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감독의 ‘우리 선희(Our Sunhi)’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
선희(Sunhi)를 정의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Who's That Girl? ★★★★
우리 선희
1980년대 독재 치하 한국 영화에서 화두 중 하나는 ‘사회적 리얼리즘’이었을 것이다. 박광수 감독의 ‘칠수와 만수’ ‘그 섬에 가고 싶다’, 장선우 감독의 ‘꽃잎’ 박종원 감독의 ‘구로 아리랑’ 등이 소위 ‘사회적 리얼리즘’을 표방하는 정치색 짙은 인권영화의 명작들이었다.
1990년대 중반에 등장한 김기덕, 홍상수 감독은 검거나 회색인 한국영화 팔레트에 풍부한 색채를 입힌 작가주의 감독 오테르(Auteur) 감독으로 부상하게 된다.
아웃사이더들의 심리를 잔인하고도 아름답게 파고드는 김기덕 감독이나, 남자와 여자, 술과 대화라는 일상적인 상황에서 인간의 위선을 벗겨버리는 홍상수 감독은 한국 인디영화의 쌍두마차처럼 보인다.
내게 집요하게 자기 색깔을 추구하는 김기덕 감독과 홍상수 감독은 늘 다음 영화가 기다려지는 단 두명의 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이다. 인간의 본능을 벗기는 도인 김기덕과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는 명인 홍상수의 우주는 그래서 늘 흥미진진하다.
우리 선희
홍상수 감독이 15번째 영화 ‘우리 선희’로 로카르노국제영화제 감독상을 받았다. 1989년 배용균 감독이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으로 그랑쁘리인 황금표범상을 받았을 때 신인 감독 발굴의 영화제로 알려졌던 로카르노가 15편을 만든 베테랑에게 감독상을 준 것은 의외다.
여하간에 홍상수 감독의 신작 ‘우리 선희’가 12일 링컨센터필름소사이어티(FSLC)의 비평가들이 선정한 ‘필름 코멘트 셀렉츠(Film Comment Selects)’ 페스티벌에서 오프닝 작품으로 선정됐다. 이외에도 한국 독립영화 ‘조난자들’(노영석 감독)과 ‘무게’(전규환 감독)도 초대됐다. 2월 20일엔 한국영화 ‘우리 선희’ ‘조난자들’ ‘무게’ 등 세 편을 마라톤으로 상영한다.
홍상수 감독
홍상수 감독은 칸, 베를린, 베를린, 로카르노 등 유럽의 경쟁 영화제에서 공인된 작가이며, 뉴욕의 비평가들에게는 ‘거장(master)’로 꼽히는 감독이다.
비경쟁 영화제인 뉴욕영화제에서는 2002년부터 7차례 초청됐다. 2002년 '생활의 발견'으로 시작,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2004), '극장전' (2005), 해변의 여인(2006), '밤과 낮'(2008), '옥희의 영화'(2010), '누구의 탓도 아닌 해원(Nobody's Daughter Haewon)'까지 7편이 상영됐다.
그러나,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홍상수 영화는 상업적으로 흥행이 어려운 작품군에 속한다. 그래서 배급자들이 꺼리는 영화이기도 하다.
이에 FSLC의 격월간지 ‘필름 코멘트(Film Comment)’에선 홍상수 영화를 종종 ‘미개봉 걸작’ 영화에 꼽으면서, 배급자들에게 수입을 촉구하는 제스쳐를 보여왔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1996년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뉴욕에서 비디오로 받아보았을 때 무척 낯설었다. 어떻게 이토록 리얼하게 한국사회 남녀들을 보여줄 수 있을까? 리얼한 캐릭터가 오히려 영화에서 낯설게 보였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이 전의 한국영화 속 캐릭터들은 허구였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소설을 원작으로 한 많은 한국 영화들 속에선 공허한 인물들이 부유하고, 오리지널 시나리오 속 주인공들은 1차원적인 인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홍상수 영화 속의 인간들은 무엇보다도 우리와 닮아있었다.
'우리 선희' 읽기
홍상수 감독의 15번째 작품 ‘우리 선희’는 유사하면서도, 다른 이야기를 해온 홍상수 표 영화 중 가장 심오하고도 긴 긴 여운을 주는 영화인 듯하다.
선희와 최교수
영화과 졸업생인 선희(정유미 분)는 교수에게 미국 유학용 추천서를 요청하러 2년만에 학교를 찾아간다. 대학시절 자신을 예뻐했던 최동현(김상중 분) 교수의 추천서가 맘에 들지 않아 다시 요청하고, 기다리는 며칠 공안 옛 남자들을 만난다. 최 교수와 대학시절 남자친구로 감독 데뷔한 동기생 문수(이선균 분), 선배 감독 재학(정재영 분)이다. 이들은 선희가 나타나자 각자 선희와의 백일몽을 꾸게 된다.
선희와 최교수
최 교수는 솔직하게 추천서를 써준다. "숨겨진 재능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을 입증할 수는 없고..." 선희는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아 저녁을 사주며, 다시 부탁한다. 술잔이 오가는 사이 교수와 제자의 관계가 진전되고, 추천서도 좋아진다. 교수는 선희에게 빠져들기 시작한다.
