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를 이해하는 33가지 코드 #4 저항의 민족(People of Resistance)
33 Keys to Decoding the Korean Wave, Hallyu! #4 저항의 민족
한류를 이해하는 33가지 코드
#4 3.1운동에서 촛불혁명까지
*33 Keys to Decoding the Korean Wave, Hallyu #People of Resistance <English version>
http://www.nyculturebeat.com/index.php?mid=Zoom&document_srl=4071840
2017. 3. 11. 20차 촛불집회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촛불 1주년: 박근혜 몰락 3분 비디오, OhmyTV <YouTube>
한국인들은 '레지스탕스 민족'이다. 역사적으로 주변 강대국들에 의해 끊임없는 침입을 당해오면서 우리는 생존하는 법을 터득해왔다. 우리 민족은 외세에 맞선 독립운동부터 독재와 부정부패에 항거하는 민주화운동까지 불의에 저항해왔다. 레지스탕스 정신은 우리의 DNA다. 우리 민족의 특기가 '국난 극복'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저항정신은 비판의식으로 이어진다.
2016-17 촛불 혁명 Candlelight Revolution
2017년 한국의 촛불 시위를 다룬 워싱턴 포스트(왼쪽부터), 뉴욕타임스, CNN.
#워싱턴 포스트: 대통령 탄핵하는 법 가르쳐 주겠다
워싱턴 포스트(The Washington Post)는 2017년 5월 19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2017. 3. 10) 2개월 후 '한국인들이 미국인들에게: 우리가 대통령을 탄핵하는 방법 가르쳐 주겠다(South Koreans to Americans: We’ll teach you how to impeach a president)'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이 신문은 "한국인들은 대통령을 탄핵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다. 국회의원 투표와 획기적인 법원의 판결과 함께 17주간의 평화로운 시위가 대규모 부패 스캔달 속에서 박근혜를 퇴진시켰다. 박근혜는 감옥으로 갔으며, 뇌물 및 강탈 등 18가지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고 있다"라고 시작했다. 이어 "한국의 블로그엔 아버지의 망토를 차지했으며, 소통에 어려움이 있는 박근혜와 도날드 트럼프의 유사점과 두 나라 정치 체계의 차이점을 거론하는 댓글로 가득하다"고 전했다.
이와 함께 "한국은 30년 전에야 민주주의를 시작했지만, 미국은 오랫동안 스스로 민주주의의 모범으로 여겨온 나라임"을 강조했다. 그리고, 한국 네티즌들이 탄핵에 대한 노하우를 미국에 수출할 가능성에 대해 토론했다며, 강신애씨의 글 "우리가 대통령을 탄핵하는 방법과 피 한방울 흘리지않고 평화적으로 대통령을 제거하는 지식을 수출할 필요가 있다"를 인용했다.
*South Koreans to Americans: We’ll teach you how to impeach a president <The Washington Post>
#파이낸셜 타임스: 한국 민주주의 위기에서 빛나다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Financial Times)는 박근혜 탄핵 이틀 후인 3월 12일 '한국의 민주주의 위기에서 빛나다(South Korea’s democracy shines through in a crisis)'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이 신문은 "지난해 말 충격적인 한국에서의 부패 스캔달이 세계를 뒤덮었을 때, 많은 한국인들이 수치스러워했다. 이제 그들은 자부심을 느껴야한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한국은 지난 50여년간 현격하게 발전하며 경제 분야의 선구자로 명성을 얻었다. 이제 한국은 그 지역의 지정학적 플레이어일 뿐만 아니라, 세계의 젊은 민주주의를 위한 정치적인 모델이 되기 직전에 서있다. 다음 대통령에 많은 것이 달려있다"고 전망했다.
*South Korea’s democracy shines through in a crisis <Financial Times>
#뉴욕타임스: 시위는 평화롭고, 축제 같다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는 촛불시위 1개월 후인 11월 26일자에서 "추운 날씨와 첫눈에도 불구하고, 조직위가 추정한 1백50여만명의 군중이 모였으며, 시위는 평화롭고, 축제에 가까웠다"고 보도했다.
이어 "토요일 노점상들은 양초, 매트리스와 따끈한 간식거리를 팔았고, 거리의 상점들은 시위대에 무료 커피를 제공했다. 불교 승려들은 목탁을 두드리며 행진했다. 아이들과 함께 나온 엄마들, 패딩조끼에 애견을 싸안고 나온 이들, 겨울 코트를 입고 몰려온 젊은 커플들은 확성기에서 요란하게 울리는 익숙한 가락에 따라 '박근혜 축출'을 촉구하는 노래를 따라 불렀다"고 전했다.
*Protest Against South Korean President Estimated to Be Largest Yet <The New York Times>
#대한민국 국민 2017 독일 인권상 수상
2016년 10월 26일부터 2017년 4월 29일까지 23회에 걸쳐 열렸던 '박근혜 대통령 퇴진 운동' 촛불집회 포스터.
독일의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FES, Friedrich-Ebert-Stiftung)은 2017년 12월 한국 국민들에게 인권상(Human Rights Prize)를 수여했다. 이 재단은 "역동적인 민주주의의 실현은 모든 국민이 보편적으로 보장된 인권을 전적으로 향유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민주적 참여권의 평화적 행사와 특히 평화적 집회의 자유는 생동하는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구성요소다. 본 재단에서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촛불집회가 이 중요한 사실을 전세계 시민들에게 각인시켜 준 계기가 되었다"며 수상의 이유를 밝혔다. http://www.fes-korea.org
저항의 역사 History of Resistance
March 1st Movement, Photo: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한국인들은 저항의 민족이다. 반도국이라는 특성으로 인해 역사적으로 주변 강대국들에 의해 끊임없는 침입을 당해왔다. 고구려엔 당, 수, 연, 위, 한나라가 연이어 쳐들어왔고, 통일신라는 당나라의 공격을 받았다. 고려 때는 거란, 몽골, 홍건적에서 왜구까지 수시로 침략했으며, 조선시대엔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까지 대규모의 전쟁과 혼란을 겪었다. 그러면서 한민족은 생존하는 법을 터득해왔다. 전쟁과 착취, 각종 시련 속에서 끊임없이 저항해왔다.
