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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이수임: 피카소도 오나시스도 아니지만...
창가의 선인장 (11) 부부 화가의 딜레마
우리 남편, 오나시스도 피카소도 아니지만...
Soo Im Lee, m/p, 2000, Live on the edge, 10 x 8 inches
풀타임 화가인 우리 부부도 한때는 여느 한인과 마찬가지로 3년 동안 장사를 했다.
1985년 초, 뭔가는 해서 먹고 살아야 하는데 돈도 기술도 없는 자신을 탓하며 브루클린 그린포인트 상점가를 맥없이 걸었다. 입구에 먼지가 그득 쌓여있는 빈 가게 렌트 사인을 봤다.
배고픔이 만들어낸 용기랄까? 랜드로드에게 연락하니 두 달치 다운페이에 월세를 내란다. 우리 처지로서는 시작할 수 없는 가게지만, 시작이 반이라고 집주인에게 사정했다. 우리 부부를 아래위로 쳐다보며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주인은 ‘돈을 벌어 다운페이를 하라.’며 한 달 치만 내란다.
한 달 집세를 내야하고, 가게도 꾸며야 하고 물건도 채워야 하는데 고민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또 어디서 그런 뻔뻔한 용기가 났는지, 선배 소개로 서너 번 눈인사를 나눈 같은 동네 델리하는 분을 덥석 찾아가 사정 이야기를 했다. 선뜻 몇천 불을 꿔 줬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지금 생각해도 고맙기 그지없다.
폴란드계 유대인인 헨리는 70년대 낡은 차 트렁크 뒷문을 열고 봄 잠바를 내게 넘겨줬다. 도매상에서 땡처리한 물건을 대량으로 구매해 소매상에 대주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1년 전 옷가게에서 일할 때 만났다. 내가 옷가게를 연다니까 물건을 대줄 테니 팔아서 갚으라며 제일 먼저 달려왔다.
가게 수리도 간판도 남편이 손수 했다. 간판도 달기 전에 지나가는 동네 사람들(대부분이 폴란드인)이 기웃거리며 몰려들기 시작했다. 한쪽에선 가게 수리를 하고 나는 장사를 했다. 물건은 가져오기가 무섭게 팔려나갔다. 멋모르고 시작한 시점이 이스터(Easter)와 마더스 데이(Mother's Day)에 맞물렸으니. 그전에는 미국 사람 (특히 여자)들이 이스터를 전후해 봄옷으로 갈아입는 것조차도 몰랐고 폴란드인들은 옷에 돈을 아낌없이 쓰는 민족이라는 것을 후에 알았다.
제 2차 세계대전 후 미국에 건너온 폴란드인들의 취향을 누구보다도 훤히 꿰뚫고 있는 헨리가 가져온 봄 잠바와 겨울 코트는 동네 아낙네들이 거의 다 하나둘씩 걸쳤을 만큼 수도 없이 팔았다
장사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가게에는 물건이 가득 찼다. 빚도 청산하고 집주인에게 두 달 치 다운페이를 주고도 손에 돈을 쥐게 되었다. 다음 날 끼니를 걱정하던 예전의 내가 아니었다. 머릿속은 온통 돈 벌 궁리로 또 다른 가게를 물색하려는 생각으로 꽉 차 있었는데.
모처럼 시아버님이 알래스카에서 일하던 손을 놓고 오셨다. 남편을 ‘오나시스로 만들 것인지? 피카소로 만들 것인지?’를 잘 생각해 보라며 장사가 잘돼 좋아하는 나에게 찬물을 끼얹었다. ‘오나시스는? 피카소는 아무나 되나?’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헌데 그 말이 뱅뱅 돌며 마음이 뒤숭숭해졌다.
시아버지 본인이 그 모진 세월 속에서 화가의 꿈을 접고 생활인으로 사셨다. 아들만이라도 화가의 길을 가기를 바랐는데 며느리가 들어와 장삿 속으로 빠지는 것이 마뜩잖았던 것이다. 남편도 처음엔 장사가 제법 되니 신이 났지만, 장사하랴, 그림 그리랴, 그것이 제대로 되겠는가. 아쉽지만 가게를 처분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남편은 오나시스도 피카소도 아니지만, 온종일 작업실에서 지내는 시간 그것이 곧 작가로서의 자그마한 기쁨이 아니겠는가!