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Il Lee)씨 볼펜 추상화 읽기
*이일(Il Lee)씨 볼펜추상화 '무제 303'(Untitled 303) 메트로폴리탄뮤지엄 영구 소장 (2016. 1.19)
http://www.nyculturebeat.com/?document_srl=3391017&mid=CulBeatExpress
볼펜으로 담은 우주관: 선.면.여백의 삼중주
이일(Il Lee) 볼펜 추상화의 세계
*볼펜추상화가 이일(Il Lee)씨가 메트로폴리탄뮤지엄의 아티스트 프로젝트 100(The Artist Project 100)에 초대되어 자신에게 영감을 주는 화가 렘브란트를 소개하고 있다. (2015. 6.22)
비디오 보기 http://artistproject.metmuseum.org/2/il-lee/
펜의 위력에 정복된 캔버스. 2006년 트라이베카 API 갤러리에서 이일씨.
볼펜추상화.
캔버스와 볼펜의 만남은 어딘가 어울리지않는 것처럼 보인다. 종이 위의 볼펜화는 드로잉과 회화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이일씨가 4반세기 동안 고수해온 볼펜그림은 극도의 미니멀리즘을 추구한다.
음악의 본질이 음향인 것처럼 회화의 본질은 색채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화백은 색채를 거부하는 대신 흑색이나 청색의 단색볼펜으로 캔버스를 장악한다.
이일씨의 작품에는 제목 대신 일련의 번호만 있을 뿐이다.
그의 추상화는 마크 로츠코의 색면(colore field) 회화처럼 선입견 없이 무심(無心)하게 명상하는 자세를 필요로 한다. 관람자는 마음을 비우고 기묘한 면(form)과 선(line) 그리고 여백(space)이 자아내는 시각적 3중주에 취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 화백의 볼펜추상화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그의 작품에는 시간이 담겨져 있다.
볼펜의 선이 기나 긴 시간을 거쳐서 면이 된다. 즉 이 화백의 볼펜화는 '선+시간=면'이라는 공식으로 완성된다. 육중한 '면'과 가벼운 '선'의 놀림이 어우려져 정중동(靜中動)의 미학을 담고 있다.
2007 퀸즈뮤지엄 전시
그러면 그의 캔버스는 무엇일까?
그것은 인생일지도 인류의 역사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백지 상태로 태어나 성장한다. 생각할줄 아는 호모 사피엔스 인류는 문명을 창조했다.
백지에서 시작한 선은 면을 갈망한다. 지식과 지혜 그리고 노동으로 선은 면이 된다. 면이 되지 못한 야생의 선들은 바로 인간의 욕망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이씨의 캔버스는 우주와 인간의 인식체계를 상징하는 듯하다. 여백은 미지의 세계 면은 인류의 발명과 발견인 것이다. 테두리의 선은 인간의 자유로운 사고와 지성에 대한 메타포처럼 보인다.
여기서 주목해야하는 부분은 날카롭게 잘려진 면에 대한 의문이다.
자르는 주체는 무엇일까? 권력이나 이데올로기의 강압에 의한 것이 아닐까? 거세된 부분에는 풀포기 한 그루 자라지 않는다. 반대 급부로 다른 면들은 자유의지가 살아있는 생명초처럼 느껴진다.
2007년 퀸즈뮤지엄 전시 오프닝.
그렇다면 육중한 면은 권력이나 이데올로기일 것이다. 야생의 선들은 자유의지를 지닌 아웃사이더들이며 인간의 역사를 진화시키는 동력일 것이다. 면은 보수이며 선은 반동이다. 인간의 역사가 정반합(正反合)의 변증법으로 발전해나갈 때 선과 면과 형태는 바로 역사의 한 메타포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화백의 작품은 보여진 부분과 감추어진 부분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그의 캔버스는 거대한 우주의 한 부분처럼 보인다.
그러면 우리는 얼마나 알고 가는 것일까? 그런 의미에서 그의 볼펜 추상화는 고도의 철학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듯하다.
이일(Il Lee)
홍익대학교 회화과 졸업 후 뉴욕으로 이주 프랫인스티튜트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81년부터 볼펜을 이용한 추상화 작업을 시작, 2007년 3월 캘리포니아주 산호세뮤지엄에서 155점을 소개하는 회고전을, 같은 해 7월 퀸즈뮤지엄에서 ‘볼펜드로잉’전을 열었다.
2010년 11월 메트로폴리탄뮤지엄 한국실에서 열린 '한국미술에서의 재현·추상'전에서 ‘무제-303’과 캔버스에 아클릴릭&오일화 ‘IW-105'가 소개됐다.
산호세뮤지엄 큐레이터 조안 노트럽은 “이씨는 자신만의 호젓한 공간에서 온몸을 끝없이 움직이며 펼치는 혼자만의 공연과도 같은 모습으로 작업하는, 움직임이 많은 작가다. 화폭은 이 진한 몸놀림에서 나오는 흔적을 담아내는 무대와도 같다. 그는 한마디로 명인”이라 평했다.
*이일씨 신작전이 5월 1일부터 6월 14일까지 Art Projects International에서 열린다.
위 리뷰는 뉴욕중앙일보(2006. 5. 16/박숙희 기자)에 게재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