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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이영주: 몬타나의 힐링 캠프
뉴욕 촌뜨기의 일기 (8)
몬타나의 힐링 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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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타나에 살고 있는 막내에겐 친구가 많습니다. 클래식 연주자니까 물론 클래식 음악하는 친구들도 있지만, 다양한 직종의 친구들로 늘 북적입니다. 작년에 제가 아팠을 땐 친구들에게 엄마가 아파서 와있으니 집에 오지 말라고 금족령 아닌 금족령을 내렸다는데도, 친구들은 그냥 문을 열고 들어와 소파에 누워 있는 저를 내려다보며 안부를 묻곤 했습니다. 거의 매일, 어느 친구 집에 가서 저녁을 먹거나 아니면 친구가 막내네 집으로 불쑥 와서 그냥 식탁에 앉으면 끝입니다. 딱 우리나라 60년대 풍경 같습니다. 완전 촌뜨기들이지요.
막내 친구들 중에 제가 제일 관심 있는 친구들은 ‘몬타나의 힐링캠프’ 친구들입니다. 힐링캠프는 제가 붙인 이름이고, 사실은 네 명의 친구들이 부부동반으로 한 달에 한 번씩 모여서 저녁을 같이 먹는 모임입니다. 매달 집집마다 돌아가며 모이는데, 벌써 4년이나 계속된 모임으로, 그동안 한번도 빠진 적이 없었다고 하니 놀랍기만 합니다. 모임을 갖는 집주인이 메인 요리를 준비하고, 다른 멤버들은 사이드 디시나 디저트를 가져옵니다.
멤버는 다 다른 전문직들입니다.
젯슨은 변호사입니다. 연방변호사였는데, 일이 너무 재미없다고 그냥 독립해서 일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먹는 것을 좋아하고 요리하는 걸 좋아하는지 제가 보즈맨에 있는 동안 몇 번이나 스프와 빵을 만들어다 주었습니다.
척은 지질학자입니다. 오래 전에 콜로라도에서 내추럴 개스(natural gas)를 발견해서 큰 돈을 벌었습니다. 그 돈으로 투자도 하고 부동산도 많이 장만해서 일하지 않아도 넉넉하게 살고 있습니다. 보즈맨 가까운 곳에 섬이 하나 잇어서 거기 살았는데, 몇 년 전에 보즈맨 옆동네에 땅을 사서 이사왔습니다. 약 10년 전부터 글래스 공예를 시작해서 집에 스튜디오까지 만들어 놓고 작업하고 있습니다. 그 수준이 보통 예술가의 수준을 넘습니다. 요리도 잘 하고, 그 아내 유리는 사람 좋게 생긴 얼굴 1위라고 할만큼 착하게 생겼고, 예쁩니다.
앤즐리는 영문학 교수였습니다. 교수였다고 과거형으로 말씀드리는 것은 그녀가 작년 여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작년 8월, 제가 뉴욕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돼서 친구 결혼식에 다녀오다가 자동차 사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앤즐리는 동양적 미모를 가진 아름다운 여성이었습니다.
작년 여름에 제가 아무 음식도 먹지 못하고 오직 오이지와 깻잎 장아찌만 먹을 때 막내가 앤즐리집에 있던 깻잎을 모두 꺾어 왔던 적이 있습니다. 재작년에 갔을 땐 앤즐리집에서 모임이 있었는데, 앤즐리가 아침 일찍부터 올개닉 밀가루를 반죽해서 파스타를 만들어 말리고, 말린 파스타를 다시 익혀서 맛있는 파스타를 두 종류 소스로 만들어줬던 일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힐링캠프 회원들은 앤즐리 대신 이젠 앤즐리 부모님을 모임에 항상 모십니다. 불시에 다 키운 딸을 잃은 부모님을 위로해 드리기 위해서 부모님들이 살아계시는 동안 언제나 함께 모실 거라고 합니다.
지난 7월엔 마침 막내네서 모임이 있는 달이었습니다. 제가 와 있으니 막내더러 새싹비빔밥과 도토리묵을 준비하자고 권했습니다. 막내도 대찬성이었습니다. 밭에 온갖 채소가 다 있으니 새싹 비빔밥은 문제가 없습니다. 아루굴라와 상추, 깻잎, 비트 잎사귀, 민트, 차이브, 부추, 케일까지 풍성했습니다. 거기다가 사과도 채썰고, 빨간 토마토로 색깔을 맞췄습니다. 참기름을 듬뿍 넣은 맛있는 고추장에 잣까지 넣었으니 비빔밥은 최고의 비빔밥이 되었습니다.