우리 민족은 외세에 맞선 구국운동, 주권을 회복하기 위한 민족해방운동, 독재와 부정부패에 항거하는 민주화운동까지 불의에 저항해온 '레지스탕스 민족'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한국과 일본에서뿐만 아니라 만주, 중국, 극동 러시아에서까지 임시정부와 비밀결사운동부터 학생운동, 무장투쟁, 그리고 문화운동까지 비폭력, 무력(의병, 독립군) 등 온갖 방법으로 저항했다. 3.1 운동은 그 투지가 집결된 저항운동이었다.
외세 뿐만 아니라 국내의 독재타도와 부정부패 척결을 외치며 거리로 나갔다. 1960년 4.19 혁명, 1980년 5.18 광주항쟁, 1987년 6월 항쟁, 그리고 2016년 촛불 혁명은 한국인들의 민주화 열망과 저항정신을 입증한 사회운동이었다. 독재, 부패, 무능의 대통령들을 감옥으로 보낸 그 투지와 불굴의 레지스탕스 정신은 우리의 DNA다. 우리 민족의 특기가 '국난 극복'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3·1 독립만세운동 March 1st Movement
March 1st Movement,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University Libraries
1919년 3월 17일 뉴욕타임스는 북경발 기사로 3.1 운동을 보도했다.
한국인들에 대한 일본의 잔인성 고하다
"미국인 선교사들은 목격자로서 한국인들에게 가해진 야만적인 잔인성을 보고하고 있다. 한 목격자는 지난 10일간 벨기에의 독일인들 이야기같은 행동을 보았다고 선언한다. 무방비의 여인과 어린이들이 다름 아닌 "조선 만세(Hurrah for Korea!)"를 외쳤다는 이유만으로 병사들에 의해 맞고, 차이고, 칼에 찔릴 뿐만 아니라 총에 맞아 쓰러지고 있다. 선교사들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군사 폭정 하에서 좌초된 상태로 민간 정부가 없으며, 대표없이 과세되고 있다는 사실을 평화적인 수단에 의해 세계에 알리기를 희망한다고 전했다. 많은 미국 선교사들이 전국에 걸쳐 테러 통치가 지속되고 있다고 증언하고 있다."
*Tell of Japanese Cruelty to Koreans, The New York Times
1916년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이 테라우치 마사타케에서 하세가와 요시미치로 바뀌었다. 하세가와는 무단통치(헌병경찰통치)를 실시하며 토지조사사업을 빙자로 농민들을 수탈하기 시작했다. 1919년 1월 18일 파리 강화회담에서 제 1차 세계대전 후 처리를 논의하며 미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제안한 '14개조 전후 처리 원칙' 중 '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이 스스로 결정하게 한다(National aspirations must be respected; people may now be dominated and governed only by their own consent.)'라는 민족자결주의(Principle of National Self-determination)가 알려지게 되었으며, 고종 황제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3·1 운동의 도화선이 된다.
1896년 4월 7일 창간된 한국 최초의 민간 신문이었던 독립신문(왼쪽). 1919년 8월 21일 상하이에서 민족 사상의 고취와 민심의 통일을 위해 창간된 독립신문.
"우리는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며, 조선인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하노라.(吾等은 玆에 我 朝鮮의 獨立國임과 朝鮮人의 自主民임을 宣言하노라)"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서울의 태화관에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수십만명의 군중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3·1 운동은 시작됐다.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비폭력 만세운동은 전국, 간도, 시베리아, 연해주, 미주 지역까지 퍼져나갔다. 2개월간 1천491건의 시위에 200여만명의 민중이 참가했다. 당시 인구는 2천여만명이었다. 3·1 운동 후 그해 12월 말까지 총 시위건수는 3천200여건에 달했다. 사망자는 7천907명(*실제 사망자 수는 10만여명으로 추정), 부상자는 1만5천850명, 체포자는 4만6천여명, 1만여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또한, 가옥 715채, 교회 건물 47채, 학교 2개소가 불타거나 파괴됐다.
한민족의 독립을 위한 항일투쟁은 3.1운동 이후에도 계속됐다. 국내에선 농민운동, 노동운동, 학생운동이 지하로 뿌리 내리며 전개됐으며, 만주와 중국대륙에서는 독립군의 무장투쟁이 지속됐다. 동아일보의 '일장기말살사건(1936), 조선어학회 사건(1942), 신사참배 거부운동 등 비폭력, 문화적인 항일 운동도 펼쳐졌다.
