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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이수임: 아버지의 여자 친구
창가의 선인장 (5)
아버지의 여자 친구
“내가 갈 데가 있다. 너도 만날 사람 많지?”
2년 만에 만난 친정 아버지가 점심 먹고 서둘러 일어났다.
“아버지 어딜 가는데?”
“너는 네 볼일이나 봐. 내일 아침 남산에서 보자”며 부지런히 어딘가를 갔다.
아흔이 다 된 할아버지가 바쁘기는 뭐가 그리 바쁘다고 그러는지. 서울에서 아버지와의 첫 만남은 그렇게 끝났다.
My father, 2008, sumi ink on paper, 11 x 8.5 inches
엄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는 결혼도 하지 않고, 여자 친구들과 바쁘게 지낸다. 서울에 갈 때마다 아버지 여자 친구와 식사도 하고 여행 다니며 친하게 지냈다.
내가 만난 첫 번째 아줌마는 아버지와 오랜 관계를 유지했다. '아버지가 80세까지만이라도 건강하게 살아 줬으면 좋겠다.'는 말을 자주 하며. 78세가 되던 어느 눈 오는 날, 아버지가 남산에 올라가다 다리를 다쳤다. 아버지가 누워 있다 돌아가실 거로 생각한 아주머니는 미련없이 떠났다.
젊었을 때부터 남산 밑에 살며 매일 산에 올라가 운동을 꾸준히 한 아버지는 몇 달 후에 완쾌되어 다시 산에 갈 수 있었다. 멀쩡히 걸어 다니는 아버지를 보자 아주머니는 돌아오겠다며 여러 번 찾아왔지만, 이미 아버지에게는 또 다른 여자 친구가 생겼다.
그런데 새로운 여자 친구는 소개해주지 않는다.
“아버지 비밀이 뭐가 그렇게 많아?"
“이번에는 어떤 분이기에 소개도 안 해주고, 왜 그래?”
“넌 알 거 없다, 네가 그 아줌마를 알면 내가 죽고 난 다음 그 아줌마 인생을 책임질 거야? 너나 잘 살아!”
본인이 세상을 떠나고 난 후 새엄마와 남은 자식 간의 갈등을 막기 위해서 결혼도 하지 않으셨다. 자식들을 모두 미국에 보내놓고 혼자 사시며 아침마다 남산에 올라가 열심히 운동하시는 것도 자식을 힘들게 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또한, 외국에 사는 자식들이 선산으로 찾아오는 번거로움을 막기 위해 죽으면 화장해서 남산 가는 길에 뿌려 달라신다.
미국에도 내 결혼식 때 한번 오고는 다시 오지 않았다. “내가 그곳에 가면 며칠은 좋겠지만 바쁜 미국 생활에 노인이 가서 자식들 힘들게 할 일이 있느냐?” 며. '네가 잘사는 것이 효도하는 것'이라며 '손자를 만나면 반갑지만 헤어지면 더 반갑다'는 옛 일본 속담이 있다며 굳이 사양한다. 물론 자식에게 금전적으로 부담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자식들을 도와주며 '아직도 줄 수 있다는 게 본인의 즐거움.'이란다.
자식에게 의지하지 않고 혼자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아버지를 오늘날까지 건강하고 풍요롭게 살게 하지 않았을까. 멀리 계신 아버지가 외롭다 아프다고 하면 자식들은 먼 이국에서 죄책감에 어찌 잘 살 수 있을까 생각하니 아버지께 고마울 뿐이다.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어찌 된다는 옛말이 있는데, 지금까지는 만나는 여자마다 자랑스럽게 소개하곤 했는데 정말 이상하다.
나보다 훨씬 젊은 여자를 사귀느라 소개하기가 민망해서일까? 몹시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