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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김원숙: 22가 건널목의 천사
이야기하는 붓 (2)
22가 건널목의 천사
이런 이야기는 아무리 사실 그대로 잘 전한다 해도 의심쩍은 말들이 된다.
상식의 한계 때문이다. 그런 위험부담이 있어도 내 기억 속에 살아있는 그 작은 기적의 천사를 소개하고 싶다.
Wonsook Kim, Angel Embrace Litho, 30x22
사는 동안에 가끔은 여러가지 난감한 일들이 한꺼번에 터지면서 걷잡을 수 없이 어려운 시간들을 만나게 된다. 다행히 나에게 그런 난감한 세월들이 한 손으로 꼽을 만큼, 그리 많지 않았던 건 큰 축복이다. 아니면 벌써 많이 잊은 걸지도 모른다.
바로 그런, 뙤약볕이 뜨겁던 오후.
살고 있던 22가와 7애브뉴 건널목에서 길을
건너려고 서있었다.
이사할 방
하나를 급히 구해야 하고, 내 조건은 전혀 현실적이지 않았고, 화구들이
대부분인 짐은 많았고, 낮일하던 직장에 문제가 생겼고, 룸메이트를
해준다던 친구는 떠나버리고… 해결책이 안보이는 어려움들은 끝이 없는 것 같았다.
이 길을 건너서 어디부터 가야 하나, 건너면 뭘 하나, 안 건너면 어쩔 건가, 그렇다고 서있으면 뭐가 되나… 하며 WALK, DON’T WALK… 바뀌는 신호등만 계속 쳐다보구 있었다.
걸어라, 걷지 마라, 건너라, 건너지 마라, 가라, 가지 마라…
얼마나 서있었는지, 사람들이 막 쳐다보며 지나치고 있었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눈 앞이 캄캄해지기도 하고 환해지기도 하고, 그냥 오래 오래 서있었다.
Wonsook Kim, Angel Shadow, 30x22
그때 한 사람이 다가와서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는 얼굴이지만, 어떻게 표현이 안되는 인자한 한 사람. 백인도 흑인도 황인도 아닌, 늙지도 젊지도 않은 그는 더없이 깊은 눈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괜찮아, 그냥 가요, 괜찮아” “it’s ok, just go, it’s all be fine…” 하며 내 어깨를 가만히 밀어주었다.
곧 WALK 싸인이 나오고 나는 길을 건넜다. 그리고 뒤를 보았지만 그를 찾을 수가 없었다.
나는 천사를 믿는다.
그 형태가 무엇이든 누구이든, 아주 어두워질 때엔 마음 속이든 머리 속이든 건널목이든 나타나서 그 다음을 약속하는 그 도움을 믿는다.
요즈음도 그 건널목을 지날 땐 꼭 감사하다는 눈인사를 한다. 나도 더 크면 그 천사 같은 존재가 되구 싶다는 황당한 꿈도 꾸어본다,
믿거나 말거나. 김원숙/화가 부산에서 태어나 홍익대 재학 중이던 1972년 도미해 일리노이주립대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76년 뉴욕으로 이주한 후 여인과 자연을 모티프로 여성으로서의 삶과 그리움, 신화적인 세계를 담아 세계에서 전시회를 열어온 인기 화가. 뉴욕과 인디애나주 블루밍턴을 오가며 살고 있으며, 2011년 '그림 선물-화가 김원숙의 이야기하는 붓'을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