3·1 운동이 바로 독립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우리 민족에게 독립정신을 일깨우며, 독립국 건설의 주춧돌이 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일본 총독부는 무단통치에서 교묘한 방식의 문화통치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에 따르면, 3·1운동은 국제사회에 한국인의 자유와 독립에의 열망과 의지를 각인시켰으며, 중국의 5·4운동을 비롯, 인도, 이집트, 인도차이나, 필리핀의 독립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엘리자베스 키스가 본 일제강점기 조선인들
엘리자베스 키스, 훈장과 제자들, 1921(왼쪽)/ 장례식에서 돌아오는 길, 1922
일제 강점기 한국의 풍속도를 그린 스코틀랜드 출신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1887-1956)는 여동생 엘스펫(Elspet Keith Roberton Scott)과 함께 1919년 3월 조선을 방문했다. 엘스펫은 3개월 후 일본으로 돌아갔지만, 엘리자베스는 수차례 조선을 돌며 그림을 그렸다. 1946년 자신의 그림과 동생의 글을 모아 'OLD KOREA: The Land Of Morning Calm'을 출간했다. 엘스펫은 3.1운동으로 체포된 조선 독립운동가들과 일본 경찰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한국인의 자질 중에 제일 뛰어난 것은 의젓한 몸가짐이다. 나는 어느 화창한 봄날 일본 경찰이 남자 죄수들을 끌고 가는 행렬을 보았는데, 죄수들은 흑갈색의 옷에다 조개 모양의 삐죽한 짚으로 된 모자를 쓰고 짚신을 신은 채, 줄줄이 엮여 끌려가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6척 또는 그 이상 되는 큰 키였는데, 그 앞에 가는 일본 사람은 총칼을 차고 보기 흉한 독일식 모자에 번쩍이는 제복을 입은데다가 덩치도 왜소했다. 그들의 키는 한국 죄수들의 어깨에도 못 닿을 정도로 작았다. 죄수들은 오히려 당당한 모습으로 걸어가고 그들을 호송하는 일본 사람은 초라해 보였다."
-Elspet Keith Roberton Scott-
'영국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의 코리아 1920~1940' (송영달 역, 책과 함께)
#간디, 네루, 주은래와 3.1운동
일제강점기, 저항과 계몽의 교육사상가들(고원석 외, 2020)/ 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정상규, 2017)/ 여성독립운동가 300인 인물사전(이윤옥, 2018)/ 조선의 딸, 총을 들다(정운현, 2016)
'무저항 비폭력'의 인도 독립운동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 1869-1948)가 본격적으로 영국 저항운동을 한 것은 3.1운동 이후로 알려졌다. 1919년 3월 21일 영국은 인도의 식민지 정부에서 경찰에 반영 운동가를 무조건 체포, 구금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악명높은 롤라트 법(Rowlatt Act)를 제정했다. 간디는 '억압적인 롤라트 법'에 대항해서 인도인들에게 사티야그라하 투쟁(Satyagraha, 비폭력 저항운동)을 할 것을 촉구했다. 3월 30일 영국 경찰은 델리에서 비무장으로 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을 향해 발포했고, 이에 격분한 인도인들은 폭동을 일으켰다.
간디는 4월 6일 힌두교 축제에서 군중에게 영국인들에게 상해를 입히거나 살해하는 대신 평화롭게 영국 상품을 불매하고, 영국산 의류를 불태우라면서 상호 비폭력을 강조했다. 인도 전역에서는 시위에 참가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식민지 정부는 간디에게 델리에 들어가는 것을 금지시켰지만, 이를 거부한 간디는 4월 9일 체포되기에 이른다. 4월 13일 잘리안왈라 바그에서 영국군의 발포로 비무장 시민 400여명이 사망하고, 1천여명이 부상당했다.
초대 인도 총리 자와할랄 네루(Jawaharlal Nehru, 1889-1964)도 3.1운동에 주목했다. 네루는 1930년부터 33년까지 감옥에서 외동 딸 인디라 간디에게 세계사 이야기를 담은 편지를 총 196통을 보냈다. 1932년 12월 30일 자의 편지에서는 3.1 운동을 언급했다. "조선-이 나라는 옛날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상쾌한 아침이라는 뜻이다"라고 소개한 후 "오랫동안 독립을 위한 항쟁이 계속되어 여러 차례 폭발했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것은 1919년의 봉기였다. 조선민족-특히 청년 남녀는 우세한 적에 항거하여 용감히 투쟁했다. 자유를 되찾기 위해 싸우는 조선민족의 조직체가 정식으로 독립을 선언하고, 일본인에 반항했을 때, 그들은 수없이 죽어갔고, 수없이 일본경찰에 구속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그들은 이상을 위해 희생하고 순국했다. 일본에 의한 조선민족의 억압은 역사상 실로 쓰라린 암흑의 한 챕터였다. 조선에서 흔히 학생의 신분으로, 또는 대학을 갓 나온 젊은 여성과 소녀가 투쟁의 중요한 역할을 하고있는 것을 듣는다면 너도 틀림없이 감동을 받을 것이다"라고 적었다. 네루의 옥중 서신은 '세계사편력(Glimpses of World History, 1934)'으로 출간됐다.
중국 초대 총리 저우언라이(주은래, 周恩來, 1898-1976)는 일본 메이지대 유학을 포기하고 귀국길에 조선에 들렀다. 1919년 7월 시모노세키를 출발해 부산을 거쳐 경성(서울)을 찾은 그는 "일제에 강점당해 10년이 지난 조선이 어떻게 이러한 거족적 항일독립운동을 해냈을까? 그 현장을 직접 봐야겠다"는 내용의 일기를 썼다.
#5·18 광주민주화 운동 Gwangju Democratization Movement
서울에서 165마일 남쪽의 광주에서 시위대가 군대에서 약탈한 차량에서 행진하고 있다. Image: NYT
뉴욕타임스는 1980년 5월 22일자에서 "시위대가 한국의 도시(*광주)를 제압하다" 를 제목으로 광주사태를 1면에 사진과 함께 보도했다. 이 신문은 "수만명의 시위대가 압수한 소총, 철근, 도끼, 쇠스랑, 경기관총까지 흔들며 최소한 32명의 사망자를 낸 반정부 시위 나흘째인 오늘 광주를 통제했다"고 전했다.
