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체(729)
- 강익중/詩 아닌 詩(83)
- 김미경/서촌 오후 4시(13)
- 김원숙/이야기하는 붓(5)
- 김호봉/Memory(10)
- 김희자/바람의 메시지(30)
- 남광우/일할 수 있는 행복(3)
- 마종일/대나무 숲(6)
- 박준/사람과 사막(9)
- 스테파니 S. 리/흔들리며 피는 꽃(49)
- 연사숙/동촌의 꿈(6)
- 이수임/창가의 선인장(149)
- 이영주/뉴욕 촌뜨기의 일기(65)
- June Korea/잊혀져 갈 것들을 기억하는 방법(12)
- 한혜진/에피소드&오브제(23)
- 필 황/택시 블루스(12)
- 허병렬/은총의 교실(102)
- 홍영혜/빨간 등대(70)
- 박숙희/수다만리(66)
- 사랑방(16)
(31) 마종일: 꿈
대나무 숲 (1) 꿈
숨 죽이고 있는 자연 속에서 느끼는 희열
중첩된 산 너머 흰 눈이 가득 쌓여있다. 보는 것만도 설레인다. 골짜기를 걸어서 비탈길을 올라 하나의 산을 넘으면 그 설산은 더욱 가까이 보인다. 가슴은 더 흥분되어 쿵쾅거리고, 또 하나의 산을 넘고 또 넘고, 마침내 그 설산 봉우리의 턱 밑에 서서 숨을 가다듬고 옆으로 돌아 정상을 향해 걸어간다.*
Jongil Ma, How Do You Feel Today?" "I Feel Great and You?" 16' x 80' x 30' Height, Wood, Rope, Plexiglas, 2005, Brooklyn Art Lot
겨울 해는 짧다던가. 거기에다 산중의 해는 더욱 짧다. 분명 따스한 한 웅큼의 햇빛이 나를 감싸고 있었는데 이제 한 오라기 실처럼 가는 햇빛이 서쪽 산의 소나무 끝에 달려 있다. 내가 몇 시간 이상 엎치락덮치락 차를 빼내기 위해 사경을 헤매고 있는 이 낭떠러지 끝에는 이제 햇빛은 더 이상 없었다. 햇빛만 없는 것이 아니라 나를 도와 줄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멀쩡한 정신이 아닌 이상 누가 아직 눈이 녹지 않은 비포장 높은 산길을 운전할 생각을 할 것인가. 이곳은 오대산 서북쪽 능선에 있는 군사용 비포장길이었고, 약 6부 능선 정도를 올라서고 있었다.
따스하기만 했던 2월의 해가 없어지면 이 깊은 산골 눈이 녹지 않은 이곳은 곧 영하로 떨어지겠지. 겨우 승용차 한대가 지나 갈 만한 좁은 비포장 비탈길. 응달진 곳은 아직도 눈이 제법 쌓여 있었고, 초보 운전자인 나는 승용차의 능력을 과신했다. 아주 얕은 도랑을 몰랐고 바퀴가 눈 쌓인 그곳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던 것. 수동기어를 전진 후진을 거듭하면서 빠져 나오려 했지만 바퀴는 점점 더 깊게 빠져가고 있었다. 체인을 채우는 방법도 몰라 많은 시간을 허비했고, 가까스로 체인을 대충 채운 후에는 그 좁은 비탈길에서 차를 돌려 나올 수가 없어 어딘가에 있을 약간 넓은 지역을 찾아 다시 올라가야 했다.
이제 정상을 넘어가려 했던 나의 무모함은 어떻게 해서든지 이곳에서 밤을 세우지 않아야 한다는데 꽂혔고 그 가능성을 위해 노력했다. 이렇게 난감한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나는 끝없는 많은 생각하곤 했다. 오늘의 이 상황은 나의 장래를 위해 득이 될까 실이 될까에서부터, 잠깐 겪는 고통인가 아니면 더 황당한 파격적인 곳까지 내 달릴 것인가, 또 아니면 더 무참한 일이 기다리고 있는가 등등. 내가 그때까지 자라오며 수없이 겪었던 위험에서 무사히 빠져 나왔던 것처럼 해가 완전히 서산으로 지고 어두워질 무렵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하산 길 드라이브를 시작했다. 한참을 내려왔을 때, 조그만 전구가 하나 켜져 있는 민가를 지날 때 나의 온 몸은 오랜 추위의 들판에서 헤매다 따뜻한 이불 속으로 들어가는 환상을 보았다.