저희 친정 어머니께서 시골서 사주시는 도토리 묵가루는 정말 향이 좋습니다. 제가 도토리묵을 워낙 잘 쑵니다. 잘 쑨다기 보다 묵은 정성이 들어가야 합니다. 오랫동안 뜸 들이는 게 포인트인데, 마지막에 들기름 몇 방울을 떨어뜨리고 약간의 소금을 치면 그야말로 야들야들하고 품격 있는 초콜렛빛 투명한 묵이 완성됩니다. 외국인들은 사실 묵의 맛을 모르지만(그들은 냉면 맛도 모릅니다), 몬태나 촌뜨기인 힐링캠프 회원들은 처음 먹어보는 묵도 맛이 특이하다며 접시로 가는 손길이 몹시 분주합니다.
젯슨은 스프의 여왕답게 호박스프를 만들어 왔습니다. 호박 3개와 양파 1개를 베지터블 육수에 넣고 익혀서 갈면 스프가 된다니 간단해 보입니다만, 맛이 기막혔습니다. 서빙할 때는 모짜렐라 치즈 2쪽을 잘게 썬 앤초비와 오레가노 잎사귀로 모양을 내줍니다. 모짜렐라 치즈와 앤초비가 저의 한국 입맛엔 적응할 필요도 없이 딱이어서 스프를 두 그릇이나 먹었습니다.
척은 오징어 요리를 해왔습니다. 물오징어 속에 새우와 햄을 스터핑해서 그릴에 구웠는데, 코스코에서 샀다는 물오징어가 덜 싱싱한 탓인지 맛이 별로여서 막내와 저는 맛만 보고 더 이상 먹지 않았습니다. 원래 요리 잘하는 척이 그 날은 풀이 많이 죽었습니다. 비빔밥으로 배를 채우려는 듯 비빔밥만 먹고 또 먹었습니다.
앤즐리 부모님은 블루베리로 만든 디저트를 가져 오셨는데, 저는 너무 피곤해서 일찍 자러 가는 바람에 못 먹었습니다. 워낙 수다 아닌 수다이니 그 수다가 끝나고 디저트 먹으려면 저는 체력이 감당이 안 됩니다. 얼마나 맛있으면 막내가 엄마 것도 남길 수 없었을까, 싶었지만, 조금은 섭섭했습니다.
제가 오기 전전날은 척네 집에서 게릴라 저녁을 먹었습니다. 작년에 유리가 초대했는데 제가 못 갔더니 이번엔 한번 꼭 오라고 해서 갑자기 만들어진 저녁이었습니다. 특히 뉴욕서 날라온 미술가 신형섭 가족도 함께 갔습니다. 신형섭은 금년부터 홍익대학에서 가르치게 되어 연초에 혼자 귀국했는데, 8월 15일에 가족까지 완전히 귀국하게 되어서 마지막으로 막내네 동네를 보려고 온 길입니다.
척네 집은 집 뒤로 강을 끼고 있어서 멤버들이 여름이면 자주 강가에서 저녁을 먹습니다. 대지가 자그만치 20에이커나 됩니다. 집 입구서부터 한참 차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데, 입구 초원에서 당나귀 한 마리를 키웁니다. 당나귀는 우리 차를 보더니 가까이 다가 왔습니다. 젯슨이 당나귀가 사람을 보면 가끔은 말도 한다기에 뭐라고 하느냐고 물었더니, “음, 머음 머흐....”하는 바람에 폭소가 터졌습니다.
젯슨이 이번엔 아루굴라 스프와 올리브빵을 만들어 왔고, 유리는 수박 샐러드(수박+민트+올리브)와 세비체(라임쥬스+빨간 도미+양파+흰 당근+맹고+차이브+실란트로)를 준비했습니다. 막내는 와인과 샐라미, 여러 가지 치즈, 과꽈몰레를 급히 준비해갔습니다. 척은 집에 없었지만, 우리는 시원한 강 바람 속에 맛난 저녁을 끝내고 척의 스튜디오도 둘러보고 강가도 걸었습니다. 강가엔 낚시하는 사람들이 몇 있었습니다.
사람의 정은 음식을 함께 하는 데서 제일 빨리 생성되는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도 함께 맛있는 식사를 하고 나면 갑자기 친한 친구처럼 여겨집니다. 제가 수다라고 말했지만 그들의 화제는 무궁무진 합니다. 보즈맨의 경제 얘기부터 스포츠와 문화, 정치, 음악과 미술, 해외의 사건, 사고들까지 끊이질 않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우정을 키우고, 자기들 생의 상처들을 서로 힐링 시켜주고 스스로도 힐링하는 것이 눈에 보입니다. 그들은 의식하지 못하겠지만, 그들을 보고 있으면 건강과 행복이, 사람다운 참삶이 그들 모두에게서 아우라처럼 뿜어져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