1961년 5월 16일 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시대는 1979년 10월 26일 암살로 막을 내렸다. 새로 취임한 대통령 최규하는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겠다고 밝히며 '서울의 봄'을 예고했다. 하지만, 2개월이 채 되지 않아 전두환의 신군부가 다시 쿠테타(12·12 군사반란)로 권력을 장악한다.
이듬해 봄의 5·18 광주항쟁은 깨어있는 민중이 대규모로 저항한 사회운동이었다. 광주항쟁은 신군부와 관변 언론에 의해 '광주사태' '폭동'으로 보도되다가 제6공화국 출범 이후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정식 규정됐으며, '광주민중항쟁' '광주의거' 등으로도 불리운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UNESCO
1980년 5월 13일부터 이틀간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등 37개 대학에서 계엄령 철폐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15일엔 서울역에서 학생시위로 서울 시가지가 마비됐다. 17일 24시를 기해 신군부가 비상계엄을 전국에 확대한 후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 정치인과 재야 인사들 수천명을 감금하고, 군 병력으로 국회를 봉쇄했다.
5월 18일, 광주에 공수부대가 투입되고, 각 대학에 계엄군이 점령했다. 전남대 앞에서 열린 시위를 공수부대가 저지하자 광주역에 재집결해서 '김대중 석방', '전두환, 신현확 등 유신잔당 퇴진', '비상계엄 철폐'를 외치며 시위했다. 이날 오후 1시부터 금남로 등 시내 중심가에서 계엄군의 무차별 진압으로 학생과 중장년층, 10대 청소년까지 거리로 나서 시위에 참가했다. 오후 4시 50분경, 계엄군의 장갑차가 시민들에게 포위됐고, 택시와 버스 운전사, 도시 빈민, 노동자, 농민까지 시위에 가세했다.
20일부터 시민들이 무기를 탈취하며 시민봉기는 무력항쟁으로 전환됐다. 이후 시민군과 계엄군의 총격전으로 사망자가 속출했다. 계엄군은 21일 전남대학교와 전남도청 앞에서 시민을 향해 집단 발포를 한 후 전남도청에서 철수했다.
시민군은 5월 21일부터 26일까지 일주일간 시민자치제를 실시했다. 신군부는 광주가 '치안 부재 상태'라고 발표했고, 계엄군은 27일 탱크와 헬리콥터를 동원한 무장 계엄군 2만5천여명이 무력진압을 감행하며, 시민군이 연행되고 광주는 계엄군에게 넘어갔다. 당시 신군부는 미국과 특수부대(공수특전단)를 동원해 진압하는 문제를 긴밀하게 조율한 것으로 알려졌다.
광주민주항쟁은 10일만에 막을 내렸고, 그해 8월 전두환은 제 11대 대통령으로 출범했다. 서울지방검찰청·국방부 검찰부의 1995년 7월 18일 발표에 따르면, 확인된 사망자는 193명(군인 23명, 경찰 4명, 민간인 166명), 부상은 852명이다. 유네스코 인권기록유산 자료에 따르면, 시민 165명 사망, 76명 실종, 3천383명 부상, 1천476명 체포로 총 5천100명이 연루됐다.
1996년 8월 27일자 동아일보
1995년 광복 50주년, 가해자 처벌에 관한 특별법(5029호)이 제정되어 전직 대통령 전두환과 노태우가 12·12 군사 반란 및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유혈진압의 주범으로 재판을 받았다. 전두환은 반란수괴, 반란모의참여, 반란중요임무종사, 불법진퇴, 초병살해, 내란수괴, 내란모의참여, 내란중요임무종사, 내란목적살인,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뇌물)으로1심에서 사형판결을 받았으며, 대법원은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했다. 노태우는 징역 22년 6개월에서 징역 12년으로 감했다.
그러나, 1997년 12월 외환위기(IMF)가 한창이던 때 김영삼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와 합의해 국민 대화합을 명분으로 한 특별사면으로 전·노 전 대통령을 석방시켰다. 이들의 옥살이는 단 8개월이었다.
2011년 유네스코(UNESCO)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자료를 세계기록유산(Human Rights Documentary Heritage 1980 Archives for the May 18th Democratic Uprising against Military Regime, in Gwangju)으로 등재했다. 관련 자료는 국가기록원, 광주광역시, 육군본부, 5·18기념재단, 국회도서관, 미국 국무성, 국방부국가기관이 생산한 5·18민주화운동 자료(국가기록원, 광주광역시 소장), 군사법기관재판자료, 김대중내란음모사건자료(육군본부 소장), 시민들이 생산한 성명서, 선언문, 취재수첩, 일기(광주광역시 소장), 흑백필름, 사진(광주광역시, 5·18기념재단 소장), 시민들의 기록과 증언(5·18기념재단 소장), 피해자들의 병원치료기록(광주광역시 소장), 국회의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규명회의록(국회도서관 소장), 국가의 피해자 보상자료(광주광역시 소장), 미국의 5·18 관련 비밀해제 문서(미국 국무성, 국방부 소장) 등이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민중의 저항과 연대 의식으로 이후 군부독재 치하에서 지속적으로 전개된 민주화운동의 원동력이 됐다. 한국의 사회운동은 1970년대의 지식인 중심의 반독재민주화운동에서 1980년대엔 민중운동으로 저변을 넓히는 계기가 된다. 5·18은 특히,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기폭제가 됐다. 유네스코는 광주민주화운동이 한국뿐만 아니라 필리핀, 타이, 중국, 베트남 등 아시아 등지에서 일어난 여러 민주화 운동에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UNESCO
시카고대학교의 브루스 커밍스(Bruce Cummings) 교수는 "5·18 민주화운동은 한국이 독재와 미국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되었다"(2005, BBC)고 밝혔다. 미 웬트워스공대(Wentworth Institute of Technology)의 조지 카치아피카스(George Katsiaficas) 교수는 "광주민주화운동이 독재통치에서 민주화로 가는 역사적인 과정이었으며, 그 에너지가 전 세계로 퍼져 가고 있다"(2000, 세미나)고 말했다. 하버드·옌칭연구소의 컨설턴트 에드워드 베이커(Edward Baker)는 "5·18 민주화운동은 독재통치와 미국에 대한 한국인의 입장을 변화시킨 전환점"(2005)이라고 평가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Pope John Paul II)는 1984년 5월 한국을 비롯 파푸아 뉴기니, 솔로몬 제도 및 태국으로 사도여행(Apostolic Journey to Korea, Papua New Guinea, Solomon Islands and Thailand)을 했다. 교황은 5월 4일 한국 방문 직후 광주 무등경기장(Municipal Stadium Mudung of Kwangju)로 향했다. 그리고, '화해(Reconciliation)'를 주제로 미사를 열었다. 교황은 "최근의 참극으로 여러분이 받은 깊은 상처를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단순히 인간적으로 말한다면, 특히 광주 시민들은 그 상처를 극복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바로 그러기에 화해의 은총이 여러분들에게 내려질 것입니다."