Jongil Ma, How Do You Feel Today?" "I Feel Great and You?" (Detail)
이것은 내가 뉴욕에 오기 전 한국에서 약 3년간 미대 입시를 준비 했던 때 겪은 실화다. 전, 후기를 모두 마치는 2월에는 공황상태가 되었다. 왜냐고? 전후기까지 똑 떨어졌으니까. 오랜 직장 생활을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위해 준비하고 있었지만 순순하지 못했다. 이 시기는 마치 먹물처럼 캄캄한 세상에서 내 삶의 방향을 찾는 일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딱히 효율적이고 바람직한 길이 없었고 나 자신이 느끼는 나의 실체는 한없이 작고 수많은 제한적 상황과 즉 수백 수천 개의 크고 작은 삶의 실타래에 묶여 있는 형국이었다. 그것들로부터 빠져 나올까 아니면 묻히고 말까는 매일매일의 투쟁이었다. 이 투쟁은 차를 운전해서 애꿎은 강원도 산길에서 풀어내려 했다. 사람이 별로 없었고 찻길은 항상 널널해서 초보지만 여유 있게 운전하며 많은 생각을 하고 나 자신에게 질문을 하는데 안성맞춤이었다. 더욱이 빠르게 움직이는 차는 내가 급박하게 나의 미래를 찾는 행위와 많이 닮아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고, 또 자연스럽게 그것이 익숙해지기도 했고 달콤함과 씁쓰름한 두 가지의 현실들이 나를 더 유혹하곤 했던 것 같다.
앞의 경험처럼 목숨거는 날도 있었지만 어느 평범한 정선의 비포장길 소나무 숲을 지날 때는 늦은 2월 함박눈이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내리는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이내 소복이 쌓여 그 위를 미끄러지듯 지나갈 때에는 나를 억누르고 있던 고통을 어느새 새까맣게 잊어 버리기도 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고 완벽하게 숨죽이고 있는 자연을 나 혼자 소유하고 있었기에. 물론 그 희열은 마치 한 영화에서 범죄자가 탈출해 도착한 바닷가에 서 있던 것과 같은 기분이기도 했다. 한없이 누릴 수 있는 자유지만 또한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는 것. 나는 이내 더 빠른 시간 안에 다음 순간인 현실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 이렇게 매년 2월에는 거의 한달 내내 매일매일 강원도로 출장가곤 했다. 나에게 기쁘기도, 슬프기도 그리고 패배감을 극복하려는 몸부림이기도, 현실로부터 도망가기도 하는 수없이 복잡한 행위는 그 해마다 반복되었다. 그리고 3월이 되면 나와 같이 입시 준비했던 학생들이 수업을 시작했고, 나는 또 나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가곤 했다.
*내가 오랜 직장생활을 끝내고 새로운 일을 계획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꾸는 꿈 이야기.
마종일/작가
1961년 전라남도 장흥에서 태어나 덕수상고 졸업. 대우 중공업을 거쳐 한겨레 신문사 감사실에서 일하다 1991년 퇴사한 후 박재동 화백 소개로 그의 후배 화실에서 그림을 배웠다. 1996년 뉴욕으로 이주 스쿨오브비주얼아트를 졸업했다. 이후 2006 광주미술관 레지던시 작가, 2008 소크라테스 조각공원 신임미술가로 선정되었으며, 2009 인천여성미술비엔날레, 2010 폴란드 로츠(Lodz) 비엔날레에 초청됐다. 2010 LMCC 거버너스아일랜드, 2011 랜달스아일랜드, 롱아일랜드 이슬립미술관, 브롱스 미술관 전시에 참가했다. 2008 알(AHL)재단 공모전에 당선됐으며, 2012 폴락크래스너 그랜트를 받았다. http://www.majong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