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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이영주: 존재의 모태(母胎) 순수 원시 대자연, 아이슬란드 여행기 (3)
뉴욕 촌뜨기의 일기 (15)
존재의 모태(母胎) 순수 원시 대자연
- 아이슬란드 여행기 (3) 마지막 편-
글: 이영주(수필가) 사진: 이명선(프리랜서 사진작가)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왔는가. 아니 내가 바로 이곳에서 세상과의 탯줄을 이었을 것 같은 편안함, 내 모태가 이곳이라는 말도 되지 않는 믿음.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신비한 마력이 제 존재의 기원까지 되짚게 하는 이상한 땅이었습니다.
아이슬란드 관광의 압권은 골든 서클 관광입니다. 레이캬비크 남동부의 가이저, 걸포스 폭포, 싱베리르 국립공원 등, 세 곳을 가는 일일관광입니다.
출발은 아침 8시 30분. 호텔 로비에서 모였습니다. 밖은 깜깜했습니다. 우리를 태운 미니버스는 전날 우리가 섭렵했던 레이캬비크 올드 타운을 돌며 역사적인 건물과 장소들을 설명해주었지만, 별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참 어둡구나, 하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시내를 벗어나니 더욱 그런 느낌이 마음을 묘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하나 뿐인 국도를 따라 가는 것인데, 시내를 벗어나자 우리 차 밖에 다른 차들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깜깜한 암흑의 세계였습니다. 그나마 차창 밖으로 지나는 경관이 어슴푸레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아침 10시가 훨씬 지나서 부터였습니다.
프란체스카의 말대로 우리가 지나는 길은 화산석으로 덮인 검은 대지였지만, 그 대지의 아름다움이 더할 수 없는 감동을 주었습니다. 가이드는 참으로 열심히 우리가 통과하는 마을들을 설명해주었습니다. 그 마을에 처음 생긴 그로서리 스토어, 그 상점 주인이 어떻게 상점을 내고 얼마동안 거기서 살고 있는지, 꽃집은 누가 하는 것인지, 그 꽃집의 과거와 현재, 지열을 이용한 요리로 영국 방송에까지 소개된 식당의 역사까지, 사실 우리들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 소소한 이야기들을 대단한 역사처럼 빼놓지 않고 들려주었습니다. 그런 타운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서로 다 이름알고 있고, 뿐만 아니라 그 집의 숟가락 수까지 꿰고 있단 얘기도 빠트리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잠시 머물렀던 도시는 제법 가게도 몇 개 형성되어 있었는데, 그런 곳들을 통과하면서 놀란 건 대규모의 비닐하우스입니다. 아이슬란드는 화산이 폭발한 용암과 화산석으로 만들어진 땅이 대부분이라 농작물을 경작할 수 없는 불모의 땅입니다. 그래서 발전한 것이 비닐하우스 재배입니다. 비닐하우스에선 국민들이 먹을 채소는 물론 꽃이며 나무까지 다양하게, 대규모로 재배를 합니다. 자동차가 지나는 길 양쪽의 산을 지날 때마다 가이드는 그 화산에 얽혀 있는 에피소드들도 얘기해 주어서 화산으로 이루어진 아이슬란드 이야기는 끝이 없었습니다.
지평선이 보이는 황야를 지나 처음 당도한 곳은 폭포였습니다. 그리고 그곳서 아이슬란드 와서 처음으로 열린 푸른 하늘도 보았습니다. 비록 태양은 태양은 없지만 파란 하늘색은 주변의 화산재 땅과 더불어 한 줄로 서 있는 날씬한 나무들과 더불어 매우 밝고 예뻤습니다.
그곳서 조금 더 가서 두 번째 본 폭포가 진짜 주인공인 걸포스 폭포(Gullfoss : ‘걸’은 금, ‘포스’는 폭포) 입니다. 걸포스 폭포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10대 폭포’에 드는 유명한 폭포입니다. 높이 32m짜리 쌍둥이 폭포로, 아이슬란드에서 가장 긴 흐비타 강이 2.3㎞ 길이의 경사면을 타고 내려와 물줄기를 쏟아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미국의 나이아가라 폭포나 남미의 이과수 폭포와 다른 점은 주변이 인간이 만든 인공 조형물이 하나도 없이 그냥 자연 그대로라는 점입니다.