5·18 기념재단은 광주민주화운동의 정신을 보존하기 위해 2000년부터 국내외 인권에 기여한 이들에게 광주인권상을 시상하고 있다. http://www.518.org
#6월 민주항쟁 June Democracy Movement
VIOLENT PROTESTS ROCK SOUTH KOREA, The New York Times (1987. 6. 11)
"뺑소니 전술을 사용하는 수천명의 잘 정비된 시위대가 지난 밤부터 오늘까지 진압 경찰과 거리에서 싸웠다. 이는 수년간 서울에서 벌어졌던 최악의 가두 폭력이었다. 수요일 밤 잠시 동안 시위대는 도심 거리 일부를 통제해 증원부대가 도착하기 전 경찰은 버스로 퇴각해야만 했다. 오늘 오후엔 최루탄을 발사하는 헬멧을 쓴 경찰들과 서울의 명동성당 광장에서 물러나기를 거부하며 투석하는 수백명 학생들과의 접전이 계속됐다.시위대는 성당 주변의 거리에 금속과 나무 바리케이드로 차단했다. 몇명 시위학생들은 광장에서 경찰과 충돌해서 부상당한 것으로 보도됐다." -뉴욕타임스-
장준환 감독의 영화 '1987: When the Day Comes'(2017)
5·18 민주화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은 6월 항쟁은 두 청년(박종철, 이한열)의 죽음과 진실을 규명하려는 언론에 의해 촉발됐다. 그리고, 항쟁은 민주화의 결실을 맺게된다.
1987년 1월 13일 자정경 하숙집에서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생 박종철(1964-1987)군이 수사관 6명에게 연행됐다.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조사실에서 대학문화연구회 선배 박종운의 행방을 물었으나,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수사관들은 폭행, 전기고문, 물고문을 가했고, 14일 박종철군은 사망했다.
14일 연행되어 치안본부에서 조사를 받아오던 공안사건관련 피의자 박종철군(21·서울대언어학과 3년)이 이날 하오 경찰조사를 받던중 숨졌다. 경찰은 박군의 사인을 쇼크사라고 검찰에 보고 했다. 그러나 검찰은 박군이 수사기관의 가혹행위로 인해 숨졌을 가능성에 대해 수사증이다.
-<중앙일보, 신성호 기자>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
중앙일보 보도 다음날인 1월 16일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기자회견에서 "밤 사이 술을 많이 마셔 갈증이 난다며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심문을 시작, 박종철군의 친구의 소재를 묻던 중 책상을 '탁' 치니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중앙대부속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사망하였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쇼크사(심장마비)'가 아니라 '고문치사'였음을 시인한 셈이다.
당시 중앙대 용산병원 전임강사였던 오연상 의사는 대공분실 조사실로 가서 물에 흥건한채 팬티만 입고 침대에 누워있던 박종철군에게 심폐소생술을 실시하고, 강심제를 주사했는데 소생할 기미가 없어 30분 뒤 사망진단을 내렸다. 오연상 의사는 16일 찾아온 기자(동아일보 윤상삼 기자)에게 물고문을 증언했으며, 그날 저녁 용산 그레이스호텔(현재 신원빌딩)에 끌려가 24시간 동안 검찰 조사를 받았다. 다음날 신길산업 간판을 단 신길동 대공분실에서 다시 조사를 받고, 일주일간 도피생활을 했다. 이후 협박과 비난에 시달렸으며 경찰의 감시가 이어졌다.
1987년 1월 19일자 동아일보 <윤상삼 기자>
16일 동아일보는 '대학생 경찰조사 받다 사망'(황열헌 기자)으로 대서특필했다. 박종철의 삼촌 박월길("종철이가 수십군데 맞아서 피멍이 들어 있더라")씨와 누나 은숙("철이가 경찰에 맞아 죽었다")씨의 증언을 토대로 보도한 것이다.
19일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다시 기자회견을 열어 "박종운군의 소재를 묻는 심문에 답하지 않자 머리를 한차례 잠시 집어넣고 내놓았으며, 계속 진술을 거부하자 다시 집어넣는 과정에서 급소인 목 부위가 욕조 턱에 눌려 질식사망했다"고 번복함으로써 '가혹행위'로 인한 사망을 시인했다.
