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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이수임: 내가 술을 끊은 이유
창가의 선인장 (8) 어느 애주가의 고백
내가 술을 끊은 이유
학교 갔다 올 즈음, 반주하시는 아버지 옆에 앉아 학교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들려주며 애교를 떨면 기분 좋아진 아버지는 지갑을 열고 용돈을 줬다. 그리고는 ‘너도 한잔해라.’며 조그만 잔에 술을 따라주던 것이 고등학교 때부터였으니.
Soo Im Lee, 1/20, Red red wine, 1993, 10 x 8 inches
‘하루에 사과 한 알을 먹으면 의사가 필요 없다.’는데, 독방에 갇혀 치료받는 알코올 중독자가 면회 오는 친지에게 항상 사과를 가져다 달라는 부탁을 했다. 술을 끊고 건강하게 살려고 결심했나 보다 했더니 웬걸! 독방에서 사과주를 담고 있더라는 일화가 있듯이 현대 문명이 아무리 발달해 신상품이 우후죽순 쏟아져나와도 술만한 발명품은 없다며 허구한 날 마시던 술을 끊은 지 두 달이 넘어간다.
학교 갔다 올 즈음, 반주하시는 아버지 옆에 앉아 학교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들려주며 애교를 떨면 기분 좋아진 아버지는 지갑을 열고 용돈을 줬다. 그리고는 ‘너도 한잔해라.’며 조그만 잔에 술을 따라주던 것이 고등학교 때부터였으니. 당시 국내 수준으로 손색이 없는 포도주라고 떠들어대던 ‘마주앙’으로 이어져 와인 없는 세상은 ‘앙꼬 없는 찐빵.’일 정도로 임신했을 때만 빼고는 내 삶의 일부가 되어 오랜 세월 함께 했다.
한잔 이상 마시지 않는 친정 아버지처럼 저녁에 한잔 오프닝에서는 두잔, 취하거나 술주정을 한 적은 없었다. 술에 취해서가 아니라 체한다. 술을 좀 과하게 마시면 한밤중에 일어나 토사곽란을 했고, 흥에 겨워 이것저것 섞어 마시면 화장실을 들락거리다 쓰러져 비실대면선 오슬오슬 추워 깨어나곤 했으니. 다행히 머리라도 다치지 않고 깨어났길래 망정이지 혹 운이 없었으면 지금 이 글을 쓰지도 못하고 저 세상에서 한잔하고 있지 않을지?
모범이 되어야 할 엄마가 해가 어둑해지기 시작하면 신이 나서 술상을 차리고 한잔하라며 아이들에게 권하곤 했다. 술병을 상 밑으로 슬그머니 감추며 철없는 엄마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는 아이를 보면서 ‘고만둘 때가 오긴 왔구나.’ 했다.
“나 술 끊었다.’”
“잘했다. 그렇지 않아도 누구 좋은 일 하려고 허구한 날 마시나?"
“누구?”
“너 술 마시다 일찍 죽고 네 남편 새 장가가면 엉뚱한 여자만 영광보는데 억울하지도 않니? 술 끊고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지.”
친구 말을 듣고 보니 오랜 세월 병석에 계시다 일찍 돌아가신 우리 엄마는 억울하겠다. 고생하며 아끼고 쓰지 않고 모은 재산 쉽게 써 대는 며느리와 아버지의 걸프렌드만 횡재했다는 생각에 가슴이 쓰렸다. “다 그들이 타고 난 복이다.”며 아버지는 얄밉게 얼버무리기나 했는데.
죽은 마누라만 생각하며 살 수도 없고, 그렇게 살아서도 안 되는 것이 또 다른 세상의 조화니 어쩌겠는가. 억울함이란 것이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에 더욱 억울하지만, 누구를 탓하랴. 삶을 잘 관리하지 못한 자신을 탓해야지. 엄마처럼 일찍 가지 않으려면 술을 정말 끊어야 한다.
오프닝에서는 어떡하지? 그나마 와인을 마셔야지 삐꺽거리는 기계에다 기름을 치듯 버벅거리던 영어가 술술 나오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