폭포가 쏟아지는 계곡과 주변의 시에나 브라운 화산재 황무지, 멀리 보이는 빙산. 회색빛 하늘, 이끼 낀 용암들. 인간이 도저히 만들 수 없는 기기묘묘한 자연의 색깔들이 어우러져 뿜어내는 에너지는 황무지가 황폐한 황무지로 보이지 않고 어머니의 자궁처럼 왠지 가서 안기고 싶은 섬세하고 따뜻한 기류로 가득 차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왔는가. 아니 내가 바로 이곳에서 세상과의 탯줄을 이었을 것 같은 편안함, 내 모태가 이곳이라는 말도 되지 않는 믿음.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신비한 마력이 제 존재의 기원까지 되짚게 하는 이상한 땅이었습니다.
두 번째가 최고 60m의 물줄기를 뿜어 올리는 간헐천, 즉 가이저(Geyser)입니다. 가이저에선 몇 분마다 물줄기가 터져 올라오는데, 올라오기 전에 그 주변 땅들의 꿈틀거리며 요동치는 모습에서 생명의 태동이 느껴지고, 그런 용트림이 내 몸 속에서도 바쁘게 일어나는 듯한 환각에 빠졌습니다. 사진을 찍으려고 폼을 잡아봤지만 분출되는 순간이 너무 짧아 카메라에 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멀리사는 그게 너무 재미있다며 하루 종일이라도 있을 수 있다고 싱글벙글 이었습니다. 간헐천을 뜻하는 영어단어 ‘가이저(geyser)’는 이곳 지명 게이시르(Geysir)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합니다.
간헐천 뒤로 30분이면 올라갔다 올 수 있는 산이 있어서 에스더와 둘이서 그 산을 올랐습니다. 간헐천에서 올라오는 물길 때문인지 산으로 오르는 길은 인절미보다 더 찰진 흙길이었습니다. 에스더는 숨이 차서 헉헉대는 저를 기다려 주면서 산길을 조심조심 올라갔습니다. 산 위에서 내려다보는 대지는 같은 높이에서 보는 대지와는 다른 더 큰 울림이 있었습니다. 산 뒤편의 계곡 너머엔 또 하나의 신세계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에스더는 셀카로 우리들의 등산을 기념해 주었습니다.
싱베리르 국립공원으로 가는 길에 말을 기르는 목장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말들이 말 같지 않고 마치 소와 접합시킨 것처럼 얼굴도 소를 많이 닮았고, 목도 짧고, 다리도 매우 짧고 굵었습니다. 프란체스카는 “얘네들은 일꾼 말이야. 그러니까 저렇게 키도 못 자라고 다리도 굵은 거야.”, 했습니다. 나중에 가이드가 이 말들이 노르웨이에서 건너온 말이라고 설명해주었습니다. 북구의 말들이 그렇게 왜소하고 익살스런 모습의 종(種)이라고 합니다.
말들이 우리가 서 있는 철조망 가까이 다가오자 갑자기 멀리사가 목소리를 소녀처럼 가늘게 내면서 “얘들아, 이리 와. 사진 찍어줄게. 여기여기, 그렇지, 그렇지. 더 좀 가까이 가까이.” 하면서 “우쭈쭈쭛‘”하며 애교를 피웠습니다. 말들은 마치 알아듣는 것처럼 멀리사 쪽으로 가까이 갔습니다. 그 모습이 신기해서 내가 한참 웃었는데, 멀리사는 뉴욕에서도 그렇게 나를 또 한 번 웃겼습니다.