2월부터 '박종철군 범국민 추도식'과 도심 시위가 열렸다. 4월 임기(7년) 말을 맞은 전두환 대통령은 특별담화(4·13 호헌조치)를 발표, 개헌논의 중지와 기존 헌법에 따른 권력이양의 의지를 밝혔다. 4월 14일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 등 각계 인사들이 호헌조치를 비판하는 시국성명을 발표했다.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광주항쟁 7주년 미사에서 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가 경찰의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 축소·은폐를 폭로했다. 이후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시작됐다.
1987년 6월 11일자 중앙일보
6월 9일 연세대 경영학과 2학년생 이한열(1966-1987)군은 학교 앞에서 '호헌철폐' '독재타도!'을 외치며 시위도중 전투경찰이 쏜 최루탄에 뒷머리를 맞아 쓰러졌다. 로이터 사진기자 정태원씨는 그를 부축하는 도서관학과 학생(이종창)의 모습을 포착했다. 이 한장의 사진은 중앙일보 1면에 실이며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됐다.
일제강점기 1926년 순종의 인산일에 일어났던 독립운동(6·10 만세 운동) 6월 10일, 노태우가 민정당의 제 13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한편, 전국에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의 주최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6월 19일 전두환은 군 투입 준비 지시를 내렸지만, 미국의 반대로 유보됐다. 6월 26일 전국 37개 도시에서 동시다발로 국민평화대행진 시위가 벌어졌다. 노동자, 학생 뿐만 아니라 빈민, 농민, 회사원까지 참가하며, 학생 항쟁에서 시민항쟁으로 변모했다.
6월 29일 대선 후보 노태우는 직선제 개헌, 김대중 사면복권 및 구속자 석방 등을 골자로 하는 민주화 요구를 대폭 수용하는 시국 수습방안(6.29 선언)을 발표했다. 그해 10월 국민투표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통과됐지만, 김대중 통일민주당 고문과 김영삼 총재가 후보 출마를 놓고 분열을 일으켜 노태우 후보 당선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전두환은 임기가 끝나자마자 여론이 두려워 강원도 설악산의 백담사에 들어가 생활했다.
1987년 7월 10일자 조선일보
1987년 6월 항쟁은 시민들의 힘으로 군사독재를 종식하고,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을 일구어낸 민주화 운동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국민의 투표로 정부를 뽑는 민주공화정을 개막한 분수령이 됐다. 6월 항쟁을 기점으로 한국의 사회운동은 환경운동, 소비자운동, 여성운동, 인권운동으로 다양하게 전개된다.
1987년 7월 9일 이한열군 장례식은 '민주국민장'(民主國民葬)으로 치루어졌다. 당시 추모 인파는 서울 100만명, 광주 50만명 등 총 160만명으로 알려졌다.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2008 US beef protest in South Korea
2008년 6월 10일 광우병 촛불시위(Candlelight Demonstrations).
1987년 6월 항쟁이 박종철 물고문 치사 기사(중앙일보, 동아일보)와 이한열 최루탄 피격 사진(로이터-중앙일보)이 언론에 보도되며 시위를 촉발한 반면, 2008 4월 광우병 촛불 시위는 MBC-TV PD 수첩의 광우병 시리즈 특별취재(미국산 쇠고기, 과연 광우병에서 안전한가?'가 기폭제가 됐다.
이명박 대통령은 2008년 4월 19일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정상회담 당시 30개월령 이상의 특정위험물질을 포함한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겠다고 약속하는 FTA 협상(US-Korea Free Trade Agreement)을 타결했다. 4월 29일 MBC-TV 'PD수첩'에서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mad cow disease)의 위험성을 보도하면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여론이 들끓게 된다. 5월 2일 이명박 탄핵을 위한 범국민운동본부 등에서 집회가 열렸으며, 가족 단위 참가에 가수 김장훈과 윤도현 등 연예인들을 초빙하는 '촛불 문화제'를 타이틀로 시위가 열리기 시작해 그해 8월까지 이어졌다.
6월 10일(1926. 6·10 만세운동) 시위 때 절정을 이루게 된다. 그러자 6월 18일 이명박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성명을 냈다. 1천500여개의 시민단체가 참여한 광우병 국민대책회의는 8월 15일 대학로에서 5천500여명이 참가한 100일 기념 촛불시위로 '미 쇠고기 촛불집회'를 종결했다.
그해 5월 2일부터 106일간 촛불 시위는 총 2천 398회로 총참가자는 93만 2천여명에 달했다. 이중 1천476명이 입건되어 1천258명이 기소됐다. 그리고, 이명박 정부는 쇠고기 추가협상을 받아들여 가장 문제가 되었던 나이 제한과 30개월령 이상 쇠고기 수입과 광우병에 민감한 부위 수입을 철폐하게 된다.
저항의 문화 Culture of Resistance
#금지곡의 시대, 1970년대 저항의 문화
김민기, 양희은, 송창식, 김추자, 이장희... 1970년대 대표 가수들의 노래들이 유신정권에 의해 금지됐다.
한국에서 금지곡은 대중가요의 역사와 함께 시작됐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민족감정을 고취한다는 이유로 '아리랑' '봉선화' '눈물젖은 두만강' 등을 금지했다. 해방 후에는 월북작가들의 노래가 금지됐다. 1967년 음반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며 사전 검열이 시작됐다.
기성세대의 의식을 거부하는 청년 문화는 저항의 문화다. 미국에선 제 2차세계대전 후 방황했던 '비트 세대(Beat Generation)', 1960-70년대 베트남 전쟁 중엔 '히피족(Hippies)'이 문화를 주도했다. 군사독재정권의 유신체제로 신음했던 1970년대 한국에서는 청년들이 주도한 대항의 문화(counterculture)가 풍미했다.
