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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혜진/에피소드&오브제
2014.06.20 14:50

(25) 한혜진: 내가 뉴욕을 사랑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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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 오브제(5) 내가 뉴욕을 사랑하는 이유




연기파 꽃미남 배우같은 이 도시의 이중성에 매혹




photo 3 (5).jpg  Photo: Hye Jin Han



1. 름이다. 잡동사니만 잘 치워도 시원해진다. 나중에 참고로  본다면서 모아놓은 잡지 꾸러미도 꽤 많은 장소를 차지하고 있다.  몇 년 전, 주간 ‘NEW YORK’ 매거진 의 표지가 눈길을 끈다.  여름 특집호라 그런가?  선글라스를 낀 젊은 여인이 혓바닥을 내민 채 웃고 있다.  그런데, 그 렌즈 속엔 뉴욕의 온갖 마천루가 다 들어 있다. 뉴욕은 매력적이다. 그 매력적인 냄새는 여름에 더욱 진하게 풍겨난다. 


나도 그랬었다. 뉴욕은 나를 초대하지 않았지만, 그냥 한번 해보자고 달겨든 뉴욕 생활이었다. 뉴욕은 '엠파이어 스테이트' 아닌가. 그리고 뉴욕시는 그 심장이고.  그것은 침을 발라 찜을 해 놓고는 할 때까지 해 보자고 하는 짝사랑의 시도였다.  누구든 뉴욕을 사랑치 않는 이 없으니, 또한 그 경쟁은 치열할 수 밖에.  뉴욕을 사랑했던지, 뉴욕이 내게 줄 사랑을 사랑했던지 간에 나의 뉴욕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항상 ‘ACTION’이 존재하는 곳, 행동파이기에 뉴욕은 멋지다.  표지 속의 그녀를 다시 본다.  그녀는 지금 막 뉴욕 사냥에 나선 것일까? 출발하기 전 고개를 돌려 짓고 있는 회심의 미소, 기대의 미소, 뉴욕을 포획해 보겠다는 자신감에 찬 미소는  매력적인 남성의 뒤를 쫓는 여성의 경쾌한 발걸음과 닮아 있다.  뉴욕의 힘찬 맥박소리를 따라 다니다보면, 그녀도 어느 새  그 박동소리에 길들여진 뉴요커가 되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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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Hye Jin Han



2. 여름을 기차 여행에 비유한다면, 메모리얼 데이를 시작으로 그 기착지는  레이버 데이일 것이다.  독립 기념일 연휴는 그 여행 중 첫번 째로 당도하는 정거장일 테이고, 잠시 쉬는 동안 여름은 차 문을 열고, 사람들을 쏟아내어 강으로 바다로 안내한다.  맨 살갗에 와 닿는 두 가지의 상반 된 느낌, 작열하는 태양이 주는 그것과 차가운 물살에 그 느낌을 식혀내며, 여름이란 이렇게 극과 극이 상존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실감하게 된다.  극과 극이 통할 때, 전류는 흐르고, 그 흐름 속에서 자연은 성장한다.  


아, 여름은 성숙이다. 어느 새, 소녀티를 벗어버리고 우리 앞에 선 동네 처녀의 그 매혹적인 모습처럼.  여름은 다시 크게 경적소리를 울리며 출발을 알린다.  기차 속에는 방금 물에서 빠져 나온 싱그러운 얼굴들이 가득 차 있다.  기차는 달리기 시작한다.  여름의 한낮을 달리고 있다. 저기 창문옆에는 동승한 뉴욕이 바깥 경치를 즐기며 함께 가고 있다.



photo 1 (4).jpg Photo: Hye Jin Han



3. 몇해 전 일요일 아침이라고 기억된다.  우리 가족은 맨하탄에 위치한 교회를 가기 위해 이른 아침 공기를 가르며, 차를 타고 가고 있었다.  그 때, 저 앞 맨홀 뚜껑 위로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가 보였다.  여유롭게 피어오르는 그 연기 속에서 나는 피곤한 어제 밤을 보내고 이른 아침 담배 한 개비를 피워 문 한 남자가 떠올려졌다.  


그 남자는 바로 뉴욕이었다.  그 방만한 생활을 떠 받치고 사는 남자, 뉴욕이었다.  그는 이른 아침 ‘싸’하게 느껴지는 담배 한 개비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단정한 수트의 저고리를 벗어버리고, 넥타이 마저 느슨하게 잡아 당긴 채, 안락의자에 앉아서였을까? 아니면, 찢어진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으로 어느 건물벽에 기대서서였을까?  


뉴욕은 때때로 어울리지 않을 것같은 배역을 맡아 열연하는 꽃미남 배우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마치 영화 ‘우는 남자’의 장동건처럼 말이다. 그 이중성이란 사람을 매혹시키는 큰 요소아닐까?   위세당당한 마천루와 저 남루한 지하철의 대비처럼. 하여튼, 그날 아침 작은 평화를 즐기던 뉴욕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photo 2 (4)350.jpg Photo: Hye Jin Han



4.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독립기념일이다.  불꽃놀이는 우리에게 일종의 환타지를 선사한다.  그 때문일까? 마치 전날 무도회에 갔었던 재투성이 아가씨 신데렐라가 부엌에서 유리구두 한 짝을 만지작거리듯, 나는 가금씩 밤하늘을 올려다 보게 된다. 그 곳에는 불꽃놀이 대신 별이 있다.  내가 어릴 적, 고향에서 보던 별이다.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이라고 점찍어 둔 바로 그 별일 것이다.  


내 눈이 나빠져서인지, 공해때문인지 별은 그 때처럼 반짝이지 않지만.  별을 보는 순간, 그 빛은 내 눈을 타고 들어와 머릿속 오래된 기억의 서랍을 열어재낀다.  그 속에서 나온 작고 시시한 물건들이 때론 나를 기쁘게 한다.  몽당연필, 오래된 수첩, 빛바랜 사진, 닳아빠진 낡은 지갑같은 것들이.  여름밤 서늘해지면, 밖에 나와 하늘을 봐아겠다. 별하고 친해져야겠다.  별들이 들려주는 지나간 이야기에  귀기울여 봐야겠다. 


어느덧 뉴욕도 나에겐 고향이 된 느낌이다. 별보고 잠드는 밤이 있기에...




 hanhyejin3-200.jpg 한혜진/수필집 '길을 묻지 않는 낙타' 저자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영문과 졸업 후 결혼, 1985년 뉴욕으로 이주했다. 한양마트 이사로 일하면서 김정기 시인의 권유로 글쓰기와 연애를 시작, 이민 생활의 균형을 잡기위해 시와 수필을 써왔다. 2011년 뉴저지 리지필드 한양마트에 갤러리1&9을 오픈, 한인 작가들을 소개했으며, 롱아일랜드 집 안에 마련한 공방에서 쥬얼리 디자인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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