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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아시안필름페스티벌 초청...'한류 원조 감독' 재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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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쇼브라더스의 전속 감독으로 대흥행을 기록한 '죽음의 다섯손가락'은 퀜틴 타란티노 감독의 '세계 영화사 걸작 10편'에 선정됐다. 

 

 

 2012 ‘한류(Korean Wave)’의  40여년 전 정창화 감독이 있었다. 홍콩 무협영화를 세계에 알린 한류의 선구자, 정창화 감독이 뉴욕을 방문한다.

 


 정 감독은 6월 29일부터 7월 15일까지 링컨센터에서 열리는 제 11회 뉴욕 아시안필름페스티벌 (New York Asian Film Festival)에서 평생공로상을 수상한다. 지난해엔 ’홍콩의 스필버그’로 불리우는 서극(수이 하크) 감독이 이 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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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수효과를 쓰지않은 정통 액션으로 미국과 유럽에 첫 수출된 홍콩 영화가 된 '죽음의 다섯 손가락'. 2003년
 칸국제영화제에 클래식 부문에 특별 상영됐다.

 

 

 ‘한국 액션영화의 대부’로 불리우는  정창화 감독은 해외로 진출한 제 1호 한국 감독이다. 1972년 홍콩에서 ‘죽음의 다섯 손가락(The King Boxer: Five Finger’s of Death)’을 연출해 미국 등 서방세계에 수출되며 쿵후를 세계에 알렸다.

 


 무도대회를 앞두고, 무림을 제패하려는 주인공과 악당들의 대결을 그린 이 영화는 미국에서 처음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아시안 영화로 알려져 있다. ‘펄프 픽션(Pulp Fiction)’의 퀜틴 타란티노(Quentin Tarantino) 감독이 ‘세계 걸작 10편’으로 꼽았으며, 그의 영화 ‘킬 빌(Kill Bill)’에 정창화 감독에 대한 오마쥬가  보인다.

 

 ‘죽음의 다섯 손가락’은 2005년 칸 국제영화제에서 특별 상영됐다. 2003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지난해 가을엔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정창화 감독 회고전이 열렸다. 

 

 

 

▶죽음의 다섯 손가락(The King Boxer, 1972): 6월 30일 오후 5시 30분. WRT. *정창화 감독 참석. 평생공로상 시상식.


 

▶스위프트 나잇(The Swift Night, 1971): 7월 1일 오후 3시 20분. WRT. *정창화 감독 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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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찬옥 감독의 '올드 보이'에서 복수에 불타는 오대수 역을 열연한 최민식, 뒤는 강혜정. 


 

 2012 뉴욕 아시안필름페스티벌엔  ‘올드 보이’의 스타 최민식씨도 초대됐다. 최씨는 하정우와 공연한 신작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의 전성시대 (Nameless Gangster)’을 비롯 ‘올드 보이’와 권투 영화 ‘주먹이 운다(Crying Fist)’ 상영회에서 관객과 만날 예정이다.

 


 그리고, ‘올드 보이’의 박찬욱 감독과 미술평론가 출신 동생 박찬경 감독이 공동으로 연출한 단편영화 ‘파란만장(Night Fishing’도 상영될 예정이다. 아이폰으로 찍어 화제가 된 이 영화는 지난해 베를린영화제 단편영화 부문 황금곰상을 수상했다.
 

 

 올 뉴욕아시안필름페스티벌은 홍콩 출신 포호청 감독의 코미디 ‘불가리아(Vulgaria)로 개막해 대만 영화를 집중 조명한다.  

 http://www.subwaycinema.com/nyaff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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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창화 감독은 샌디에고에 거주하며 2010년 LA 한국영화제를 창설했다. Photo: 한국영상자료원 

 

 ♣정창화 감독(1928- )

 

 

 충북 진천에서 태어나 ‘자유만세’(1946)의 최인규 감독의 연출부를 지낸 후 1963년 스릴러 ‘최후의 유혹’으로 첫 메거폰을 잡았다. 할리우드 서부극 ‘셰인(Shane, 1953)’을 본 후 액션 ‘햇빛 쏟아지는 벌판’을 만들었다. 이후 김승호 주연의 문제작 ‘노다지’ 등으로 인간의 탐욕을 탐구했다.

 

 호금전 감독의 ‘방랑의 결투’(65)에 충격을 받아 남궁원, 허장강 주연으로 한국형 액션영화 ‘황혼의 검객’(67)을 연출했다. 1966년 ‘순간은 영원히’ 홍콩 로케이션 촬영 때 쇼브라더스의 란란쇼 사장의 눈에 들어 1968년부터 홍콩에서 전속 감독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1969년 연출한 에로틱한 ‘천면마녀’가 홍콩에서 흥행하며 제 1호 유럽 수출작이 된다. 이후 무협영화로 선회, 1972년 ‘죽음의 다섯 손가락’으로 미국과 유럽에 홍콩영화를 알리는 수훈을 세웠다. 이 영화를 본 이소룡이 정창화 감독을 찾아와 함께 작업하고 싶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어 골든하베스트로 이적해 ‘흑야괴객’을 만들었으며, 77년 ‘파계’를 끝으로 홍콩과 이별하고, 한국에 돌아왔다.

 

 

 그는  1979년 충무로에 화풍영화사를 설립, ‘허튼 소리’’수렁에서 건진 내 딸’ 등의 제작자로 활동한 후 영화계를 떠났다. 이후 샌디에이고에 거주하면서 2010년 LA한국영화제를 창설,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서편제'의 임권택 감독과 '오발탄'의 유현목 감독이 50-60년대 정창화 감독의 연출 조수를 거쳤으니, 뒤늦게 빛을 보는 한국영화의 살아있는 전설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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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권택 감독은 50-60년대 정창화 감독 아래서 연출 조수를 지냈다. '장군의 아들'에서 스승 정 감독의 영향이 보인다. 영화 '죽음의 다섯 손가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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