. 리/흔들리며 피는 꽃
2020.03.11 22:42

(470) 스테파니 S. 리: 노망인가, 건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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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며 피는 꽃 (42) 내 머리 속의 지우개

노망인가, 건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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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ute Chasing I & II | 2016 | Stephanie S. Lee | Color pigment and ink on Hanji | 25” H x 13” W each


즘 들어 건망증이 부쩍 더 심해지는 것 같아 걱정이다. 마흔을 넘긴 후부터는 하루가 다르게 체력도 정신력도 떨어지는게 몸으로 확연히 느껴져 안그래도 초조한데 전에 없던 실수들을 자꾸 하니 속상하다.


일주일이 어찌나 빨리 가는지 요일을 헷갈려서 목요일을 수요일인줄 알고 ‘청소하는날 Thursday 10:30am - noon’ 이라고 쓰여진 길에 오늘은 왠지 자리가 널널한게 운이 좋다며 버젓이 주차를 해두고 $45짜리 티켓을 받기도했다.


주차를 해두고 차를 못찾아 동네를 몇 번이나 돌았던 황당한 경험도 근래들어 두번이나 있었다. 한번은 복잡한 Bell blvd. 근처에 동전 안 넣어도 되는 자리를 용케 찾아 기쁘게 주차를 하고 오랜만에 모인 드로잉룸 멤버들과 만났다. 와인과 작은 요리(small dish)가 맛있는 아페리티프 비스트로(Aperitif Bistro)에서 기분좋게 저녁을 잘 먹고 나왔다. 그런데, 차를 찾을 수 없었다. 차를 찾아서 소화가 다 되도록 동네를 걸었다. 그날 따라 우중충하고 스산한 날씨였는데 딸 아이와 지인까지 함께 대동하고 39 Ave.부터 36 Ave. 사이를 몇번이나 왔다갔다 해야했다.


분명 바로 이쯤에 차가 있어야 하는데… 주차해놓고 내릴 때 건너편에서 본 저 집의 반짝이는 창문 장식도 기억이 나고… 나의 본능은 38 Ave.와 39 Ave. 사이에 차를 대어놓았노라고 확신하고 있는데, 감쪽같이 내 차만 없어서 혹시 토잉을 당한걸까, 311 에 전화를 걸어 알아봐야 하나 심각하게 걱정했다. 밥 잘 먹고 나와서 황당해 하며 같이 차를 찾아 헤매던 언니가 차를 끌고 가면, 바닥이든 어디든 표시를 해두니 토잉은 아닐거라 해서 안심하고 다시 몇 번을 같은 길을 돌았다. 그러다가 혹시나 하고 214 Place가 아닌 215 St.로 가봤더니 그 길에 차가 있었다.


‘길 중간 이만치’ 까지의 기억은 맞았는데 전혀 다른 길에서 찾고 있었으니... 어설픈 확신이 얼마나 무서운지 깨달은 매우 황당한 경험이었다. 그때는 그런적이 처음이라 그럴수도 있겠거니하고 넘어갔었다. 루즈벨트 몰(Roosevelt Mall) 주차장에서 차를 못찾은 적은 몇번 있었지만 길에 세워두고 못찾은게 처음이라면 처음이겠지만. Bell blvd.는 레스토랑들이 많아서 늘 복잡하고 주차 자리 찾기가 힘든 데다 주차 할 곳을 찾느라 같은곳을 뱅글뱅글 돌았고, 간만에 신이나서 French wine flight 까지 해치웠으니 안개까지 드리운 깜깜한 밤에 방향감각을 잃어 헷갈릴 수도 있었겠거니 했다. 오래 걷느라 지쳐 옆에서 칭얼대다 나한테 괜한 분풀이를 당한 딸애는 충격이 꽤 컸던지 아직도 스트릿 파킹을 할때면 내가 그때 차를 못찾았던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얼마안가 차를 못찾는 일이 또 생겼다. 두번째는 덜컥 겁이 났다. 까치 호랑이 그리기 민화 워크숍을 하러 간 포레스트힐의 튜로 대학(Touro College) 캠퍼스 근처에 차를 주차했다. 혹시나 또 못찾을까봐 단단히 기억해야지 하며 눈을 부릅뜨고 길을 살펴두었다. 그런데도 워크숍을 마치고 나와서 엉뚱한 방향으로 한참을 걸었다.