선희와 문수
선희가 맥주집에서 재회하는 동기 문수는 선희와 사귀었던 관계를 토대로 한 영화로 감독 데뷔했다. 이에 대해 선희는 그게 자신의 모습이냐고 묻는다. "영화 속의 인물들은 정상이 아니야. 미쳤어"라고 말한다.
선희와 재학
유부남 선배 재학도 영화감독이다. 재학은 최 교수의 후배이자 문수의 선배다. 그러나, 여자 문제인듯 홀로 살고 있다. 선희는 재학과 우연히 만나 술을 마시고, 키스도 나눈다.
선희의 세 남자 즉 교수와 동기, 선배 이 세 남자들은 선희에 대해 정의를 갖고 있다. “내성적이긴 하지만, 머리가 좋고, 안목이 있고, 또라이같은 면도 있지만, 똑똑하고 솔직한 사람”이다. 이것이 선희의 정체에 대한 무시무시한 집단적 ‘정답’이다. ' 욕망의 객체인 나의 선희'가 '우리 선희'가 되면서 이들의 평가는 진실로 무장된다.
최교수의 두번째 추천서를 읽고난 선희는 묻는다.
"이것도 정말 저와 비슷한 거예요?"
"그럼, 이게 진짜다. 생각이란게 하면 할 수록 다른게 보이잖아"
"여기 쓰신 것처럼이라면 너무 좋겠어요"
"이게 너야"
문수와 재학
그리고, 선희의 세 남자는 술 자리에서 서로가 일제히 “끝까지 파고 들어가라”고 조언한다. 이것도 사회에서 선배가 후배에게 주는 정답의성 조언이다. 그러나, 깊게, 끝까지 파고 들어간다고 선희가 누구인지 정답을 구할 수 있을까?
교수, 동기, 선배는 얼핏 진실성 있는 남자들로 보인다. 그들 나름대로 ‘선희’에 대해 심판하고, 정의를 내리는 가부장적 지식인들이다. 그러나 ‘My Sunhi’가 ‘Our Sunhi’가 되면서 의견은 평판이 되어 버린다.
선희와 선배
우리는 ‘우리 선희’의 오프닝 장면에 등장하는 다른 선배(이상우 분)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선희의 이너 서클이 아니라 궤도 밖에 존재하는 선배를 첫 장면에 등장시킨 이유가 있을 것이다. 최교수의 소재를 묻자 선배는 금방 탄로날 거짓말("외국 출장 가셨어")을 한 후 격분한 선희에게 ‘재밌으라고 한 농담’이었다고 변명한다. 이에 선희는 사과를 요구하지만, 성우는 "너 참 순수하구나."라고 선희를 평가한다.
이에 기분이 나빠진 선희는 학교 건너편의 치킨집으로 간다. 맥주 한 잔을 원했지만, 종업원은 치킨을 시키라고 강요한다. 여기서 홍상수 감독은 은근히 한국의 경직된 사고를 드러낸다.
이처럼 경직된 사회에서 선희를 둘러싼 네 남자들은 쉽게 거짓말을 하거나, 심각하게 사람을 재단하는 독선가들이다.
그들이 정의한 ‘우리 선희’는 진실보다 오만과 편견에 가깝다. 이들의 ‘말’이나 교수의 글(추천서)로 선희를 규정할 수 있을까?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나는 누구인가? 선희는 “내가 누군지 알고 싶어요”라고 쏘아 붙인다.
최교수, 문수와 재학
영화의 결말은 창경궁이 배경이다. 가을의 창경궁에서 선희와 교수가 만나고 있고, 동기는 선희를, 선배는 교수를 찾아 창경궁으로 온다. 세 남자가 만나지만, ‘우리’ 선희는 사라지고 만다. 창경궁의 세 남자는 미궁에 빠진다. 어쩌면, 그 궁은 세 남자가 추구하는 선희의 자궁에 대한 메타포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무지에 고착된 세 남자의 동굴일까? 그들은 선희가 없는 궁 안에서 헤매고 있다.
선희의 세 남자인 교수와 영화감독, 그리고 유부남은 어쩌면 인간 홍상수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건국대 영화과 교수인 홍상수 감독은 자신의 분신들을 통해 학생 평가, 영화 만들기, 그리고 유부남의 윤리의식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은듯 하다.
남자들의 말과 글로 정의되는 선희.
‘우리 선희’는 또한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1950)을 연상시킨다. 일본 헤이안 시대 산 속에서 사무라이의 시체가 발견되어 관청에서 진술을 하게 된다. 사무라이의 아내, 산적과 무당이 불러낸 사무라이의 영혼이 진술을 하지만 셋의 진술은 모두 다르다.
‘우리 선희’는 타인에 대한 판단과 타인에게 주는 충고의 말이 이 얼마나 부조리한 편견인가를 드러낸다. 이와 더불어 욕망의 객체에 대한 가부장적인 독단을 경고하고 있다. 그래서 치킨집과 카페 아리랑에서 흘러나오는 옛날 트로트 곡 ‘고향’이 더욱 코믹하게 느껴진다.
러닝타임 88분, 2월 17일 오후 9시, 20일 오후 4시 45분. http://www.filmlinc.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