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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남광우: 장님 코끼리 만지기
일할 수 있는 행복 (3) 미국 이해하기와 직업 선택하기
장님 코끼리 만지기
그때 나는 ‘세계를 간다’는 노란색 표지의 여행가이드 책 한 권을 들고 있었다. 20여 년 전 나 홀로 첫 미국 여행을 하던 때 LAX에서 국내선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예약 인원이 넘쳤다고 한다. 자리 배정을 받으려 긴장하고 줄을 서 있었던 시간. 갑자기 뒤에 서 있던 백인 아저씨가 줄을 무시하고 먼저 타버렸다. 그 모습을 목격하고 화가 난 나는 항공사 직원들에게 달려가 강력히 항의했다. 서툰 영어로 인종차별을 운운하면서… 그리고 한동안 미국은 이처럼 공공연하게 인종차별이 행해지는 나라라는 생각을 하며 살았다.
그랜드캐년 노스림의 풍광. Photo: Sukie Park
대학 2학년 때 미국 동서 횡단을 하며 라스베가스 근처 사막 길을 운전하고 가는 중이었다. “이 땅에는 아무나 들어와도 좋다”는 표지판을 보았다. 그때 미국은 역시 땅이 엄청나게 넓어서 이런 땅에는 누구나 들어와서 살아도 좋다고 친절하게 표시를 할 정도구나. 감탄하며 역시 규모가 한국과는 다른 대단한 나라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런 에피소드는 내가 누군가에게 미국이라는 나라를 소개할 때 항상 등장하던 단골 메뉴였다. 비록 공공연하게 인종차별이 있긴 하지만, 이 좁은 한국보다는 사막 근처라고는 해도 누구에게나 토지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는 스케일이 다른 미국에서 살아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그런데, 로스쿨에서 재산법을 공부하던 중 사막 표지판에 대한 나의 해석이 틀리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 표지판은 정말 ‘아무나 이 땅에 들어와서 살아도 된다’는 내용이 아니라 사전에 토지 점유의 공개적인 동의를 통해 Adverse possession (토지 주인의 동의없이 누군가 불법적으로 토지 점유를 일정 기간 이상 계속할 경우 법적으로 소유권이 불법 점유자에게 이전될 수 있음)을 막기 위한 법적인 장치였음을 알게 됐다.
또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어느 날이다. 미국 내 잦은 출장으로 델타항공 골드 멤버가 된 나는 20년 전 LA 공항에서와 유사한 상황에 있었다. 게이트에 길게 줄 서있는 백인들을 뒤로 하고, 먼저 자리를 배정받고 비행기에 타게 되었다. 그날의 기억은 인종차별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많은 이들이 얼마간의 여행을 통해 경험한 내용과 기억을 기초로 그 나라와 지역을 판단하고 평가한다. 가끔은 그 평가가 인상과 분위기에 의존한 그야 말고 한쪽 모습에 대한 평가인 경우가 많고, 심지어는 나처럼 사실 자체를 잘못 해석해서 완전히 왜곡된 해석을 하고 그것이 전부인양 착각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그랜드캐년 웨스트림의 스카이워크(Skywalk). Photo: Sukie Park
한국과 미국에서 교육을 하고, 특별히 청년들의 미국 취업을 위한 상담과 세미나, 그리고 직접 회사 매칭을 진행하면서 늘 보게되는 것이 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스스로에게 적합한 직무, 분야, 회사에 대한 생각도, 준비도, 경험도 거의 없이 졸업을 하고, 결국은 급한 나머지 아무 곳이나 받아주는 회사면 가겠다는 식의 선택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대학 입학 시 여러 대학들을 비교하고 분석해서 미리미리 몇 년 전부터 준비를 하는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오히려 대학 선택보다 훨씬 더 중요한 본인의 전공과 졸업 후의 직업을 선택할 때는 아무렇게나 마구잡이 식인 경우가 많다.
왜 그 전공을 택했는지, 그리고 어떤 분야로의 취업을 목표하느냐고 물어보면, 대개 그 전공이 한국 학생들이 많이 하는 전공이었다거나, 성적이 잘 나온다더라. 혹은 그저 그냥 관심이 좀 있다거나 왠지 느낌이 좋다거나 적성에 맞을 것 같다는 답변이 대부분이다. 게다가 미국 내 유학생들의 경우 졸업 후 취업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준비가 부족하다.
일부 특정 분야로의 진출을 희망한다고 하는 학생들과 대화를 해 보면 실상은 대학에서 관련 수업을 들었는데 그 과목 성적이 좋았거나 교수님이 맘에 들었거나, 인터넷이나 지인을 통해 누군가를 만났거나 접했는데 멋있어 보였거나, 아니면 단순히 취업이 용이하거나 연봉이 높을 것 같다거나 많은 경우에는 특별한 근거 없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정도의 평가를 기초로 직업을 선택한다.
이런 생각들과 판단은 그야말로 그 나라를 가보지도 않고 귀동냥이나 사진으로 보고 그것이 전부라 판단한 내용과 유사한 수준이거나 많은 경우에는 아예 사실 자체를 잘못 알고 그 잘못된 정보에 의지해서 자신의 미래를 결정해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대학은 성적표에 A를 받기 위한 곳이 아니다. 다양한 생각과 공부, 경험, 체험을 통해 미래의 나를 준비하는 곳이어야 한다. 특히나 요즘처럼 인터넷 상의 무한한 정보와 SNS를 통한 Network, 다양한 영상 매체를 통해 세계가 하나로 통합되는 시대에는 저마다의 노력을 통해서 충분히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내일을 준비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 있다.
‘한 우물을 파라’는 말이 명제이던 시대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 우물을 파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것은 이곳에 우물을 파면 물이 나올지에 대한 충분한 사전 조사이다. 최소한 사전에 충분히 고민을 하고 준비를 한 후에 우물을 파기 시작했을 때 이는 의미가 있다. 젊은 학생들이 마치 장님이 코끼리 꼬리를, 다리를, 코를 만지고 그것이 전부인 양 판단하고 미래를 결정하고, 준비가 끝났다고 생각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으면 한다.
전공 선택부터 졸업 후의 나의 모습까지 보다 다양하고 폭넓은 경험과 노력을 통해 정말 내가 가고 싶은 길에 대한 충분하고 진지한 고민이 선행되기를 바란다. 더불어 나를 포함한 미리 앞서간 다양한 분야의 선배들이 어떤 형태로든 우리 한국의 젊은이들과 본인들의 경험과 생각을 함께 나누며 도움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기회들이 보다 많아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남광우/서강대 겸임교수, COED 대표
서울에서 태어나 고려대 법학과와 동대학원 수석 졸업. 상트 뻬쩨르부르크 음대에서 러시아 오페라 이론을 전공했고, U.C. 버클리 법대를 거쳐 변호사, CPA 자격증 취득 후 아주대 경영대 교수 시절 컬럼비아대 방문교수를 지내면서 뉴욕과 사랑에 빠졌다. 한국 젊은이들, 미국 교민들의 전문직 교육과 취업, 삶에 대해 함께 고민하며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할 것이다" 라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을 가슴에 담고 살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