저번에는 익숙한 베이사이드에서 헤메었지만 포레스트힐은 처음 와보는 낯선 동네인데다 꽤 늦은 시간이라 어두운 거리를 미술도구까지 한가득 싸들고 정처없이 걷자니 무서워서 눈물이 다 나려고 했다. 전화를 걸어 구조요청이라도 해야 하나 싶어 폰을 꺼냈다. 다행히 기특한 아이폰이 주인의 건망증을 예견했는지 주차 위치를 지도에 표시해뒀기에 "땡큐! 땡큐!"하며 겨우 차를 찾을수 있었다. 전화기마저 잃어버리진 않아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똑똑한 기계가 도와줬기 망정이지 그 밤에 미아가 될 뻔 했다.


젊은 여인이 알츠하이머 증후군에 걸려 기억을 잃어가는 내용의 영화 '내 머리속의 지우개' 생각도 나는 것이, 영 꺼림칙했다. 정기검진을 받으러 간 날 주치의 선생님께 사정을 설명하고, 정신과 검진을 받아봐야 하는게 아닌가 심각하게 여쭤봤다. 선생님은 웃으시며 "현대인들이 워낙 하는 일이 많고, 핸드폰이며 이것저것 신경을 분산시킬 요인이 많아 그렇다. 아직 젊은데 괜한 걱정말라" 하셨다. ‘그 영화를 아직 못보셨나보다... 그리고 정신을 뺐는다는 그 핸드폰이 되려 저를 도와줬지 말입니다...’ 속으로 생각했으나 대수롭지 않은 일인듯 나만 그런건 아니라고 말씀해 주시니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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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dern Desire (detail) | 2016 | Stephaine S. Lee | Color pigment and ink on Hanji | 31” H x 25” W

 

런데 오늘은 일하다 문득 귀를 만져보니 오른쪽 귀걸이가 한 짝 없다. 아 이런... 정말 아끼는 귀걸이 인데.. 오랜만에 기분 좋게 하고 나왔는데 왠일이람. 요사이 자꾸 귀걸이도 한짝씩 없어진다. 이십대때야 나이트 클럽에서 열심히 춤추다 귀걸이를 떨어뜨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지만, 요즘엔 걷는 것도 굼뜬데 왜 자꾸 한짝씩 없어지는지 모를 일이다. 두개가 있어야만 기능을 하는 장갑이나 양말, 귀걸이 같은것들이 한짝씩 없어지면, 어딘가에서 다른 짝이 다시 나올지도 모른다는 미련에 멀쩡한 남은 한짝을 바로 버리기도 뭣하고 참 성가시다.

 

어차피 고가의 악세사리들도 없고, 귀걸이를 잃어버리는 일이 잦아진 후에는 한짝씩 없어져도 체념이 빠르다. 이번에는 튀지 않으면서도 착용하면 은근히 기분을 좋게하는 짙은 자색의 보라색 구슬이 마음에 들어 아끼던 귀걸이라 꼭 찾고 싶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출근길 동선을 다시 한번 훑으며 걸었지만 못찾았다. 내내 귀걸이 생각만 하다 퇴근길에도 바닥만 살피며 걸었다. 차를 타서도 혹시나 차안에 떨어진거면 찾을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으로 운전석 아래도 구석구석 뒤졌지만 없었다. 비키니도 못입고, 하이힐도 포기했는데 이젠 달랑거리는 귀걸이도 못하고 다닐 만큼 늙어버린건가 자책하며 노을을 뒤로하는 퇴근길이 왠지 서글펐다.

 

아이를 픽업해 집에 도착하자 마자 배고프다 보채는 아이한테 기다릴줄 모른다며 괜히 짜증을 냈다.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김치볶음밥을 만들어먹고는 녹초가 되어 방으로 갔다. 옷을 갈아입고, 시계도 풀고, 비록 하나 남은 귀걸이지만 아끼던 거니 버리지는 말자 하고 빼서 걸어두려는데 어머, 귀걸이 걸이에 그렇게 애타게 찾던 나머지 한짝이 조신하게 걸려있다.


아... 하루종일 찾아 헤매던 반쪽을 찾아서 기쁜데... 뭔가 마냥 기쁘지만은 않네... 이것은 건망인가 노망인가... 앞으로 이럴 날들이 더 많아질텐데 참 큰일이다.



Stephanie_100-2.jpg Stephanie S. Lee (김소연)/화가, 큐레이터 

부산에서 태어나 예술고등학교 졸업 후 1996년 뉴욕으로 이주했다. 프랫인스티튜트 학부에서 그래픽디자인을 전공한 후 맨해튼 마케팅회사, 세무회사, 법률회사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딸을 출산하면서 한동안 전업 주부생활을 했다. 2010년 한국 방문 중 우연히 접한 민화에 매료되어 창작민화 작업을 시작했다. 2014년 한국민화연구소(Korean Folk Art)를 창설, 플러싱 타운홀의 티칭아티스트로 활동하며, 전시도 기획하고 있다. http://www.stephaniesle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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