장발, 청바지와 미니 스커트, 통기타, 생맥주와 음악다방으로 대표되었던 1970년대의 낭만적인 청년문화는 군사정권의 단속과 검열로 인해 금지곡과 대마초 파동에 휩쓸려갔다. 1975년 긴급조치 9호로 '아침이슬' '고래사냥' '물 좀 주소' '왜 불러' '그건 너' '미인' 거짓말이야' '행복의 나라로' 등 대중가요 223곡이 반체제, 풍자, 미풍양속 저해 등을 이유로 금지곡이 됐다. 김민기, 한대수, 이장희, 양희은, 송창식, 신중현 등 포크와 록의 선구자들은 노래를 잃었다. 예술가들의 창작의 자유를 거세하면서 대중문화는 암흑기를 맞게 된다.
유신정권은 '건전한 국민생활과 사회기풍의 확립'을 명분으로 대중가요를 검열했다. 1975년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는 대중가요 심의 기준을 #국가안보와 총화에 악영향을 줄 수 있는 것 #외래풍조의 무분별한 도입과 모방 #패배, 자학, 비탄 #선정적, 퇴폐적인 것 등으로 금지곡을 선정하며 창작의 자유를 억압했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 이슬처럼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낮의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아침 이슬, 김민기(1971)-
#광주민주화 운동과 민중 미술 Minjung Art
홍성담, 5월 횃불행진, 목판 25.3 x 43cm 1983.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펜은 칼보다 강하고, 이미지는 글보다 강하다.
미술사에서 위대한 화가들은 현실에서 도피하지 않고, 진행형의 비극을 외면하지 않았다. 프란시스코 고야의 회화 '1808년 5월 3일의 학살(El tres de mayo de 1808, 1814)'은 프랑스가 스페인을 점령 후 반란군이 봉기하자 프랑스군이 보복조치로 마드리드의 양민을 학살한 사건을 극적으로 묘사했다. 파블로 피카소의 '게르니카(Guernica,1937)'는 1937년 4월 스페인 내전 당시 프랑코 장군을 지원하는 나치 독일군이 바스크 지방의 게르니카를 연쇄 폭격해 인구의 1/3에 달하는 1천600여명이 사망한 참사을 담았다.
한국의 진보적인 미술가들은 1980년 5.18 광주 항쟁 이후 역사와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바탕으로, 민주화 운동에 동참하는 미술운동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민중미술(Minjung Art)이 태어났다. 민중미술은 동학농민혁명으로부터 분단의 현실, 6·25 전쟁, 4·19 의거, 5·18 항쟁 등 역사적 사건을 비롯, 통일 문제,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 노동현장, 농민, 여성 인권 등을 주제로 표현했다.
하지만, 전두환의 제 5공화국 하에서는 민중미술이 탄압받았다. 1985년 7월 아랍문화회관에서 열린 '1985, 한국미술 20대의 힘' 전시작 36점이 경찰에 의해 강제 철거되고, 19명이 강제 연행되어 5명이 구속됐다.
199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민중미술 15년전'이 열렸다. 런던 테이트모던 미술관의 웹사이트에는 '민중미술(Minjung Art)'이 미술용어로 해설되어 있다.
"민중미술은 평화로운 시위대 200여명이 살해되었던 1980년 광주학살 이후 태동한 한국의 사회정치적 미술운동이다."
https://www.tate.org.uk/art/art-terms/m/minjung-art
#뉴욕타임스 2018년 3월 유관순 사망기사 보도
Yu Gwan-sun, a Korean Independence Activist Who Defied Japanese Rule, NYT
뉴욕타임스는 2018년 3월 28일자에서 3.1 운동의 영웅 유관순(Yu Gwan-sun, 1902-1920)의 사망기사(Yu Gwan-sun, a Korean Independence Activist Who Defied Japanese Rule)를 실었다.
뉴욕타임스는 1851년 창간 이래 사망기사(obituaries)는 대체로 백인 남성 중심이었다. 2018년 3월 8일자부터 뒤늦게 균형을 잡기 위해 역사 속에서 기억해야할 타민족 여성들을 발굴해 새로이 사망기사를 실었다. 그리고, 2018년 3월 28일자에 유관순 열사의 삶을 전했다. 거의 100년만에 서방에 알리는 유관순의 사망 소식이다.
사망기사는 "1919년 봄 한국의 독립을 지원하는 평화의 시위가 소집되었을 때 유관순이라는 이름의 16세 소녀는 자유에 대한 국민의 집단적 열망의 얼굴이 됐다"라고 시작했다. 이어 이화학당에 재학중이던 유관순 열사의 31만세운동을 설명하며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서도 31운동 1주년 기념일에 죄수들과 함께 대규모 시위를 조직했다"고 전했다. 이와 함께 "내 손톱이 빠져 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 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라는 내용의 옥중 일기를 인용했다.
이어 1902년 12월 16일 천안 인근에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유관순 열사의 삶과 한일합방에 대해 설명한 후 2019년 100주년을 맞게 될 3.1 절을 언급했다. 그리고, 2015년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총리가 박물관이 된 서대문형무소를 방문해 "저는 오늘 이곳에서 고문당하고, 살해된 분들에게 진심으로 사과드리기 위해 왔습니다"라고 말했으며, 무릎을 꿇고 묵념을 했다고 전했다.
