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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2) 스테파니 S.리: 미국과 썸타며 살기
흔들리며 피는 꽃 (39) 모범 시민
미국과 썸타며 살기
Knowing vs. Living, 2018, Stephanie S. Lee, 20” x 20” each , Natural mineral pigment and ink on linen
딸아이가 학교에서 연극공연을 하니까 꼭 와야 한다며 신신당부를 한다. 몇주째 들떠서 매일같이 대사 연습을 하기에 맡은 역할이 뭐냐고 물어보니 무려 ‘카운슬 멤버 #2’란다. 웃음이 났지만 역할이 아주 작은데도 즐거워하며 대사를 같이 연습해달라기에 몇줄 안되는 대사였지만 같이 읽어주며 맞장구를 쳐줬다.
연극은 'Thwack'이라는 제목의 개구리 왕자 동화와 Chicken Little 이라는 영화를 합쳐놓은 내용인데 서른명이 넘는 아이들이 배역을 나눠하다보니 대사가 적거나 아예 한마디도 없는 아이들도 있는 모양이다. 개구리가 머리에 뭘 맞고서는 하늘이 무너진다며 법석을 떨어서 온동네 사람들이 같이 고민하다 마지막에 왕자로 변하는 스토리인데 딸애는 마을 사람들이 시장과 카운슬 멤버를 부를때 나오는 네명의 카운슬 멤버중 하나다.
"Maybe we should hide."
"Look, would you stop asking so many questions?"
"Uh, right here at the school."
"We need more information."
이렇게 총 4문장의 대사를 하는데도 얼마나 열심인지…
Snapshots from the school play
그래도 운좋게 공연을 얼마 앞두고서는 꽤 중요한 역할을 덤으로 맡아왔다. 처음 소개 멘트를 하기로 한 아이가 하기 싫다고 해서 딸애가 냉큼 자기가 한다고 한 모양이다. 자기 분량이 늘었다고 신이나서 동영상까지 찍어가며 연습하는 모습이 얼마나 귀엽던지…
연극하는 날 학기말 과제에 전시까지 겹쳤지만 안가면 얼마나 실망할지 알기에 열일 제쳐두고 일찌감치 나섰다. 딸애가 자기가 볼 수있도록 꼭 제일 앞 가운데 자리에 앉아있으라고 주문까지 한 터라 영하의 날씨였지만 공연 시작 한참 전에 줄을 서서 3번째로 입장했다. 나름 내가 제일 일찍 갔을거라 생각했는데 나보다 먼저 온 사람이 있어 놀랐다. 나중에 알고보니 내 앞에 있던 학부모들은 주인공 개구리의 엄마 아빠였다. 개구리는 주인공이라 거의 모든 장면에 등장하고 독창으로 노래를 몇곡이나 부르는 주인공이니 그럴만도 했다.
여튼 오늘따라 날씨가 유독 추워서 좀 떨긴했지만, 주문한대로 앞에서 두번째 줄 중앙에 자리 잡고 앉아 다행이라 생각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연극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사진찍기 좋은 자리에 앉으려고 우왕좌왕 하는 다른 학부모들을 보며 ‘피곤해도 일찍 나와 기다리길 잘했군’, 속으로 뿌듯해 하며 교장 선생님의 인사에 박수로 화답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혔다. 연극을 시작하기 전, 고학년들이 성조기를 들고 입장해 무대에 올라가자 모두 일어나서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고 국가를 부르기 시작하는데, 나는 당최 무슨소린지… 하나도 따라하질 못하는거다. 남들 일어설때 엉겁결에 같이 일어나긴 했는데 앞, 뒤, 옆 학부모들은 뭐라뭐라 읊조리고 노래도 크게 부르는데 나는 가짜로 립싱크를 하기도 민망하고, 그렇다고 멀뚱히 가만히있기도 당혹스러워서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반쯤 내려 바닥을 노려보며 진땀을 뺐다. 언제 끝나려나 우물쭈물 눈치만 보며 바보같이 서 있자니 그 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지던지... 여유부리던 아까의 마음은 어디가고 괜히 앞자리 중간에 앉았구나 후회했다.
Snapshots from the school play
그러고보니 시민권을 취득한지 10여년이 넘었지만 사실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거나 애국가를 부를 일이 한번도 없었던 것 같다. 미국온 지 7여년만이던가, 미국 국적을 취득할때 별도의 비용없이 법적으로 개명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말에 혹해서 영어 이름을 만들었다. 이곳 사람들이 ‘연’이라는 한국발음을 잘하지 못해서 이름 부르기를 꺼려했고, 그러다보니 내 이름을 제대로 기억해주는 사람도 드물어서 불편했지만 나라를 떠나면 다 애국자가 된다고, 왠지 한국을 배신하는 것 같아 수년간 한국 이름을 고집하며 살았다. 그런데 시민권을 취득하며 ‘스테파니’라는 영어이름이 생기니 얼마나 편해졌는지 모른다. 예전엔 이름을 부르는 사람도, 불러주는 나도 서로 주저주저했는데 이제는 스타벅스에서 음료를 주문할때도 이름을 물어보면 자신있게 "스테파니!" 하고 알려줄 수 있게 되었다. 이럴거면서 왜 진작 미국 도착하자마자 영어이름을 만들어 쓰지 않았나 할 정도다.
하지만 영어이름을 갖고, 투표까지 꼬박꼬박 하고 살아도 여전히 나는 한국사람이다. 한국 마트에서 장을 보고, 한식을 먹고, 한국 드라마와 예능프로를 보고, 한국인들이 많은 지역에서 한국말을 주로 하며 살고있으니 더더욱 그렇다. 아무리 타국에서 오래 살았다해도 국가는 종교와도 같아서 처음 믿은 종교의 기도문이 평생 기억나듯 뭐든 먼저 주입된 것이 오래가고, 유년기에 습득한 것이 평생을 가는 법이다. 개신교를 다니다 중학생이 되어 천주교로 옮겼을 때도 사도신경은 줄줄 외워도 거의 비슷한 천주교의 기도문은 그렇게 입에 안익더라니...
여튼 진땀빼던 억겁의 시간이 지나 마침내 모두 착석하자 카운슬 멤버의 의상이라며 아빠 넥타이를 찾아메고 간 딸애가 쪼르르 나와 인삿말을 한다. 집에서 연습할때는 모션까지 넣으며 장난스레 잘도 하더니만 막상 무대에 오르니 개미같은 목소리로 서둘러 말하고는 쏙 들어가 버린다. 반가워서 손을 마구 흔들어대도 모른척 할 말만 하더니만 나를 보긴 봤는지 들어가기 전에 아주 작게 손인사를 해주고 간다.
비록 나는 입도 뻥긋 못하고 가만히 있었지만 그래도 아이는 하나도 안틀리고 대사를 다 했으니 그것으로 되었다. 초등학생 연극이라 기대도 안했는데 연극도 생각 이상으로 재밌어서 지친 몸을 이끌고 온 보람이 있었다. 하지만 다음번에 올 때는 비록 외우지는 못하더라도 미국 국가 정도는 따라부를 수 있게 적어와야 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렇듯 평소에는 생각지도 않았고, 아이가 없었다면 시도조차 하지 않을 많은 일들을 부모가 되면 하게되는 것 같다. 그리고 미국 시민이지만 한국인인 나는 ‘썸’이라는 가요의 가사처럼 오늘도 이렇게 ‘시민인듯 시민아닌 시민같은 나’ 로 미국과 썸을 타며 살아가고 있다.
Stephanie S. Lee (김소연)/화가,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