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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8) 연사숙: 나의 인생 제 2막
동촌의 꿈 <3> 가는 해, 오는 해
나의 인생 제 2막
이스트빌리지 한식당 수길(SOOGIL)의 셰프/오너 임수길씨가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 다니엘(Daniel)에서 일하던 시절 다니엘 불루(앞줄 오른쪽에서 세번째)와 셰프들과 함께 키친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2013년 출간된 요리책 'Daniel: My French Cuisine'에 실린 사진. Photo: Thomas Schauer
“너는 커서 뭐가 되고 싶니?” 또는 방학이라 늦잠자고 게으른 모습을 볼때면 한심한 듯 “너는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니, 쯧쯧” 하시던 아버지의 잔소리가 항상 내 맘을 괴롭혔다. “흥! 뭐가 되려고 그러냐니, 뭐가 되던 되겠지 안되겠어?”하는 반문만 생겼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또 그놈의 지겨운 질문이 들어왔을 때 난 당당히 소리쳤다. “커리어 우먼이 될꺼에요!”. 아버지의 입버릇 같았던 그 질문은 ‘여자도 결혼을 하더라도 직업을 갖고 일을 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세뇌시켰다. 그래서인지 뉴욕으로 온 뒤 육아와 가사일을 전담하면서도 무언가 모를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했다. 엄마도 엄연한 직업인데 말이다.
2018년은 그런 의미에서 나의 인생 2막을 열어줬다. 영주권을 받고 아이 교육과 레스토랑 사업을 위해 최소한 뉴욕에 10년이상 살아야 겠다는 결심을 했고, 실행을 했다. 일을 벌여놨으니 누군가 책임을 져야하지 않나. 2년 동안 집에만 있던 나를 세상 밖으로 소환했다. 지난 1월 레스토랑을 오픈하고 많은 손님을 만나고, 거래처가 생기고, 소중한 직원들이 생겼다. 집과 아이 학교를 오가며 몇몇의 이웃들과 지내던 내 단조로운 삶이 완전히 바뀐 것이다. 컴퓨터랑 친하지 않았는데, 메뉴판을 만들기 위해 간단한 디자인 작업도 배우게 되고, 식당 홍보를 위한 자료 뿐 아니라 어쩌다 인터뷰 요청이 들어오면 그 답변지를 만드는 것도 내 몫이다. 필요하면 서빙도 하고, 새우 껍질을 까고, 와인병을 세고 주문을 하며 부족한 식재료를 사러 다니는 것도 내 일이다.
올해 2월의 첫날. 화재 진압용 앤설 시스템 작동오류로 주방에 잿더미를 뿌렸다. 모든 고객을 돌려보내고 모든 음식을 버리고, 주방 청소는 새벽 3시반이 되서야 끝났다. 가슴을 쓸어내린 날.
그야말로 식당은 작으나 크나 있어야 할 껀 다 있어야 하고, 잡일은 넘쳐난다. 일이 없다면 오히려 문제다. 예약 손님이 줄어들거나 할땐 괜히 불안한 마음이 든다. ‘뭐가 잘못됐나?, 메뉴에 문제가 있나?’하는 단순한 생각부터 소셜 미디어를 뒤져보기 일쑤다. 좋은 일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주방에 불이나면 제어해주는 시스템이 작동 오류로 불이 난 듯 잿더미가 되기도 했고, 우리의 첫 오픈 멤버였던 요리사 한 분이 갑작스런 병으로 만난지 몇개월 채 안돼 세상을 떠나시는 슬픈 뉴스도 있었다. 뉴욕 타임즈의 별을 받는 날 처음 고용했던 매니저가 떠나면서 서비스의 부재가 생겼고, 한 인터넷 매체의 혹독한 비평을 받기도 했다. 매해 결심하는 다이어트는 또 실패했지만, 그래도 뉴욕 컬처비트에 나의 칼럼 코너가 생기면서 글 쓰는 즐거움이 다시 생겼다.
매해 12월이 되면 지난해 품었던 많은 결심과 목표들이 결과로 모아지며 빨리 이 해가 지나가길 바라는 마음이 커진다. 실패를 뒤로하고 새로운 희망을 다시 심고 싶은 마음 때문일까. 내년 2019년은 기해년(己亥年), 황금 돼지해다. 기(己)가 땅을 뜻하는 황(黃)을 의미해 황금돼지띠란다. 모두들 다산과 행운을 의미하는 황금 돼지해를 맞아 새로운 희망 리스트를 만들고 있겠지.
"할아버지, 나 무비스타 될래요!" 선글래스에 모자를 눌러쓴다. 3살이던 알렉스(임지형)의 이 말은 곧 스쿠터를 타러 나가고 싶다는 뜻이다. 모처럼 한국에서 오신 아버지는 내가 일하러 나가면 알렉스에게 스쿠터를 사주시고, 어떻게 타는지 알려줬나보다. "야~! 무비스타 같다."란 말과 함께. 그래서인지 알렉스는 선글래스를 끼고 스쿠터를 타면 무비스타가 된다고 생각했나보다. 사실은 아빠의 꿈이었으면서.
“넌 꿈이 뭐니?” “음...난 하루하루가 너무 바빠서 그 하루를 넘기는게 일이야. 먼 미래를 꿈꾸고 싶지만, 그 하루를 넘기기 위해 생각할 여유가 없네....” 그를 처음 만났을 때 했던 대화다. 당시 그는 다니엘에 갓 들어간 시기니, 그럴만 했다. 큰 주방에서 프렌치 셰프들의 다양 발음과 새로운 용어를 알아 듣고 시키는 일을 하는 것 만으로도 머리가 쭈삣쭈삣 서는데, 미래를 꿈꿀 여유가 없었단다. 지금이라고 해서 달라진건 없다. 다만, 그의 이름을 건 식당과 그의 이름으로 나가는 요리를 시작했을 뿐.
최근 아버지는 손자인 내 아들과 영상통화를 할 때면 또 그 얘기를 꺼내신다. “지형이는 커서 뭐가 되고 싶니?” “할아버지.. 난 잘 모르겠어요..”라고 답하면 “지형이는 커서 배우가 되는 게 어떻겠니?”하신다. 아버지의 질문과 내가 그에게 했던 질문은 어쩌면 같은 것이었다. “커서 뭐가 되고 싶냐?”는 숱한 물음은 내 맘속에 ‘꿈’이란 단어를 심었고, 허구에 가까운 꿈은 현실을 지탱하는 힘이 된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과오, 실패, 부족함 등은 ‘경험’이란 단어로 모아지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또 다른 희망을 기해년에도 가져본다. 무엇을 하던 ‘커리어 우먼’이 되면 될것 아니냐고!
연사숙/ 레스토랑 수길's Mom
서울에서 태어나 중앙대 경제학과, 연세대 경제대학원 금융공학과 졸업. 한국경제TV에서 9년간 경제-금융전문 기자, SBSCNBC에서 2년간 월스트릿/뉴욕증권거래소 전문 뉴욕특파원으로 일했다. 2009년 뉴욕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 다니엘(Daniel) 수셰프 임수길씨와 결혼 후 뉴욕에 정착, 아들 알렉스를 두었다. 2018년 1월 이스트빌리지(동촌)에 남편과 함께 한식과 프렌치 테크닉이 만난 레스토랑 수길(Soogil)을 오픈, 뉴욕 타임스로부터 별 2개를 받았다. https://www.soog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