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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이영주: 싱글들의 불금(불타는 금요일)
뉴욕 촌뜨기의 일기 (3)
싱글들의 '불금'
수제비
지난 금요일엔 멀리사씨네 집에서 싱글들 파티가 열렸습니다. 처음 발단은 멀리사씨가 "티제이 맥스에서 뚜껑 있는 하얀 네모난 그릇을 하나에 5불씩 주고 샀는데, 아주 예쁘더라. 세 개 밖에 없어서 세 개만 샀어요.", 하길래 "그럼 거기다 맛있는 거 해주세요.", 농담했는데, "그럴게요." 하더니 정말 초대를 한 것입니다. 내 건강을 생각해서 밤에 운전하지 말라며 동행할 차까지 마련해 주었습니다. 차는 제 베프인 경희씨가 좋아하는 언니 미연씨가 경희씨까지 픽업해서 함께 왔습니다. 오늘의 메뉴는 수제비라는 얘기도 해주었습니다.
사실 멀리사씨와 저희 집은 엎어지면 코 닿는 거리입니다만, 저녁에 걷기는 조금 그래서 차를 타고 가야 합니다. 멀리사씨 집에는 다른 손님 한 분이 더 계셨습니다. 통성명 후 보니 나이가 제일 어린 사람이라 자연스럽게 막내가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경희씨가 막내였는데 이제 막내를 면했다며 즐거워했습니다.
멀리사씨 초대가 기쁜 이유는 살림을 예술처럼 하는 까닭입니다. 단독주택에 살다가 아파트로 이사한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멀리사씨 아파트는 완전히 미니멀 아티스트의 스튜디오같이 모던하고 심플합니다. 베란다 바로 앞이 허드슨 강이라서 리빙룸에 앉아 있으면 대형 유리 도어 뒤로 도도한 허드슨 강과 마주하게 됩니다. 강익중씨가 만들어 주었다는 가늘고 긴 나무 식탁이 멋스럽고, 그 식탁 위에 올리는 그릇들은 주인의 예술적 감각이 묻어나는 남다른 그릇들입니다. 얼마 주었느냐고 물으면 웹사이트나 아울렛 스토어에서 5불, 6불, 혹은 9불 99센트 주었다고 하니 우리들은 더 부러워합니다. 스타일리시한 큼직하고 하얀 접시에 담아져나오는 음식들 역시 늘 색감과 디자인이 범상치 않아 음식을 어떻게 프레젠테이션 해야 하는지 많이 배웁니다.
그날도 수제비 파티라더니 돼지 삼겹살에 생선졸임에 고사리 나물, 두부 부침과 미니 양배추, 토마토 요리 등, 쉴 새
없이 나오는데, 접시마다 한 폭의 그림이었습니다. 이미 배가 꽉 차서 들어갈 데가 없다고 엄살들 하더니 마지막으로 오늘의 주인공인
녹차 수제비가 등장하자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그래, 마무리는 국물이어야 해.", 하면서 "어 시원하다!" 마치 남자들처럼 배를
두드리며 수제비 그릇을 싹싹 비웠습니다.
그런데 저녁을 먹으면서 새삼 서로를 알아가니 모두들 싱글들이었습닌다. 아직 숫처녀 싱글도 있고, 도로 미스도 세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래서 싱글들의 모임으로 만들자는 얘기가 된 것입니다. 싱글끼리 모이니 무슨 얘기든 다 할 수 있고, 서로 말발도 맞고, 코드도 비스름하니 이렇게 자주 만나도 재미있을 것 같았습니다. 멀리사씨는 미대 나온 사람이지만 그림 뿐만 아니라 사진에도 조예가 깊고, 골프는 티칭 프로입니다. 비지니스 우먼인 영림씨는 건축학을 공부했고, 가정학과를 나온 빈티지 패션이 잘 어울리는 미연씨는 여행사 사장입니다.
로맨틱하게 꾸미면 아직도 볼이 발그레해지는 만년 소녀, 그러나 무엇을 해도 완벽하게 해내는 능력자 경희씨는 공무원입니다. 백수는 저 혼자지만, 저도 나름 하는 일이 쬐끔은 있으니까 명함을 디밀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의 화제도 다양했습니다. 뉴욕의 역사적인 건물 얘기에서부터 한국 남대문의 허술했던 복원 작업, 동계 올림픽과 한국 체육계의 현실, 공연, 전시회, 먹거리 이야기 등등.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했던 건 이렇게 잘 나가는 싱글들이 왜 남친이 없느냐, 남자들이 여성의 밸류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정말로 제가 진지하게 요모조모 뜯어봐도 그날 모인 여성들은 얼굴이며 몸매며 지성과 자기 능력, 살림 솜씨까지 뭐하나 빠지는 데가 없는 뛰어난 여성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섹시미도 절대 뒤쳐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갖출 것 다 갖춘 여인들을 몰라보는 남자들이 손해보는 것이라고 우리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우리끼리 대화만 다양했지 춤도 한번 추지 않으면서 "우리 모임을 '싱글들의 불금(불타는 금요일)' 이라고 할까, 아니 '광금(광란의 금요일)'이라고 하자."면서 저희끼리만 재미있어 했습니다.
혼자 사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도 옆에서 챙겨주고, 불러주고, 더불어 외로움을 나누어가는 삶일 수 있어서 그나마 축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강원도 철원 생. 중앙대 신문학과 졸업 후 충청일보 정치부 기자와 도서출판 학창사 대표를 지냈다. 1981년 미국으로 이주 1990년 '한국수필'을 통해 등단한 후 수필집 '엄마의 요술주머니' '이제는 우리가 엄마를 키울게' '내 인생의 삼중주'를 냈다. 줄리아드 음대 출신 클래식 앙상블 '안 트리오(Ahn Trio)'를 키워낸 장한 어머니이기도 하다. 현재 뉴욕중앙일보에 '뉴욕의 맛과 멋' 칼럼을 연재 중이며, 뉴저지 AWCA에서 '수필교실'과 '북 클럽'을 지도한다. 또, 매월 세번째 토요일엔 음식을 싸갖고 와 영화 감상 후 토론하는 '예사모' 클럽을 운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