맨하튼에서 차를 타고 가다가 신호등에 걸렸을 때, 마침 창 밖으로 아빠가 딸을 안고 가는 모습을 본 것입니다. 그 아빠는 다른 손에 작아도 너무 작은 아기 강아지를 끌고 있었는데, 워낙 남자 걸음이라 보폭이 넓어서 강아지는 그 걸음을 못 따라가고 질질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멀리사는 갑자기 아기 목소리로 떨면서 “아빠, 아빠, 쪼꼼 쩐쩐이 걸으제요, 저 다리 아빠요. 저 다리가 짜바저 아빠 못따라가요. 아야 아야.”, 하면서 진짜 아픈 것처럼 흑흑 우는 흉내까지 냈습니다. 워낙 개를 좋아해서 개만 보면 그렇게 목소리가 달라진다고 하는데, 8등신도 아닌 9등신의 여자어른이 그처럼 귀여운 척(?)을 하니 배꼽이 빠지도록 웃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실은 그런 그녀의 순수에, 진심에, 저는 그럴 때마다 감동, 또 감동합니다.
골든 서클의 마지막 포인트인 싱베리르 국립공원이 중요한 이유는 노르웨이에서 이주한 바이킹들이 900년부터 매년 여름 여기에 모여 부족 간 문제를 논의하며 평화를 다져 930년, 아이슬란드의 첫 의회인 ‘알싱’이 태동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알싱은 11세기 들어서는 의회 역할로 발전해 1798년까지 계속됐다고 하는데, 아이슬란드인들은 이것을 지구촌 ‘민주의회’의 효시로 여기며 무척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국립공원 전망대 뒤로는 높이 20∼30m의 벼랑이 수백 m나 병풍처럼 이어집니다. 서로 키스하는 남녀의 형상도 있고, 바위 사이에 간당간당 떨어질 것처럼 붙어 있는 바위가 눈길을 끌기도 했습니다. 그 아래로 폭 15∼30m가량의 길이 나 있는데 길 끝 쪽에 두 지각 판이 벌어져 생긴 틈새가 보입니다. 그 지각판 왼쪽이 북미, 오른쪽 낮은 지형이 유라시아 쪽이라는데, 그런 설명은 백번 들어도 저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화산 폭발이 그저 일상인 나라. 자연이 맨살을 드러내고 있는 나라. 여름엔 낮이, 겨울엔 밤이 계속되는 나라. 이상한 나라에 온 앨리스처럼 아이슬란드는 제게 모두 신기하고 낯설었습니다. 아이슬란드의 화산재 황무지 위에 서면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우리네 삶이 몸으로 이해됩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자연의 신비가 몸에서 개울이 됐다가, 강이 됐다가, 바다가 되고, 폭포가 됩니다. 원시의 청정한 자연이 주는 기적이었습니다.
저의 아이슬란드 여행기는 여기까지 입니다. 다음 날 떠나기 전에 우리는 다시 한번 블루 라군에 가서 얼굴에 진흙 팩도 몇 번씩이나 더 하며 아이슬란드 맥주도 마시고, 꿈같은 온천을 한번 더 마음껏 했습니다. 가벼워진 몸과 마음이 나비처럼 춤을 추었습니다.
이영주/수필가
강원도 철원 생. 중앙대 신문학과 졸업 후 충청일보 정치부 기자와 도서출판 학창사 대표를 지냈다. 1981년 미국으로 이주 1990년 '한국수필'을 통해 등단한 후 수필집 '엄마의 요술주머니' '이제는 우리가 엄마를 키울게' '내 인생의 삼중주'를 냈다. 줄리아드 음대 출신 클래식 앙상블 '안 트리오(Ahn Trio)'를 키워낸 장한 어머니이기도 하다. 현재 뉴욕중앙일보에 '뉴욕의 맛과 멋' 칼럼을 연재 중이며, 뉴저지 AWCA에서 '수필교실'과 '북 클럽'을 지도한다. 또, 매월 세번째 토요일엔 음식을 싸갖고 와 영화 감상 후 토론하는 '예사모' 클럽을 운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