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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한혜진: 그녀는 여름이었다
에피소드 & 오브제(7) 여름의 끝자락에서
그녀는 여름이었다
그녀는 뜨겁게 우리에게 다가왔었다. 발등을 훤히 드러내는 샌들을 신고, 가뿐 숨을 몰아 쉬며 우리 속에 끼어 들었다. 그녀의 땀 냄새는 묘한 전염성으로 우리를 설레게 했고, 그녀의 매혹은 벌거숭이같은 욕망을 불러일으켰으며, 그것은 여름 내내 지속되었다.
Gurney's Inn, Montauk, Long Island
계절이 지나가는 자리에 서 있다. 여름이 가고 있다. 사라져가며 뒷모습을 보인다. 그것은 사랑의 자리에서 털고 일어나, 그저 머리를 매만질 사이도 없이 걸어가는 긴 머리의 여자이다. 저 모습이 가물가물해질 때면, 내 등줄기에도 차거운 바람이 들어설 것이다. 우리는 앞을 보이며 다가오는 것에는 긴장하지만, 뒤를 보이며 떠나가는 것에는 마음이 숙연해지지 않는가? 뒷모습이 보여주는 어깨자락에는 다 털어내지 못한 미련같은 게 남아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떠나가는 여름이 그녀였다고 생각한다. 짙고 푸르렀던 녹음은 그녀의 머리채였으며, 그늘 한 점 보이지 않았던 거리 풍경은 그녀의 얼굴이었다. 달아오른 아스팔트는 그녀의 가슴이었고, 멀리 출렁이는 바다는 그녀의 가슴을 식히는 그리움이었다. 그녀는 지금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고 있다. 삶이란 가끔 뒤를 돌아보면 이해될 수도 있다. 하지만, 뒤를 돌아본다고 사랑이 이해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그녀는 알고만 것일까? 이해란 사랑의 전제조건도, 끝마무리도 아닌 것이다. 사랑은 그냥 속절없는 것인 지도 모른다.
마치, 순정한 봄처녀같았던 그녀가 이제는 불같았던 사랑의 처소를 벗어나, 사랑에게 등을 내보이는 것같다. 분명 마주할 때는 사랑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눈길에서 벗어나, 홀연해 질 때도 사랑인가를 음미하며 가고 있는 걸까? 그것이 사랑일까를. 미련도 사랑인가를. 그녀의 마음을 식히듯 날씨도 서늘해진다.
그녀는 뜨겁게 우리에게 다가왔었다. 발등을 훤히 드러내는 샌들을 신고, 가뿐 숨을 몰아 쉬며 우리 속에 끼어 들었다. 그녀의 땀 냄새는 묘한 전염성으로 우리를 설레게 했고, 그녀의 매혹은 벌거숭이같은 욕망을 불러 일으켰으며, 그것은 여름 내내 지속되었다. 그녀의 사랑은 그칠 줄 모르는 폭염처럼 달아올랐고, 그녀의 얘기만큼 우리도 숨이 찼었다. 그러나, 사랑의 절정이란 이르기까지의 과정일 지도 모른다. 달이 차면 기울듯이 그녀의 사랑의 절정도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Robert Moses Beach, Long Island
사랑이 가듯, 여름은 간다. 사랑과 여름은 그렇게 닮아 있다. 지금, 그 경계에 그녀가 서 있다. 길게 늘어진 스커트 자락이 구두축에 말려들면서 그녀의 걸음을 늦추곤 하지만, 그녀는 아랑곳없이 가고 있다. 뒤를 돌아보지 않음에 여운이 남는다. 그냥 한참을 보고 있어야 할 것같다. 그녀가 빠져나간 공기 속엔 어느새, 찬 기운이 밀려들기 시작한다. 사랑이 다녀간 자리에 느껴지는 빈 자리가 가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빈 두 팔에 남겨지는 여운을 감싸기 위해서 긴 소매의 옷을 챙겨입는 지도 모른다. 폭음 다음날, 밀려오는 속쓰림과 허전함같은 가슴앓이를 하는 계절인 것이다.
가을은 사랑의 여운으로 맞이하는 계절일 것이다. 여름이 위대했듯이, 나의 사랑도 충만했었다고. 그런 여름을 보내고, 소슬한 가을 바람을 맞듯이, 이제 사랑을 멀리서 바라보게 되었노라고. 여름을 떠나보내며, 목청을 돋구던 매미울음소리처럼 사랑을 떠나보내며 목청껏 울었지만, 지금은 귀뚜라미처럼 숨어서 때때로 울먹인다고. 그 소리마저 잦아들 때면, 나무들이 하나둘 잎을 떨구듯이 사랑의 기억들을 하나하나 지우며 나목처럼 색깔없이 서 있을 거라고. 여름 동안 누렸던 사랑의 환희를 그리며 그렇게 서 있을 거라고. 오랬동안을…. 여름이 가는 길목에서 다시 그녀를 본다. 그 뒷모습에서 눈길을 거두면 그녀는 이제 없다. 망막에 새겨진 그녀의 잔영은 긴 기다림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녀가 보고 싶다고 느껴지는 날, 그녀가 떠나간 그 길을 다시 바라보게 되는 날, 내 마음을 알아차린 안개가 그녀의 냄새를 몰고 나를 휘감으며 찾아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면, 나는 솜사탕같은 안개를 뭉턱뭉턱 입에 넣으며, 아직 다 마르지 않은 기억의 파편들을 조용히 밟으며 가을 길을 걷고 싶다.
여름은 그녀처럼 사랑을 했고, 가을은 남겨진 사람처럼 사랑에 대해 생각할 것이다.
한혜진/수필집 '길을 묻지 않는 낙타' 저자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영문과 졸업 후 결혼, 1985년 뉴욕으로 이주했다. 한양마트 이사로 일하면서 김정기 시인의 권유로 글쓰기와 연애를 시작, 이민 생활의 균형을 잡기위해 시와 수필을 써왔다. 2011년 뉴저지 리지필드 한양마트에 갤러리1&9을 오픈, 한인 작가들을 소개했으며, 롱아일랜드 집 안에 마련한 공방에서 쥬얼리 디자인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