블랙리스트 감독: 봉준호(기생충)와 황동혁(오징어 게임)
칸영화제와 아카데미상(작품, 각본, 감독, 국제극영화상)을 휩쓴 영화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과 넷플릭스 사상 최고의 시청자수를 기록한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황동혁 감독의 공통점은? 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인물들이다. 봉준호 감독은 '살인의 추억'(2003), '괴물'(2006)과 '설국열차(2013)' 3편으로, 황동혁 감독은 '도가니'(2011)로 정부로부터 낙인이 찍혔다. 2008년 청와대 국정원의 보고서 '문화권력 균형화 전략'에는 '괴물'이 "반미 및 정부의 무능을 부각 국민의식 좌경화"라는 평가가 내려졌다. 한편, 2013년 국정원의 'CJ의 좌편향 문화사업 확장 및 인물영입 여론제라 BH 보고서'에는 '도가니'가 "공무원과 경찰을 부패-무능한 비리집단으로 묘사, 국민에게 부정적 인식을 주입"이라는 이유였다. 또한 박찬욱 감독도 '공동경비구역/JSA'(2000)으로 블랙리스트 명단에 올랐다.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출신 봉준호 감독과 서울대학교 신문학과를 졸업한 황동혁 감독은 우리 민족의 DNA인 저항정신과 비판의식의 피가 흐르는 연출가들이다. '기생충'은 빈부격차로 인간성을 상실하게 되는 가족의 이야기로 자본주의를 비판한다. '오징어 게임' 역시 사회 불평등의 문제를 돈과 생존이 걸린 놀이로 풍자하며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제시했다. 두 작품의 주인공들은 사회적 약자들이다.
봉준호 감독은 영화 밖 인터뷰에서도 예리한 비판 정신을 잊지 않았다. 2019년 10월 뉴욕 매거진(New York Magazine)과의 인터뷰에서는 "한국영화가 지난 20년 동안 세계 영화시장에 큰 영향을 끼쳤지만, 왜 한번도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르지 못한 것 같나?"는 질문에 대해 "오스카는 국제영화제가 아니라 로컬(지역) 시상식이다(The Oscars are not an international film festival. They’re very local.)"이라고 용감하게 발언했다. 미국의 자민족 우월주의를 비판한 것이다. 2020년 1월 제 77회 골든글로브상 최우수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후엔 "1인치 자막의 장벽을 뛰어 넘으면 훨씬 더 많은 영화를 즐길 수 있습니다(Once you overcome the one inch tall barrier of subtitles, you will be introduced to so many more amazing films)"라고 소감을 밝혀 화제가 됐다. 자막 읽는 것에 게으른 미 영화 관객들을 향한 쓴 소리였다.
'미나리'로 2021 영국아카데미상(BAFTA)과 아카데미상 여우주연상을 거머쥔 베테랑 배우 윤여정씨도 영화 밖에서 비판의식을 잊지 않았다. 윤씨는 2021년 4월 BAFTA상 수상자로 호명된 후 화상을 통해 "모든 상이 의미 있지만, 이번엔 특히 '고상한 척한다'고 알려진 영국인들에게 좋은 배우로 인정받아서 정말 기쁘고 영광입니다"라고 솔직한 소감을 밝혔다. 이에 로이터(Reuters) 통신과 영국 신문 인디펜던트(Independent)에선 "윤여정의 농담같은 수상소감이 웃음을 끌어냈다"고 전했으며, 트위터에서도 "윤여정은 그말로 전체 시상식 시즌에서 우승했다"며 화제가 됐다.
이어진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윤여정씨는 배우 브래드 피트로부터 수상자로 지명된 후 "Mr. Brad Pitt, Finally. Nice to meet you. Where were you when we were filming in Tulsa. It's an honor to meet you.(일단 브래드 피트 선생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저희가 털사에서 촬영할 때 어디 계셨나요? 뵙게되어 영광입니다.)"라고 말해 아카데미 회원들의 폭소를 자아냈다. 그는 자신과 함께 후보에 올랐던 여배우들에 대해 "우리는 각자 다른 역을 연기했으며, 서로 경쟁 상대가 될 수 없다. 내가 조금 더 운이 좋았을 뿐이다"라고 밝혔다.
윤여정씨의 수상 소감에 대해 CNN은 "쇼의 인기를 독차지했다(Steal the show)", 영국의 가디언지는 "진정한 챔피언(What a champion)"이라고 평했다. 뉴욕타임스는 그의 소감에 대해 "무척 무미건조한 시상식에서 윤여정은 신의 선물이었다(In an awfully dry ceremony, Youn was a godsend.)"고 찬사를 보냈다.
#미씨USA 회원들 NYT에 세월호 참사, 박근혜 정권 비판 광고
해외의 한인들도 저항정신과 비판의식은 날카롭다. 2014년 4월 15일 세월호 참사는 미국 내 한인들에게도 슬픔과 고통과 분노의 바다에 빠트렸다. 미국의 한인 여성 커뮤니티 미씨USA(MissyUSA)는 기금을 모았다. 열흘만에 4천여명이 참가해 16만 달러 이상을 조성했다.
그리고, 그해 5월과 8월 뉴욕타임스에 박근혜 정부의 무능과 부패를 규탄하는 전면광고를 두차례 냈다. "Bring the Truth to Light( 진실을 밝혀라)" "South Korean govt Sank Sewol Ferry, but can not Sink the Truth!(한국 정부가 세월호를 침몰시켰지만, 진실을 침몰시킬 수는 없다)"는 내용의 광고였다. 한인 여성들의 고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저항과 비판 정신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다.
박숙희/블로거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후 한양대 대학원 연극영화과 수료. 사진, 비디오, 영화 잡지 기자, 대우비디오 카피라이터, KBS-2FM '영화음악실', MBC-TV '출발! 비디오 여행' 작가로 일한 후 1996년 뉴욕으로 이주했다. Korean Press Agency와 뉴욕중앙일보 문화 & 레저 담당 기자를 거쳐 2012년 3월부터 뉴욕컬처비트(NYCultureBeat)를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